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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선 Oct 01. 2021

#9. 보이지 않는 눈과 귀



신입사원 세 사람은 며칠 후, 회사 근처 번화가에 있는 유명한 수제 버거 집에서 모였다. 이 모임을 제안한 건 다름 아닌 학인이었다. 운 좋게 직책이 팀장 이상인 직원들을 대상으로 간담회가 예정된 덕분에 거의 모든 직원들이 정시 퇴근이 가능했던 터였다.


어린이날이라 했던가. 학인은 최근에 알게 된 직장인 은어를 떠올렸다. 회사에서 어린이날은 부서장이 없어 비교적 자유로운 날을 일컬었다. 아니나 다를까 퇴근 30분 전부터 삭막한 사무실에 이례적인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대화가 단절된 팀원들이 최근 유행하는 드라마로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하고, 새로 발굴한 맛집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토록 순수하고 해맑은 사람들의 표정은 처음이라 학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김창희 주임의 고약한 얼굴이 착해 보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는 여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인 곳을 전전하며 다짜고짜 소개팅을 요구했는데, 그럴 때마다 음흉하게 숱 없는 눈썹을 실룩이는 바람에 원성을 샀다.


안타깝게도 오직 정윤만 그 단발성 호사(好事)를 누리지 못했다. 일자리지원팀의 분위기는 여전히 성에가 가득한 냉동고처럼 냉랭했다. 함께 욕해주거나 따뜻한 말로 위로를 건네는 드라마 속 팀원들 따윈 없었다. 정윤은 정반대로 갑자기 원인모를 증오심을 드러낸 윤수정 사원 때문에 더 마음이 복잡해진 상태였다. 심지어 윤수정 사원은 정윤과 비슷한 또래였기에 더 그랬다. 

그 속에서 그나마 정윤이 위안 삼을 수 있던 것은 한 과장이 최근 들어 자주 자리를 비웠고 오늘 역시 다른 팀장들과 함께 간담회에 참석했다는 것이었다. 뾰족한 가시방석에 앉아야 할 운명으로부터 운 좋게 해방되어 잠시나마 숨통을 틔울 수 있었다.


학인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검은 뿔테 뒤로 눈두덩이가 퉁퉁 부은 동기를 바라보았다. 늦었지만 몇 안 되는 아군들의 위로로 어루만져진 정윤은 식당 자리에 앉자마자 울분을 토해냈다. 중간중간 격분해서 커진 그녀의 목소리가 매장에 흐르는 팝 음악을 뚫고 나올 지경이었다. 그럴 때마다 주변에 앉은 사람들의 따사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학인은 대신 주위를 둘러보며 멋쩍은 웃음과 함께 사과의 눈빛을 돌렸다. 유일하게 일행의 바로 뒤쪽에서 벽을 마주 보고 앉은 덩치 큰 남자만이 뒤돌아보지 않았다.


“저, 이제 괜찮아요. 진짜로.”


15분 전에 나온 햄버거를 앞에 두고 정윤이 눈가를 훔쳤다. 손의 움직임을 따라 검은 눈 화장이 길게 꼬리를 만들며 번졌다. 정윤의 맞은편에 앉은 학인과 재혁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식어버린 하얀 접시 위의 음식 역시 처음 나온 모양 그대로였다.


“맥주 나왔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앞치마를 두른 직원이 뒤늦게 온도차로 서리가 낀 맥주잔을 쟁반에서 내리며 사과했다. 심각한 분위기에 심취한 세 사람은 직원의 늦장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들은 말없이 저마다 시킨 맥주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다시 정적을 깬 것은 정윤이었다.


“위로해주시려고 이렇게 자리도 마련해주시고. 사실 저 여기 있으면 안 되거든요. 엄마가 희귀병이라 얼굴 아래로 아예 움직이질 못해서 누구 도움 없인 아무것도 못해요. 그래서 원래 오늘도 바로 병원으로 갔어야 했는데... 근데, 정말 거기 박혀서 혼자 있기 싫었어요. 최소한 내가 겪은 일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하고 같이 있고 싶었어요. 안 그러면 곧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거든요. 병원에서 수건으로 듣지도 못하는 엄마 몸 닦으면서 괜찮다고 연기하는 게 아니라, 저도 어디다 힘들다고 얘기하고 싶었어요. 진짜 나란 사람은 왜 이렇게 나약한 걸까요? 그 기분 아세요? 그냥 잘 걸어가다가 갑자기 끝없는 싱크홀에 떨어진 기분? 제가 그날 딱 그 기분이었어요.”


