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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선 Oct 04. 2021

#10.  등가 교환 방식



점심시간이 막 끝난 오후의 사무실 풍경은 어딘가 어수선했다. 팔걸이가 부서진 의자를 뒤로 젖히고 나직하게 코를 골며 낮잠을 자는 사람부터 소리가 울리는 복도에 나가 깔깔거리며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 보험판매원이 사은품으로 나눠준 칫솔을 물고 부산하게 돌아다니는 사람 등등. 대부분 달콤한 휴식 시간으로부터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보였다. 

어김없이 반 팀장과 지긋지긋한 시래깃국을 먹고 자리에 앉은 학인은 저번 주에 신청한 휴가가 아직도 결재되지 않은 것을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그는 은밀하게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건너편 자리는 텅 비어있었고 마땅히 물어볼 대상이 없었다. 하필 팀원들이 출장 중이었던 것이다. 바로 좌측에 남은 김창희 주임은 엉성하게 수첩으로 휴대폰을 가린 채 게임에 열중이었는데 그와는 굳이 '이런 주제'로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 '미승인'이란 문구를 띄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는 현란한 펜 돌리기를 그만두고 메신저를 켰다. 그리고 얼마 전에 휴가를 다녀온 재혁에게 쪽지를 보냈다. 그러자 메신저의 답장이 아닌 인터폰이 울렸다. 


"네, 글로벌통상팀 진학인 사원입니다."


<아, 진학인 씨? 갑자기 휴가는 뭐 때문에 그러십니까?>


재혁이 일부러 목소리를 굵게 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어... 그냥 좀 전에 물어본 그대로야. 넌 어떻게 했어? 별 문제없었어?”


학인은 주위에 누가 들을 것을 염려해 최대한 질문의 내용을 걸러내면서 자신의 의도를 전달했다.


<나? 문제 있을게 뭐가 있어? 한, 두 시간 걸렸나? 그냥 팀장님이 보시자마자 승인해주신 거 같던데? 형, 심지어 난 전 날 올렸어. 왜? 승인을 안 해줘?>


갑자기 재혁 또한 목소리를 낮춰서 이야기했다.


“그래? 일단 알겠어. 내가 나중에 자세히 말해줄게.”


'같은 회사인데 이렇게 다르다니!' 


수화기를 내려놓은 학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필시 결재권자의 문제였던 것이다. 원인을 알아낸 학인은 더 이상 홀로 고민할 것 없이 자신의 팀장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팀장님.”


창가 쪽 자리인 반일식 팀장은 늘 자신의 습관대로 책상 옆 수납함에 두 다리를 올려놓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미세하게 열린 그의 입 모서리에서 투명한 침이 흘렀고 코 고는 소리가 미세하게 새어 나왔다. 그 모습이 꼭 거품을 뱉어내는 독두꺼비 같아서 학인은 사진을 찍어두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만 했다.


“크흠! 팀장님?”


기척에 김창희 주임이 관심을 갖고 쳐다보는 걸 알았지만 학인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눈꺼풀은 미동조차 없었다. 학인은 하는 수 없이 발등으로 다리를 올린 가구를 한 번 쳐서 쿵! 소리를 내었다.


“예! 어? 왜? 뭐냐? 너 왜 여기 있어?”


화들짝 놀라며 깬 반 팀장이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했다.


“아, 팀장님. 다름이 아니라 저 뭐 좀 여쭤보려고 합니다.”


“뭔데?”


반 팀장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스럽게 물었다.


“제가 저번 주에 휴가를 올렸는데 결재 처리가 아직이라서, 혹시 잊으셨나 하고요...”


“아아, 그거? 잊긴 뭘 잊어 다 보고 기다리고 있었지. 야 인마! 네가 그냥 컴퓨터로 틱 하고 휴가 올리면 나는 클릭! 해줘야 하는 사람이냐? 휴가를 써야 할 일이 있으면 직접 와서 언제, 어디로, 무엇을 할 건지! 육하원칙에 따라서 휴가를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서 상상한테 설명을 해야 납득을 하고 승인을 해줄 거 아니야?”


“육하원칙이요?”


학인이 황당한 주장에 되물었다.


