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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선 Oct 12. 2021

#12. 뜻밖의 사람이 전하는 뜻밖의 이야기



“다들 조심히 들어가세요.”     


스터디가 끝나자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학인과 신명호 대리 두 사람은 자리를 지켰다. 학인은 도무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좀처럼 잠긴 목소리를 끄집어낼 수가 없었다. 그토록 열정적이던 신명호 대리는 왜 이직을 하려는 것일까? 극진히 챙겨줬음에도 불구하고 이직을 선택한 자신을 보고 실망하거나 배신감이 들진 않았을까? 그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의구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의 걱정과는 달리 신명호 대리가 딱히 그럴 이유는 없었다. 도서관에서 의도치 않게 마주한 두 사람은 공범이나 마찬가지였다. 학인은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의 선배를 살폈다. 체크무늬가 수 놓인 모직 정장을 입은 신명호 대리는 말이 없었다. 얼굴이 항시 창백한 그는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오묘한 미소를 띤 채 계속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지금 상황 따윈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심각한 자신과 달리 무관심한 그의 태도가 학인의 약을 올렸지만 그렇다고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결국 다음 행동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그는 동그랗게 모은 입술을 좌우로 움직이며 어딘가 뒤숭숭한 표정을 유지하다가 자신의 선배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고요한 캠퍼스를 통과하던 서늘한 밤바람이 우뚝 선 도서관과 부딪히면서 넓게 트인 건물 앞에서 

꿀렁거렸다. 그 돌풍이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헝크는 바람에 두 사람은 피난을 가듯 건물 우측에 몰려 있는 벤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자판기 옆으로 파란 페인트 칠이 된 플라스틱 휴지통 근처에는 흡연자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있었다. 그리고 마치 달을 사칭이라도 하듯 어둠을 거스르며 존재감을 과시하던 할로겐 가로등 불빛 주위로 담배연기가 부옇게 떠있었다.


“놀랐어요?”


신명호 대리는 아랑곳 않고 담배연기가 자욱한 보도블록까지 깊숙이 가서야 당당한 걸음을 멈춰 세우더니 허무맹랑한 질문으로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깨트렸다.


“아, 그냥... 조금요.”


“그게 나 때문인가요? 아니면 본인 이직 준비하는 거 걸려서 놀란 거예요?”     


“아마도 둘 다… 인 것 같은데요? 일단 대리님이 이직 준비하실 거라고는 제 입장에서는 정말 상상도 못 했거든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학인이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그는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 후련해짐을 느꼈다.


“그런가? 학인 씨도 하는데 내가 이직 준비하는 게 그렇게 이상할 건 없지 않아요?”     


신명호 대리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아, 그런 의미는 아니었고… 대리님은 다른 직원 분들보다 열정도 넘치셨고 회사에 애정도 많아 보였거든요. 원장님하고 같이 조직의 유일한 희망 같은 분이셨다고 해야 할까요?”  


학인은 자신이 내뱉은 말이 너무 입에 발린 소리처럼 들릴까 봐 걱정됐지만 분명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학인은 힐끔 눈을 돌려 신 대리의 표정 변화를 살폈다. 다행히도 말끔한 그의 얼굴엔 평소처럼 미소가 번져 있었다.


“내가요? 하하, 그냥 그렇게 보인 것에 불과하죠. 이런 게 바로 진정한 사회생활 아니겠어요? 회사는 가면을 쓰고 다닌다고들 하잖아요. 내 이미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였다면 나는 충분히 성공한 직장생활을 한 셈인 거죠.”


비록 신명호 대리가 자신에 대한 후한 평가를 부인했더라도 학인은 여전히 그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했다. 차마 그럴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신명호 대리는 학인이 이 지옥이라 생각하는 사무실에서 버틸 수 있게 해주는 버팀목 같은 존재였다. 곁에서 함께 일을 하거나 직접 도움을 주어서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아도 더 나은 미래를 그릴 수 있게 해주는 어떤 정신적 지주였다. 비유하자면, 신명호 대리는 모세였고 학인은 이스라엘의 시민 같은 의존적 관계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학인 혼자만의 망상에 불과했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신명호 대리가 혜성처럼 나타나 홍해를 가르고 딱한 처지의 신민들, 그러니까 자신과 동기들을 구원해줄 것이란 맹목적인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주 우연한 장소에서 일어난 우연한 조우로 홀로 빚어낸 맹목적인 믿음에 거대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학인은 드넓은 바다를 통과할 수 있게 하늘 높이 솟아 오른 해수의 장벽이 언제든 자신을 덮칠 수도 있다는 위기를 비로소 느낀 것이다.