정윤은 잠깐의 자유를 만끽하는 것조차 죄책감이 들어 괴로웠다. 그녀의 머릿속엔 항상 인형처럼 같은 표정으로 건조하게 누워있는 엄마에 대한 걱정이 조각조각 나뉘어 박혀 있었다. 그건 정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나무토막에 단단히 박혀버린 나사못 같아서 혼자서는 뽑아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오늘 개인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하면서도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해야만 했다. 때론 재충전도 필요한 법이니까. 쉼 없이 고생한 나에게 주는 선물이니까. 하지만 그럴수록 정윤의 마음은 더 불편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신이 보란 듯이 그녀의 죄를 반추라도 시키려는 듯, 눈앞의 맥주잔이 해방감과 죄책감이 뒤섞인 자신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동기 좋다는 게 뭔가요? 서로 힘들 때 챙겨야죠. 아까 간담회 때문에 팀장님들 한 시간 일찍 나가신다는 얘기 들으니까 바로 모여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늘이 딱이다! 그래서 두 분한테 급하게 연락했죠. 마침 재혁 씨도 시간이 돼서 다행이네요.”


“뭐... 마침 있었던 약속도 취소된 참이었거든요.”


재혁은 곧바로 ‘어떻게 보면 첫 모임이기도 하고...’라고 중얼거렸지만 그의 낮은 목소리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묻혀 두 사람은 듣지 못했다. 재혁은 홀로 민망했는지 'Shit'이라고 말하며 헛기침을 하고는 잔을 들어 올렸다.


“건배!”


이윽고 세 개의 잔이 한 곳으로 모였다. 재혁이 잔을 끝까지 부딪히기도 전에 자신의 팔을 쑥 빼내서 먼저 입술을 축이는 바람에 학인이 바라던 도원결의의 그림은 완성되지 못했다. 허공에서 어색하게 남은 두 사람의 잔만 강하게 부딪혔다. 하필 맥주가 가득 담겨있던 정윤의 잔은 기울기가 생기자마자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거품과 함께 와르르 넘쳐흐르고 말았다. 그 바람에 정윤은 자주 입고 다니는 해어진 블라우스를 더럽혔다.


학인은 무덤덤하게 두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다가 천천히 팔을 당겨 찰랑거리는 맥주를 들이켰다. 발효된 수제 맥주의 맛이 혀끝을 타고 느껴졌다. 예상보다도 훨씬 쓰고 독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쩐지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물꼬를 틀었다. 

사실 학인이 오늘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단순히 정윤을 위로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 회사에 대한 동기들의 솔직한 생각을 들으려는 목적이 더 컸다. 그는 다음 주부터 이직 준비를 위해 다시 취업스터디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속내는 모르나, 어쩌면 두 사람도 같은 계획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다. 요즘 세상에 이직은 흔했으니까. 평생직장이란 말은 시골집 뒷방에 케케묵은 요강단지처럼 오래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동기들이 자신이 지닌 패를 까기 전까지는 학인도 자신의 계획을 드러내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제 다들 말 편하게 해요. 우리 입사한 지 벌써 두 달이 다 돼가는데.”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든 학인이 두 명의 동기를 바라보며 제안했고 두 사람 역시 기다렸다는 듯 수긍했다.


“그럼 전 형이라 부를 게요.”


“저는 그럼 학인 오빠? 그리고 너는 동갑이니까 박재혁!”


“그래, 이정윤. 이제 괜찮은 거 맞으면 그만 울고 좀 먹자. 다 식었다.”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버터를 발라 고소하게 구운 번의 풍미와 달큰시큰한 소스 향이 어우러져 후각을 자극했다. 중간에 바삭거리는 베이컨도 감칠맛과 식감을 한껏 끌어올렸다.


