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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선 Oct 06. 2021

#11. 굳게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오는 배신감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3월 중순의 저녁 하늘은 어둠을 드리우는 밤의 세력이 약해진 탓에 퍼런 영역을 붉게 이염시켰을 뿐 쉽게 저물지 않았다. 넓게 펼쳐진 호수 주변으로 산개한 나뭇가지 끝에 파릇파릇 점을 찍은 새싹들이 거리에 생동감을 더 했다. 따스함과 서늘함이 일렁이는 초봄의 유려함을 만끽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날씨였다.


캠퍼스 안의 많은 학생들이 호수의 가장자리에 조성된 가로수길을 따라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오직 인파에 섞인 학인만이 주변 분위기와는 다소 동떨어진, 늦겨울에 담긴 쌀쌀한 아우라를 머금고 있었다. 갑자기 길거리에 우두커니 선 학인은 주변을 둘러보며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남들은 뭐가 그렇게 행복할까? 어떤 삶이기에 저렇게 행복 가득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걸까? 언제부턴가 일면식 없는 타인과 비교 선상에 둔 채 인생을 비관하는 버릇이 생겼다. 사실 그리 놀랄 것도 없었다. 원인은 명확했다. 습관이 생긴 시점이 바로 일을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난 2월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안에서 회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날이 갈수록 견고해졌다. 누가 그 이유를 열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최소한 열 가지는 쉬지 않고 말할 수 있었을 터였다. 그중 하나가 고작 한 권의 책 때문이라니. 다크서클이 옅게 드리운 학인의 입에서 클클 실성한 사람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웃음에는 약간의 수치스러움이 섞여있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도서관 책상에 앉아 반 팀장의 때가 탄 물건을 노려보며 노트북을 꺼냈다. 책의 표지엔  「Global Production: Firms, Contracts, and Trade Structure」라고 쓰여 있었다. 딱딱한 나무 의자에 꼼짝없이 앉아 약 한 시간 넘는 키보드 작업 끝에 그토록 지겹던 임무가 끝을 맺었다. 곧 메일 첨부파일 란에는 '전공책 요약 파일(최종)' 이란 한글 파일이 담겼다. 학인은 아래 칸에 '팀장님, 부탁하신 파일 보내드립….' 이란 내용을 적다가 갑자기 백스페이스를 연타해 모두 지워버렸다. 그리고 공란으로 남겨둔 채 전송 버튼을 클릭했다. 소심한 반항의 의미였다.


‘최소 60분씩 거의 2주.... 이 시간이면 이직 준비하는데 훨씬 더 많이 투자할 수 있었을 텐데.’


반 팀장의 부탁 아닌 부탁을 끝마친 학인은 어떠한 성취감도 후련함도 느끼지 못했다. 손목시계는 저녁 7시 1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끼니를 거른 탓에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었다. 하필 곧바로 도서관 건물 지하 1층 토론실에서 취업 스터디가 시작하기 때문에 여지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 막 자리를 옮기려던 찰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유정이었다.     


“어, 자기야.”  


학인이 다시 로비로 나서며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도서관? 저녁 먹었어?>     


“아니 못 먹었어. 이제 막 스터디 가려던 참이었어. 퇴근했어?”     


<아니, 난 오늘도 야근. 늦은 저녁 먹고 잠깐 쉬는 타이밍에 전화했어. 팀원들이랑 떡볶이 시켜 먹었다. 미안한데… 요번 주말에 잘하면 못 내려갈 거 같아. 우리 파트 스핀오프 관련해서 다시 논의 중이라 나름 비상이야.>


“그럼 내가 잠깐이라도 갈까?”


<아냐. 자기도 바쁜데 그냥 다음 주에 봐. 여기까지 버스 타고 언제 와. 아참, 그거 결과 발표 났어?>     


유정이 말하는 ‘그것’은 저번 달에 학인이 지원했던 공기업의 서류 전형을 의미했다. 안타깝게도 결과는 탈락이었다. 학인이 즉각 대답하지 못하고 뜸을 들이자 이를 눈치챈 유정이 먼저 치고 들어왔다.     