“그렇죠. 원래 회사생활이 그런 거죠. 그건 그렇지만......”


고개를 떨군 학인은 신 대리의 본심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가 말을 잇지 못했음에도 신명호 대리는 크게 개의치 않았고 수수께끼 같은 아리송한 말을 계속했다.


“학인 씨, 혹시 6개월의 법칙 알아요? 사람이 아무리 어떠한 환경에서든 힘들어도 일단 6개월 정도만 버티다 보면 얼추 적응을 한다더라고요? 나도 생각해보니 해외에 워홀 나갔을 때도 그렇고 군대에 있을 때도 그랬던 거 같고. 물론 힘듦의 강도에 따라 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이놈의 회사도 그렇게 버티고, 또 버티다 보니까… 어느 순간 5년이 지나버렸네요. 하 참나. 벌써 5년이라니! 그땐 그렇게 때려치우겠다고 되뇌었는데.”     


“네? 대리님이요?”  


학인의 물음에 신 대리가 턱을 당기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자 수직으로 내리쬐던 가로등 빛이 그의 안면 윤곽에 깊숙이 닿지 못하면서 그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뭐부터 꺼내야 하나? 최근에 정윤 씨 봤죠? 두 사람 같은 층이니까. 내가 처음 근무 시작하고 얼마 안 됐을 때, 지금 정윤 씨 표정이 딱 나였어요.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거 같이 참담한 표정... 지나가던 다른 팀원들이 나한테 괜찮냐고 물어볼 정도였으니 말 다 했죠. 그때 내 팀장이 지금 강 실장이었거든. 그래서 상종 못할 거지 같은 상사 밑에 있다는 게 힘들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죠. 회사는 일이 힘든 게 아니라 사람 때문에 힘든 거라고요.”


“대리님도 알고 계셨어요? 한숙자 과장님이 계속 정윤이 괴롭히는 거?”


학인의 목소리가 다소 격앙되면서 따지는 투로 추궁했다. 반대로 신 대리의 말투는 차분한 그의 성격만큼이나 평온함을 유지한 채였다.


“어느 정도는요? 예전에 지금 정윤 씨 자리에 있었다던 최 주임. 우리 과 후배였거든요. 당연히 둘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을 수 있었고요. 솔직히 최 주임이 사직서 쓰고 나간 것도 100% 한 과장 때문이에요. 뭐 한숙자 과장도 강 실장이 키워낸 괴물이긴 하지만. 결국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죠.”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었길래 다들 저렇게 못되게 구는 거죠? 아니, 그런 직원이 존재하면 회사에서 직원 보호 차원으로 한 과장에게 징계라도 내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글쎄요. 학인 씨가 보기에는 왜 위에서 가만히 방관하고 있을까요?"


"그냥 일을 안 하는 거 아닌가요?"


학인이 빈정대는 태도로 말하자 처음으로 신 대리의 밝은 표정에 변화가 일어났지만 거의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발언은 조금 오만하게 느껴지네요. 괜히 제삼자가 건드렸다가 일만 커져서 시끄럽게 언론에 나가는 게 싫을 수도 있고,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안 지 얼마 안 된 신입사원보다는 그래도 지지고 볶고 하면서 유대감 쌓은 한 과장님 편을 들고 싶을 수도 있죠. 결국 자기들도 어떤 종류의 불화가 없는 게 서로 편하니까 적당히 주의 주고 당사자들끼리 해결하도록 방관하고 쉬쉬하는 거죠. 사실 한 과장이 하는 짓을 보면 어딘가 애매하거든요. 어쩔 땐 그냥 상사가 부하직원 훈계하는 거 같기도 하잖아요? 그렇게 선을 넘을 듯 말 듯하니까 굳이 사소한 불씨에 부채질하기가 그런 겁니다. 위에서 공식적으로 부채질을 하는 순간, 한 과장의 언행이 잘못됐음을 인정해주는 꼴이 되거든요. 뭐 폭행, 희롱 이런 거면 곧바로 경찰이라도 불었을 텐데. 아니지. 문제가 뭐든 결국엔 함구하려 들었을 확률이 높겠죠? 일개 직원보다는 회사라는 게 이미지가 먼저인 집단이니까.”