“다들... 두 달간 어땠어? 다닐 만 해?”


학인은 원하는 것을 캐내기 위해 은근슬쩍 운을 띄우기 시작했다. 순식에 음식의 반을 해치운 정윤이 약간의 생기를 되찾으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근데요. 진짜… 회사는 외부에서 바라본 겉 껍데기하고 내부 속살이 완벽하게 다른 거 같아요. 이런 평가가 오만할 수도 있지만, 어쩐지 제가 생각했던 거보다 무능력한 사람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도대체 어떻게 이 조직에 들어왔을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예요. 옛날에는 아는 사람이나 백이 있으면 쉽게 들어왔다고 들었는데, 진짜 그런 건가요? 아니면 계약직으로 들어왔다가 운 좋게 시기가 잘 맞아떨어져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건가 싶기도 하네요. 우리는 서류 전형부터 학점에 영어점수는 기본이고, 별 볼일 없는 경험을 갈아서 소설로 만든 자소서에, 한국사나 컴활자격증은 거의 통행증처럼 내야 하고...... 그거 통과하면 필기시험에, 그다음은 또 면접도 봐야 해.... 어휴! 진짜 미친 거 아닌가요?”


얘기를 들은 학인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정윤이 자신 역시 여태 겪었던 채용 과정을 반추한 것이 의도치 않게 이직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과장급 이상 중에 절반은 그 흔하고 발에 치인다는 토익도 한 번 본 적 없을걸? 그래 놓고 자기네들은 한 최소 15년 동안 익숙해진 업무 가지고 대단한 거처럼 우쭐거리는데 솔직히 꼴불견이야. 엊그제 우리 팀장은 엑셀 합산 함수 쓰는 법도 몰라서 180개 열에 있는 숫자들을 일일이 계산기로 두드리고 있었다니까?”


재혁이 포크로 접시를 긁으며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에이, 설마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직장인인데 그걸 모른다고?”


“그렇지? 듣고도 안 믿기지? 그럼 넌 정상인 거야. 아, 형!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엊그제 형네 팀장은 나한테 와서 뭐 부탁했는지 알아요?”


어서 비밀을 폭로하고 싶어 흥분한 재혁의 큰 코가 씰룩거렸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하는 재혁의 모습이 낯설어 남은 두 사람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동시에 반가웠다.


“아니? 반 팀장님이 뭘 어쨌는데?”


“진짜 가관이라니까요! 대충 들어보니까 어디 이름도 모르고 학생도 별로 없는 학교에서 회계학 석사하는 거 같은데, 거기서 무슨 전공책 중에 챕터 몇 개 읽고 요약하라는 과제를 냈나 봐요. 원서니까 당연히 다 영어로 쓰여있었고 분량이 한 160페이지 정도 됐었는데, 자기도 할 수 있는데 제가 하면 더 빠르니까 저보고 그걸 전부 해달라고 부탁… 아니, 시키더라고요?”


재혁은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헐 그래서?”


“당연히 싫다 했죠. 그렇게 귀찮으시면 전문 번역 업체 쓰시라고. 제가 미쳤어요? 무료 봉사를 하게. 따지면 그게 얼만데요. 아, 그 순간에 그 사람 표정 구겨지는 거 진짜 장관이었는데.”


재혁은 잠시 과거에 몰입한 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눈매가 너무나 예리해서 혹시라도 심성이 꼬인 사람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불필요하게 시비가 붙을만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재혁의 인생에서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풋볼 팀이었던 그의 덩치가 워낙 컸고 맹수의 울음소리 같이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살벌해서 쉽게 욱하는 남성들조차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 그들이 자존심이 없다기보다는 어떤 생존을 위한 본능이었다.


반대로 빼빼 마른 학인은 어디서든 만만해 보였다. 우유부단하진 않았지만 사람의 부탁을 쉽사리 거절하지 못했다. 보통 거절은 남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그러면 결국 자신도 불편해졌다. 만약 반 팀장이 자신에게 먼저 왔다면 싫었다고 한들 수락했을게 불 보듯 뻔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학인은 자신이 못하는 동기의 행동을 진심 어린 칭찬으로 추켜올렸다.