<생각해보니까 떨어졌겠구나? 발표가 오후 3시였는데 붙었으면 당연 먼저 연락했겠지. 괜찮아! 솔직히 자기가 지금 무슨 취준생 신분도 아닌데. 굳이 세상 무너진 것처럼 낙담할 필요는 없지.>     


“아니야. 하나도 안 괜찮아. 나 요번 상반기에 무조건 회사 옮겨야 해.”     


<자기는 왜 자꾸 부정적으로만 생각해? 어차피 평생 다닐 수 있는 직장이면 그래도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하려고 해야지. 같이 스터디하는 애들은 거기라도 들어가고 싶어서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 거잖아? 안 그래?>


유정의 솔직한 심정은 자신의 남자 친구가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고 원래 두 사람이 세웠던 계획에 전념하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최근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일부러 결혼 얘기만 꺼냈던 터였다

학인 역시 그 속내를 잘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저기 계속 얘기해도 내가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며칠 전부터 똑같은 얘기를 몇 번하는 거야? 뭘 자꾸 좋은 쪽으로 생각하래? 내 상황 직접 겪어본 것도 아니면서 그런 식으로 쉽게 충고하지 마. 내가 안 맞아서 도저히 못 다니겠어서 이직하겠다는 거잖아? 상식적으로 참아 줄 수준의 회사여야 좋게 생각하고 다닐 거 아니야? 저번에 나 믿고 기다려준다는 건 그냥 한 소리였어?”


<내가 기다리겠다고 말했던 건 분명 두 달이였잖아. 두 달 진짜 얼마 안 남았는데? 그날 내가 조건 달았던 거 그건 기억 안 나?>


학인은 만약 이직에 실패할 경우 지금 회사에 다니면서 결혼 준비를 하겠다던 약속을 기억해냈다. 그럼에도 화는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자기야. 이제... 슬슬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어? 2월부터 서류 전형만 벌써 네 군데나 떨어졌잖아. 그렇다고 기업문화 하나 때문에 아무 데나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현실을 좀 직시하자. 툭 까놓고 말해서 거기보다 더 안 좋은 곳도 엄청 많아. 외국계 다녔던 세희, 이직했다가 완전 거지 같은 외국인 상사 만나서 나중에 정신과 상담받고 약 먹은 거 몰라? 이직이 무조건 답은 아니라고. 그걸 왜 몰라?>


유정은 늘 맞는 말만 했다.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영양가 충만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너무 약효가 잘 들어서 그만큼 부작용이 따랐다. 너무 직설적이고 날이 선 그녀의 충고 한 마디 한 마디가 학인의 살점을 베어 나갈 때마다 안에 숨어있던 반발심이 드러났다.


<솔직히 서류 합격률도 낮은데 지금 굳이 2차 시험 준비하는 스터디 참석하는 것도 별로 의미 없는 거 같은데? 이제 단념하고… 원래 우리 계획대로 하자. 내 말대로 해!>     


숨을 빠르게 고른 유정은 반박할 틈을 주지 않고 자신보다 어린 남자 친구를 더 강하게 다그쳤다. 이에 학인은 말이 없었다. 채용 일정 상으론 아직 그가 낼 수 있을만한 공고가 두어 개 더 남아 있었다. 현재 학인에게 있어 회사란 일종의 고문 같은 것이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조각난 유리 파편을 맨발로 밟고 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버텨내는 날이 길어질수록 발바닥을 찌르는 유리조각의 개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몇 개쯤 더 참을 수 있을지언정, 언젠가 쓰러지고 말 터였다.