“그렇다고 한들, 자기 후배인데 굳이 사소한 거로 갈구면서 안 좋게 지내고 싶을까요? 누구 한 명이 중간에 퇴직하지 않는 한, 최소한 10년은 넘게 함께 해야 하는데요?”


“후배라 후배 맞죠, 뭐. 근데 이 작은 얼개에도 좀 복잡한 구석이 있거든…….”


신 대리는 말꼬리를 흐리면서 시선을 슬며시 손목시계로 옮겼다.


“얘기가 좀 길어질 거 같은데… 괜찮으면 계속 서서 얘기하지 말고 저기 자판기에서 커피라도 하나씩 마시는 거 어때요?”


그 말을 들은 학인은 기뻐했다. 학인은 현재 난파선이나 다름없었다. 아직 좌초되진 않았지만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고장 난 방향키 쥔 채 흘러갈 뿐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학인 역시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사람으로부터 마음의 위안을 얻길 원했다. 학인이 정윤에게 그랬던 것처럼.


“대리님만 괜찮으시다면요.”


***


아직 밤공기가 쌀쌀했음에도 자판기 불빛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날벌레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신 대리는 천 원 자리 두 장을 투입해서 캔커피 두 개를 뽑은 후, 근처 벤치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이제 주위에는 학교에 어울리지 않는 정장 차림의 두 사람뿐이었다.


“학인 씨, 혹시 우리 조직이 라인이 어떻게 나뉘는 줄 알아요?”


라인을 잘 타야 한다. 살면서 수도 없이 들어본 인생 격언이었다. 하지만 아직 회사에서 라인이라고 할 만한 인간관계가 적어도 학인의 시점에선 분명하게 드러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좀처럼 단서를 잡지 못했다.


“이 작은 회사에도 라인이 있나요? 글쎄요……. 원장님? 아니면 아까 말씀하셨던 경영기획실 강 실장님이 실세 아닌 가요? 사람들이 강 실장님만 지나가면 벌벌 떨거나 잘 보이고 싶어서 아양을 떨던데요.”


“현재 시점에선 그 사람이 실세가 맞긴 하죠. 근데 내 질문이 그런 의도는 아니었고. 보통 큰 회사들은 출신 학교나 지역으로 라인 나뉘고 그러잖아요? 어느 대학교 출신이면 서로 끌어주고 이런 거? 근데 잘 들어요. 여긴 웃기지만 이렇게 파가 나뉩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커피를 들이켰다. 신 대리의 목젖이 두 번 꿀렁였다. 작게 탄식을 내뱉은 그는 촉촉해진 입술을 다시 움직여 소리를 빚어냈다.


“공채 출신과 계약직 출신.”


“네? 출신이요?”


학인이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네. 몰랐어요? 레퍼런스가 좀 필요하겠네.”