“뭘 그렇게 놀라? 당연한 거 아니야? 부하직원이 어디서 뭘 하는지 상시 파악하고 있는 건 부서장의 필수 덕목 중에 하나야 인마! 사회생활 쥐뿔도 모르는 애송이가. 아무튼 휴가 언제더라 너?”


반일식 팀장은 어색하게 마우스를 잡고 느릿느릿 커서를 움직여 근태 관리 메뉴로 들어갔다. 결재 리스트를 확인하던 반 팀장은 기가 막히다는 듯 팔짱을 끼며 혀를 한 번 크게 찼다.


“이야, 삼일절 공휴일 붙어 있는 금요일에 쓰셨네? 금토일월! 4일 연속으로 쉬어야 할 만큼 얼마나 중요한 일이 있는지, 내 한 번 들어나 보자 크흠.”


"그게……."


휴가 갈 때마다 개인 사정을 일일이 보고해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추태였다.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학인의 검은 눈동자가 흰자 위를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학인은 계속 '어' 소리를 늘어지게 내서 시간을 끌며 친구들과 여행을 간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했다.


‘분명 노발대발하겠지.’


"뭐야 왜 말을 못 해?"


반 팀장의 미간 주름이 점점 깊어짐에 따라 학인은 조급해졌다. 그러다 곧, 애초에 사생활을 구구절절 드러내야 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는 적당히 둘러서 말하는 쪽을 택했다.


“아, 제가 사실 요즘 몸도 좀 안 좋고 해서 병원도 다니고 며칠 쉬려고...”


학인의 입술이 움직이자 길고 짙은 반 팀장의 눈썹이 사정권에 들어온 먹이를 포착한 구렁이처럼 꿈틀 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를 빽 질러 일방적으로 말을 가로챘다.


“야! 너만 쉬고 싶냐? 너만 쉬고 싶어? 아 새끼, 요즘 애들은 개념이 없네 이거. 너는 여기 네 선배들 다 사무실 나와서 늦게까지 일하는 거 몰라? 누구는 길게 휴가 안 쓰고 싶어? 너 만약에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다 네가 쓰는 금요일에 쉰다고 하면 어떡할 거야? 사무실에 아무도 안 나와있는데 그럼 회사가 돌아가겠어? 다들 쓰고 싶어도 참는 거 아니야!”


사실 둔감한 학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반 팀장은 이유를 듣기도 전부터 이미 소리를 지를 계획에 있었다. 그는 두 시선을 대각선 위쪽으로 고정한 채 거짓 변명을 생각해내려는 학인의 모습을 관찰하며 속으로 낄낄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애초에 학인이 어떤 사정이 있든 간에 곱게 보내줄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의 속내에는 개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 하나 들어 있었다. 희생양인 학인에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하나는 구슬려 회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탁을 가장한 강요였다. 그는 영리하게도 양자를 선택하고 덫을 놓았다. 학인이 덫에 걸려 직접 찾아오기까지는 예상보다 1주일이 더 걸렸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반 팀장은 목을 쭉 빼서 유일하게 김창희 주임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늘에 걸린 낚시 감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이젠 회를 뜰 차례였다.


“크흠, 진학인. 너 잠깐 회의실로 가 있어봐.”


학인이 등을 돌리자 그는 서둘러 책상 아래에 둔 쇼핑백을 열어 물건이 잘 있는지 확인했다. 몇 주전에 재혁에게 은근슬쩍 시키려다 거절당했던 바로 그 책이었다. 솔직히 아랫사람이 자신의 청을 거절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의 관점에서는 세상이 너무나 많이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쯧쯧 혀를 차면서 무려 20년 전, 자신이 신입사원이던 시절을 떠올렸다. 


'이런 과제 대신하는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지.' 


선배 앞에서 괜히 혀를 잘못 놀렸다간 조인트를 까이기 일수였다. 해외에서 오래 산 녀석이라 그런가? 남 눈치 안 보고 자기 주관을 저렇게 대놓고 표출하는 놈은 사춘기를 맞은 딸들 이후로 난생처음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민망한 순간을 반추하던 그는 회의실로 들어가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해보니 개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었다.