“그래. 응원해줄 거 아니면 이 얘기는 더 이상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다. 내 인생이니까 앞으로 내가 알아서 할 게. 그러니까 제발 좀 우리 엄마처럼 굴지 마! 스터디 가야 할 시간 됐으니까 끊어.>


학인의 쪽에서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무려 7년을 사귀는 동안 둘 사이에 처음 있던 일임에도 분노에 휩싸인 그는 이 작은 변화를 자각하지 못했다. 그는 무엇보다 이미 실패했다고 단정 짓고 자신을 무시하는 유정의 태도에 크게 실망했다. 그리고 실망한 건 유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연애관에 있어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 여리다거나 기댈 만큼 듬직하지 못한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유정은 자립심이 강했고 어디서든 사람들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 다만 자신과의 약속을 소홀하게 여긴 것만큼은 큰 문제였다. 어떤 관계든 신뢰를 최우선 순위로 두는 유정에겐 학인의 말바꿈을 오히려 큰 문제로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13층 건물 밖으로는 아름다운 일몰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한동안 능선 너머로 황홀한 주황빛 어스름이 일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차츰 보랏빛이 되었고 순식간에 깜깜한 어둠에 흡수되어버렸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 것처럼. 유일한 희망처럼 빛나던 노을의 흔적은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회사 복도에서 이 현상을 지켜보던 유정은 마음이 복잡했다.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쥔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지끈거리는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었다. 지금 그녀의 머리는 평생을 함께할지도 모르는 사람을 다시금 평가하는 중이었다. 알고리즘이 데이터를 검사하듯 결과값이 나오기까지의 작업은 의외로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하려던 일이었다. 유정이 모른 척했을 뿐이다.


***


토론실에 모인 스터디 인원은 총 네 명이었다. 원래 시작할 때만 해도 여섯 명이었는데 두 명이 중간에 공기업을 포기하고 학교 취업지원센터가 연계하는 중소기업에 취업하면서 인원이 줄었다. 다들 아직 이십 대의 대학생들이었고 이직 준비로는 학인이 유일했다. 처음 학인이 참여했을 때까지만 해도 다들 공공기관에 다니는 그를 우러러보았다. 쏟아지는 질문 중에 공통된 질문은 당연 일을 하면서 병행하는 방법과 이직의 이유였다. 학인은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경외심을 갖는 그들의 시선이 달콤해서 적은 월급이라는 선의의 거짓말로 장편소설이 될 수많은 이유들을 넘겼다.     


“아,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취업해서 나가신 분들 결원 채우려고 한 명 더 받았거든요? 오늘 참석하신다고 했어요. 나이는 안 물어봤는데 학인 님처럼 이미 취업하셨는데 이직 준비하시는 분 이래요.”     


스터디를 운영하는 조장이 충원되는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학인은 일단 그 사람은 어떤 회사에서, 어떤 이유로 이직을 결심하게 됐는지 물어볼 작정이었다. 그의 뇌리에 혹시라도 동기 중 한 명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스쳐 지나갔다. 애초에 회사생활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 재혁은 가능성이 희박했지만, 자신보다 더 심한 고충을 겪고 있는 정윤이라면 가능성이 높았다.     


“혹시 남자예요? 여자예요?”     


궁금증을 참지 못한 학인이 성별을 물었다.     


“그건 모르겠네요? 전화로 얘기한 게 아니라서. 일단 메시지 말투는 남자 같았어요.”     


“아, 저는 들어가면 진짜 노예가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왜 이렇게 다들 이직을 하시는지... 합격하신 것만으로도 대단하신데.”


조원 중에 나이가 제일 어린 여자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게요. 이따 오면 물어보면 되겠죠.”


더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이윽고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방 안의 모든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모두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당사자가 마침내 문을 열고 등장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학인은 정장을 입고 다급하게 토론실로 들어서는 남자를 주목했다. 훤칠한 키에 하얀 피부, 짧은 머리를 올려 세운 도회적인 이미지에 뚜렷한 남성의 이목구비가 어딘가 익숙했다. 머지않아 놀란 그의 눈꺼풀이 토끼눈처럼 점점 크게 열리기 시작했다.


“신 대리님?”


새로 들어온 스터디 원은 재혁도 정윤도 아닌 바로 신명호 대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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