신 대리는 이해를 돕고자 대뜸 한숙자 과장의 과거를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숙자 과장은 97년도에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계약직 경리 직무로 입사했다. 젖살도 채 빠지지 않은 상태로 일을 시작한 그녀가 큰 변화를 겪은 것은 근속연수가 10년을 넘어가던 시점이었다. 정권이 바뀌고 많은 정책들이 변화하면서 새로운 원장이 배치되었고, 운 좋게 정규직 전환 대상이 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마침내 그녀의 인생도 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고용형태만 전환됐을 뿐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입사 때부터 대학 졸업장을 들고 시작한 정규직 후배들에게 밀려 자꾸만 승진에서 멀어졌다. 조금 억울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자신에 대한 투자를 결심하고 사이버 대학교를 등록했다. 그리고 약 6년에 걸쳐 지역 사립대 석사 학위까지 취득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근속연수가 엇비슷한 동료들이 차장이 되었을 때도 한숙자 과장은 만년 대리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러다 어느 날, 근교 유원지에서 그 당시 팀장이었던 강 실장과 대리였던 한 과장이 마치 연인인 듯한 분위기를 풍기며 데이트를 하는 것을 누가 목격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토록 자극적인 사내 가십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부서와 상관없이 사람 셋이 모이면 모두 흥미로운 소문에 대해 떠들었다. 어느 단계에서인지 두 사람이 시내 한 모텔에서 함께 나오는 걸 봤다는 목격담까지 덧붙여졌다. 어떤 직원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것이라며 불확실한 소문 전파에 조바심을 냈지만 또 어떤 직원은 하늘에 삿대질까지 하며 아니 뗀 굴둑에 연기 날 리가 없다며 열렬히 퍼트리고 다녔다. 진실은 분명 두 사람만이 알고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그 소문이 퍼지고 얼마 후에 한숙자 과장은 만년 대리에서 탈출했다. 그러한 변화가 직원들의 추리에 약간의 확신을 더해주긴 했지만 일각에서는 '이제 할 때도 됐지'라며 동정의 여론도 형성되는 듯했다. 


또 얼마의 시간이 흘렀고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새로운 풍문이 나돌았다. 한숙자 과장이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한 시점이 딱 이때였다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방식이었든 간에 희미하게나마 희망을 빛을 본 한 과장의 실적과 승진에 대한 집착은 더 집요해졌고 자연스레 신입사원들의 괴롭힘으로 이어졌다.       


“…… 아무튼 정규직 신입 직원들한테 열등감이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턴가 그렇게 신입사원만, 특히 여직원이 들어오면 교묘하게 왕따 시키고 못 살게 굴더라고요. 근데 이건 온전히 내 추측이에요.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애초에 인류애가 부족한 미친년일 수도 있죠.”


마치 금서(禁書)처럼 말단은 알 길이 없었던 인사담당자의 1급 정보를 듣다 보니 한편으론 흥미로우면서도 동시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한숙자 과장의 승진 누락에 대해서는 일말의 연민이 생겼을 지라도 남에게 화풀이를 하는 못된 심보는 여전히 정당화될 수 없었다.


“그런데 대리님 설명대로라면 계약직 출신이라면 어쩔 수 없이 계속 승진이 처진다는 건데… 어째서 그 사람들에게 올라탈 라인이란 게 생긴 거죠?”


“아까 말한 그 대단하신 강 실장님도 계약직으로 입사했거든요. 그 사람도 무슨 단기 계약직으로 채용됐다가 운이 좋아서 여기 눌러앉은 케이스인데… 아주 옛날에는 공공기관에서 원장 권한으로 별의별 이상한 직무로 사람 뽑았던 시절이 있었대요. 그 사람은 무슨 25년 전인가? 그 당시 테니스에 미쳐있던 부처 장관하고 원장이 테니스 전문 코치를 단기 계약직으로 뽑았었대나? 그때 고등학교 때까지 선수 생활하던 강 실장을 코치로 영입했대요. 그리고 얼마 후에 IMF가 터졌고, 당연 1순위로 잘렸을 사람인데 어떻게 사바사바 잘해서 일반 사무직으로 전환시켜줬다고 하더라고요.”


“와, 말도 안 돼.”


학인이 충격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강 실장 봤죠? 완전 미친개처럼 성격 더러운 거. 운동하면서 배운 건진 몰라도 그게 절대적으로 방향이 아래로만 그래요. 위 사람들이랑은 주말에 테니스 치고 골프 치면서 얼마나 혀를 잘 놀려서 똥꼬를 빠는지! 그 덕분에 실장까지 올라갔겠지만… 아무튼 그러다 보니 자기랑 출신이 비슷한 계약직 출신들을 한 두 명이라도 더 끌어올리려는 거죠. 출신이나 학벌이 아니라 연공서열을 최우선으로 만들기 위한 명분으로. 그리고 그게 대표적으로 반일식 팀장하고 한숙자 과장 등등.”


“어? 근데 박대근 과장님은 아니에요?”