“와, 아무리 그래도 팀장 부탁을 단박에 거절을 했어? 대단하다 재혁아. 다른 팀 팀장이라지만...”


“그래서? 그랬더니 뭐래?”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한 정윤이 대화에 끼어들며 재혁을 재촉했다.


“자기도 이미 알아봤대. 번역할 내용이 전공 서적처럼 전문적인 거면 한 페이지에 만 오천 원씩 달라는 걸 몇 백만 원 넘게 주고 어떻게 하냐고 구시렁거리길래, 나도 프리랜서로 할 때는 만 원까지 받았다고 받아쳤지. 그랬더니 갑자기 얼굴 빨개지면서 폭발하더니 '상사가 간곡히 부탁하는데 그깟 돈 얘기로 면전에서 무안을 줘?'라고 혼자 침 튀기면서 지랄 지랄하고 있는 거를 박대근 과장이 어디선가 나타나서 담배 피우러 끌고 가더라. 아! 나도 담배 끊었는데 요즘 피고 싶어서 미치겠다. Jesus.”


“자기 사적인 부탁을 도대체 왜 하는 거야? 자기들이 무슨 태어날 때부터 성골(聖骨)인 줄 알아! 우리는 뭐 노예로 태어났나? 결국 시간하고 돈 아끼고 싶어서 노동력 착취하려고 한 거잖아? 따지고 보면 이런 것도 업무상 위력이라고. 아랫사람이 거절 못할 거 뻔히 알고 부탁 아닌 부탁하는 거니까. 제발 나한테 이런 일은 애초에 없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되면 진짜 못 견딜 거 같아. 난 이 회사 못 그만둔단 말이야.”


정윤은 받은 스트레스 음식으로 푸는 습관이 있었다. 곧 감자튀김 한 움큼을 입안에 잔뜩 쑤셔 넣었다. 잠깐이지만 그녀는 이제 원래 자신의 모습을 되찾은 듯 보였다.


“부당하면 그냥 부당하다고 말하면 되지. 왜 호구처럼 가만히 당하고 있어?”


재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회사에서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잖아. 넌 가만 보면 한국사람 안 같다? 뭔가 이국적인 외모도 그렇고...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가?”


"그놈의 한국 문화 핑계는. 정말 쉬워. Just say No. That’s all.(그냥 싫다고 해. 그게 다야.)”


“으, 너도 그 부류였구나? 외국물 먹고 잘난척하는. 박재혁 너 그럼 토익 몇 점인데? 만점이야?”


“나? 960?”


재혁은 숫자를 영어로 발음했다.


“야! 나 970이야, 까불지 마. 한국의 주입식 교육과 학원 스킬을 무시하지 말라고.”


“Whatever. I don’t care.(뭐래. 상관 안 해.)”


한동안 그들의 투닥거림은 계속됐다. 어색한 기류 따윈 없었다. 설사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하더라도 몇 개의 교집합으로 쉽게 허물어졌다. 두 사람의 옥신각신을 지켜보던 학인은 자신보다 어린데도 어쩐지 당당한 재혁의 성격이 부러웠다. 과연 나도 그럴 수 있을까.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정윤, 그럼 넌 이직 준비 안 해? 여기보다 더 좋은 곳 많잖아? 형도 그렇고요.”


재혁이 다시 말을 걸었다. 맥주잔은 어느새 완전히 비어 있었다.


“이직... 솔직히 여유가 없어. 더 큰 공기업 가려면 당연 NCS도 준비해야 되고, 사실 토익도 두 달 뒤면 만료돼서 다시 봐야 하는데 엄마가 병원 왔다 갔다 하면서 공부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오빠는요?”


순간 학인은 이미 이직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했다.


“나도.. 뭐 하고는 싶은데, 어쩔 수 없이 여기 그냥 다녀야 하는 입장이야. 더 괜찮은데 취직하는 게 쉬운 것도 아니고. 슬슬 나이도 차는데 돈 모아서 결혼도 해야 하고. 그나마 여긴 안정적이잖아? 더 지내다 보면 혹시라도 신 대리님처럼 좋은 분도 있지 않을까?”