'나 땐 명절에 선배들 세차까지 했다고!' 


전의가 가득 찬 상태로 회의실에 들어온 반 팀장은 아무 말없이 블라인드를 쳤다. 그러고는 바깥으로 소리가 새지 않도록 신경 써서 문을 닫았다. 엉거주춤 서 있는 학인은 화가 난 건지 아까부터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귀는 혈액이 몰려 벌에 쏘인 듯 새빨갰다. 


'그래! 이런 거 하나 능수능란하게 지휘하지 못하면 그동안의 짬을 다 똥꼬로 먹은 거지."

반 팀장은 일이 쉽게 풀릴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원래 흥분할수록 다루기 쉬운 법이었다. 그에게 아랫사람을 길들이는 것이란 누워서 떡을 먹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 기술은 오랜 시간 선배들을 관찰한 끝에 습득한 장인의 비법 같은 것이었다. 두 번의 채찍과 한 번의 당근. 이 법칙은 인간을 조련하는 데 있어 이미 입증된 공식이었다. 하지만 재혁은 예외였다.


“진학인. 나 봐봐.”


그는 차분하게 얼굴이 울긋불긋한 학인을 불렀다. 이미 수도 없이 겪은 얼굴이었기에 어떠한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 타이밍은 후배를 향해 약간의 당근을 풀 단계라는 것을 의미했다.


“네가 혼난 게 진짜 억울한 일인지 한 번 잘 생각해봐. 상식적으로 인마 누가 신입사원이 연휴에 휴가를 붙여서 쓰냐? 개념 없이. 다른 선배들한테 먼저 한 번 물어보지도 않고? 안 그래?”


학인이 못 이기는 척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반 팀장은 그의 반응을 살피며 재차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하는 날 쉬는 거 허락해줄게. 원래 우리 팀은 이런 거 안 되는 거 너만 특별히 허락해주는 거다? 신입사원이니까.”


뜻밖의 태세 전환에 학인은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 굳었던 얼굴 근육이 풀어지고 붉은 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얼었던 마음이 아주 조금 녹아내린 듯했다. 반 팀장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두꺼비 같이 넙데데한 얼굴을 더 늘리고 최대한 사람 좋은 척하며 마침내 본심을 드러냈다.


“아, 학인아 미안한데, 내가 부탁 하나만 하자.”


“부탁이요?”


학인이 되물었다.


반 팀장은 뒷짐을 풀어 가져온 쇼핑백을 건넸다.


“너 토익 900점이라면서? 내가 볼 때 그럼 이거 별 거 아니야. 생각보다 진짜 쉬워. 이거 그 원서인데 내가 접어놓은 페이지 좀 요약 좀 해서 주라. 또 공교롭게 우리 전공이 같은 경영이잖아? 어차피 너도 나중에 석사하고 해야 하는데 미리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무튼 휴가는 승인해 줄 테니까 4일 잘 쉬고. 급한 거 아니니까 천천히 해. 모르는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고. 부탁 좀 할게.”


학인은 아무 말 없이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반 팀장은 마침내 무거운 짐을 털어냈다는 듯 편안하게 뒷짐을 지고 회의실을 나섰다. 닫히는 회의실 문 사이로 콧노래가 들려왔다.  


자리로 돌아온 학인은 강단 없는 자신을 탓하며 쇼핑백을 바닥에 내팽개치듯 놓았다. 그리고 부표처럼 떠오르는 생각 하나를 곱씹었다. 재혁인 거절 했고 나는 거절하지 못했다.


‘이 머저리 같은 새끼. 알고도 당하다니!’


그는 책상 서랍에서 예전에 유정이 건넨 거절의 주사위를 꺼내 들었다. 만약에 던져서 X가 나온다면 책을 다시 돌려줄 작정이었다. 그는 키보드를 한쪽으로 치우고 푹신한 패드 위로 주사위를 던졌다. 반발력이 없는 스펀지 위에서 몇 번 구르던 주사위는 야속하게도 O가 나오고 말았다. 학인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사위를 받을 때 유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는 체념하듯 반 팀장의 책을 가방 안에 옮겨 넣었지만 그의 귀는 다시 빨갛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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