“박 과장님이요? 그 사람은 왜? 박 과장님은 우리처럼 경쟁 뚫고 입사한 공채 출신이에요. 나름 수도권에 좋은 학교에서 컴공 전공한 엘리트인데? 솔직히 되게 사람 별로 같죠? 나한테 가끔씩 뭐라고 하지만 가만히 하는 행동 들여다보면 은근히 진중하고 좋은 사람이에요. 그걸 언젠가 알게 되는 날이 오면, 학인 씨도 사회 물 좀 먹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는 남은 음료수를 단숨에 들이켠 후에 알루미늄 캔을 구겨 자판기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던졌다. 불규칙적으로 찌그러진 캔은 덜커덩 소리를 내며 바깥으로 튕겨 나왔다. 갑자기 발아래로 떨어진 캔을 응시하는 신 대리의 눈빛이 서글프게 변했다.


“내가 왜 이직하려는 지 물어보고 싶었죠?


학인을 바라보는 신명호 대리는 마치 선견지명이 있는 지혜로운 어른 같았다. 마음이 꿰뚫린 학인은 굳이 변명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마주쳐 동의를 전했다.


“어떻게 알았냐고요? 보통 다니는 직장이 싫은 사람들은 혹시라도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생기면 동질감을 느끼고 이직이라는 큰 결정에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아니까요.”


그렇게 말한 신명호 대리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인도 그를 따라서 일어났다.


“뭐 대단한 이유가 있겠어요? 다… 거기에 적응해서 살아남은 사람들 때문이겠죠. 처음엔 나도 선배들의 안 좋은 모습들이 눈에 보여도 외면했어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일 뿐인데 시건방 떨지 말아야지’ 라고요. 나보다 나이도, 경력도 많고 나름 이 바닥에서 오랫동안 구른 선배님들이니까 어떤... 행동과 의사 결정 하나하나에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라는 식으로 이해하고 넘어갔어요. 그런데… 6개월이 지나고, 1년이 지나고도 계속 봤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이 사람들의 업무가 더럽게 느린 것도, 낡은 방식을 타파하고 개혁하는 데 회의적인 것도 어떤 타당한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라… 절대로 잘릴 일이 없으니까 애초에 의지가 없었던 것이었죠.”


학인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낡고 썩은 조직에 스며든 케케묵은 냄새. 지금 학인이 몸소 느끼고 있는 것을 약 5년 전에 신 대리도 똑같이 느꼈던 것이다. 그 말은 즉슨, 무려 1800일의 긴 세월에도 이 작은 조직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진보하지 못했다는 걸 뜻했다. 이러한 정체와 고임은 고작 몇몇 사람들에 의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일시적인 것이 아닌, 수십 년 동안 수억 마리의 생선을 손질한 오래된 어시장에 베인 비린내처럼 항구적인 것이었다.


“물론 그게 무조건 나쁜다는 건 아니에요. 근데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부작용들이 세월이 흘러도 해결…, 아니 개선조차도 안 되니까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퇴사율이 점점 높아지는 거라고 나 혼자 결론을 내렸어요. 그중 하나가 바로 최 주임이고, 저 자신이기도 하고, 학인 씨가 될 수도 있겠죠. 어차피 완벽하게 적응할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가정을 전제로 하면 어느 회사든 좋은 곳일 수도 있지만 이건 남과는 상관없이 개인의 가치관에 달린 문제이니까.”


“저는 사실 아직...”


학인이 무슨 말을 건네려고 했으나 소리가 너무 작아 신 대리는 듣지 못했다.


“이제 슬슬 들어갈까요? 아직은 일교차가 크네요.”


신 대리가 양팔을 감싸 안으며 몸을 으슬으슬 떨었다. 학인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 서둘러 남은 커피를 비우려 했다.


 “아! 맞다, 이 말해주려고 했는데. 김석규 원장님......  요번 달 말에 퇴임이세요.”


학인은 예상치 못한 소식에 기함할 듯 놀라며 막 삼키던 음료수를 게워내었다. 허리를 숙인 채 코와 입으로 역류한 갈색 커피를 질질 흘리던 그는 더럽혀진 입가를 제대로 닦지도 않은 채 알 수 없는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신 대리를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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