틀린 말은 아니었고 두 사람은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학인은 재혁과 같은 층을 쓰는 박대근 과장에 대해 궁금해졌다. 학인은 OJT 이후로 한 번도 대근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아, 재혁아 아까 박대근 과장님 얘기 잠깐 꺼내서 말인데... 박대근 과장님은 어때? 같은 층이잖아?"


“글쎄요. 그 사람은, 딱히 말할 게 없어요. 그냥 호탕하면서 말 많고 붙임성 좋고... 뭔가 주변에 적을 안 만든다랄까요? 왜요? 그러고 보니까 형, 그때 OJT 끝나고 둘이 어깨동무하고 어디 갔었잖아요? 원래 아는 사람 아니에요?”


“아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냥 부모님이랑 같은 아파트 살아. 심지어 같은 라인. 나 취직하고 자취방 빼서 다시 들어갔거든. 처음엔 꼰대 안 같고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저번에 신 대리님한테 평소에 자기가 마음에 안 드는 점 쌓아뒀다가 엄청 쏘아붙이고 다그치는 거 보니까 결국 이 사람도 어쩔 수 없는 꼰대다 싶더라고. 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 평소에는 자기가 꼰대 아닌 줄 안다? 맨날 '아! 진짜 꼰대 될 뻔했다' 이러면서...."


학인이 대근을 성대모사했고 정윤은 정말 똑같다며 물개 박수를 쳤다.


 “원래 진작 신명호 대리님하고 우리 삼동기랑 같이 모이려고 했는데, 말씀드릴 때마다 계속 안된다고 하시더라고? 퇴근하고도 자기 계발로 바쁘신 건 알았는데 약간 피하시는 거 같기도 하고.”


“에이, 아니겠죠. 우릴 왜 피해요?”


정윤의 눈이 빠질 듯이 커지며 부정했다.


"그냥 이미지 관리하면서 착한 선배 코스프레하는 거 같던데. 가만 보면 의외로 선도 확실하게 긋고."


재혁의 비아냥 거림에 학인은 살짝 기분이 상했다. 학인은 신명호 대리를 회사에서 가장 인격이 좋은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솔직히 이 회사에 그만한 사람이 어딨어. 젠틀하고 후배들 챙기고 회사 발전 위해서 노력하고?”


"물론 겉으론 그래 보이긴 하죠. 전혀 나무랄 데 없는 모범생 이미지!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태껏 한 게 다 원래 그 사람 본 업무잖아요? 제가 사람 좀 잘 파악하는데 무튼 그런 게 있어요. 느낌, 촉."


학인이 다시 한번 반박하려고 하는 그때, 갑자기 테이블에 진동이 울렸다. 학인의 전화였고 모르는 번호였다. 잠시 고민하던 학인은 노랫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한쪽 귀를 막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21층 청년!>


익숙한 호탕한 남자의 목소리다.


“네? 누구세요?”


학인은 전화기 너머의 인물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납니다. 박대근 과장.>


발신자의 신원을 확인하자마자 학인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동기들을 번갈아 본 후에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아! 네! 과장님!”


<무슨 또 정 없게 과장님이야. 밖에서는 그냥 이웃이지, 동네 형! 저기... 뭐야, 지금 회사 앞에서 동기들이랑 햄버거 먹고 있죠?>


“아, 예. 그걸 어떻게..?”


학인의 표정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그거 지금 먹은 거까지는 내가 계산했으니까 맛있게 먹어요. 나 바로 뒤 테이블이 있었거든... 이런 우연이 또! 다들 몰랐죠? 허허>


순간, 학인은 본능적으로 가게에 도착했을 때부터 등을 지고 있던 낯선 남성을 떠올렸다. 왜 같은 직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했을까! 흔하고 평범한 아저씨의 뒷모습이 바로 박대근 과장이라니. 계속 뒤에 앉아 세 사람이 나눈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라 생각하자 속이 뒤틀리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아직은 몰랐다. 워낙 노랫소리도 컸고 정말 우연히 같은 식당만 이용했을 수도 있었다.


<말 걸면 또 꼰대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고 할까 봐 그냥 조용히 있다가 계산만 하고 나왔어요. 근데, 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만 물을게요…….>


갑자기 둥둥 웅장한 북소리가 매장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막 바뀐 배경음악의 분위기가 유난히 긴장감을 고조했다. 점점 소리가 커지는 바람에 전화가 잘 들리지 않았다. 학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비틀거리듯이 가게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사방을 훑었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상가 건물 사이를 많은 사람들이 거닐었다. 하지만 그중 대근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요즘 회사 생활 힘들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 잠깐. 질문을 좀 더 뾰족하게 해야겠구먼. 솔직히 지금 회사 다니기 싫죠?>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은 그의 정곡을 찔렀다. 학인이 대답하기를 머뭇거리자 곧바로 대근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솔직하구먼! 동태 같은 눈빛만 봐도 딱 알죠. 특히 신입은. 아, 얘가 무슨 생각을 하는구나! 어떤 마음가짐으로 아침에 사무실을 들어서는구나! 그만두고 싶어 하는구나! 허허, 다들 별 관심 없어 보여도 아마 유심히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근데 회사에서 채용이란 말입니다 일단 종자를 심은 거니까. 그러다 싹이 보이면 서서히 물도 주고 거름도 줘서 키우려 할 테고, 딱 봐도 마음이 떠난 사람 같으면… 그냥 말라죽게 내버려 두겠죠. 애초부터 멀리하는 겁니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 하죠? 나는 들어올 때부터 활짝 핀 꽃인데 왜 예쁘게 안 돌봐줄까! 이렇게 생각하죠? 아, 근데 한 번 생각해봐요, 어차피 못 버티고 나갈 사람한테 굳이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다? 당신 같으면 그러겠어요? 돈을 처발라도 어차피 시들 꽃이라면 공들여 키우겠냐고. 꺽!>


장황하게 말하던 대근이 갑자기 트림을 했다.


<아이고 젠장! 마지막에 콜라랑 감자튀김을 너무 많이 처먹었더니 갑자기 가스가 나오네. 아무튼, 지금 내가 뭐 먼저 직원들한테 다가가고 친한척하라고 그러라는 게 아니야! 그냥 이거 하나만 명심해요. 여기, 이 조직의 사람이 될지 말지는, 우리가 받아들일 문제가 아니라 당신 마음가짐에! 당신이 사무실에서 뿜는 그 안광에 달려 있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허허, 좀만 버텨 봐요. 생각보다 그렇게 나쁜 곳이 아닐 수도 있는데? 취준생 때 했던 생각들 있을 거 아닙니까? 벌써 다 잊었어요? 다른 회사 가면 뭐 더 사람이 좋고 막 신입 들어왔으니까 칭찬해주고, 우쭈쭈 해주고 그럴 거 같아요? 천만의 말씀이라 이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조언도 구하고. 예?>


"네, 감사합니다. 과장님."


학인은 여전히 그가 어떤 내용을 들었을지 아리송했다. 그래도 다행히 많은 걸 엿들은 것 같진 않다고 판단했다. 쪼그라들었던 그의 허파가 이완하며 머금은 공기를 내보냈다. 그러는 사이 대근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다시 한번 이어졌다.


<아 참, 참. 그리고 말이야. 옛말에......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잖아요? 거, 선조들 지혜가 괜히 전해지는 게 아니야! 회사 근처에서는 항상 말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뒷골이 서늘해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들었다. 다 들은 것이다! 눈앞이 노래지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오직 머릿속에 남은 건 자신의 간사한 혀가 내뱉은 대근의 험담 내용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아 거 참! 입술에 꿀 발랐어요? 왜 말이 없어! 설마 내 욕했는데 내가 들었을까 봐 무안해서 안절부절못하는 거 아니죠? 허허. 뭔 놈의 음식점이 노랫소리를 나이트클럽만치 틀어놔서 하나도 못 들었다, 진짜! 아무튼 추운데 어서 들어가요. 들어가서 동기들이랑 마저 하던 모의 해야지. 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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