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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선 Oct 13. 2021

#13. 누군가에게는 불가능할 수도 있는 일



“...... 예, 보호사님. 엄마 아직도 기침해요? 아 진짜 속상해요... 안 그래도 주말에 갔을 때 폐렴 증상이 있다고 하셔서 약 처방받고 했거든요. 아무튼 무슨 일 생기면 저한테 바로 좀 연락 주세요. 근데 한 번에 전화 못 받을 수도 있어요. 네, 네. 정말 항상 챙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보호사님은 진짜 저한테 천사 세요.”


정윤의 걱정은 날로 깊어졌다. 안 그래도 거동이 불편한 엄마가 하필이면 폐렴 초기 진단을 받은 것이다. 공기가 안 좋은 병실에 하루 종일 같은 자세로 누워만 있던 탓일까? 욕창은 기우였고 하필 폐병이라니. 정윤의 엄마와 같은 병실에 있던 80세 할아버지도 허리가 불편한 것을 제외하고는 정정했으나 갑작스럽게 심해진 급성 폐렴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돌아가셨다.


전반적으로 정윤의 인생은 꼬여버린 회사생활만큼이나 칙칙하게 물들고 있었다. 정윤은 이 모든 것을 완벽하지 못한 자신의 탓으로 여겼다. 예컨대, 적절치 못한 결정으로 직원들과의 관계가 좋지 못한 상황에 놓인 것도, 몇몇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엄마 간호를 소홀히 한 것도 모두 변명의 여지없이 자신의 불찰로 인해 생긴 문제들이었다.

정윤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바둑 복기하듯 점검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나약한 자신을 더 호되게 채찍질하여 이제라도 꼬인 실타래를 하나씩 풀고자 했다.


여러 가지 생각들로 두통이 심해지면서 귓속에 물이 찬 것처럼 이물감이 들었다. 정윤은 비상계단 손잡이 끝에 엎드려 기합에 가까운 한숨을 내뱉었다. 퍼져나간 음파가 텅 빈 공간에서 작게 메아리쳤다. 다행히 건물 비상계단은 사람들이 잘 사용하지 않았다. 뜨거운 이마와 손목 사이에서 낀 스테인리스 손목시계가 인두처럼 피부를 짓눌렀다. 그러다 문득 자리를 비운 지 벌써 15분이 지났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헐레벌떡 발가락 끝에서 달랑거리는 슬리퍼를 고쳐 신으며 엽사에 쫓기는 산토끼처럼 비상구에서 뛰쳐나갔다.

한숙자 과장은 개인적으로 10분 이상 자리를 비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어쩔 때는 개인 휴식 시간을 일일이 세어 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직 정윤에게만 해당되는 불공평한 규칙이었다. 남경필 대리가 게임을 하느라 화장실에서 30분을 보내고 와도 한숙자 과장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흡연자인 한숙자 과장과 윤수정 사원은 한 번 옥상으로 올라가면 15분은 기본으로 떠들다 내려오곤 했다. 한숙자 과장은 자신의 사람에겐 관대했고 그렇지 않으면 무한히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지난 세 달간 그 기준을 알아내지 못한 정윤은 답답하기만 했다. 하물며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다는 소셜 스모킹이 사회생활의 일부라는 허황된 기사를 우연히 보고는 아주 잠깐 담배를 배울까도 싶었다.


“어딜 갔다가 이제 와? 정윤 씨 요즘 엄청 바쁜 가봐?”


아니나 다를까 사무실에 들어오는 정윤을 보자 한숙자 과장이 자리에서 얄밉게 빈정거렸다.


“아닙니다 과장님. 잠깐 통화 좀 하느라...”


“업무 중에 10분 넘게 사적인 통화? 뭐, 그럴 수 있지. 근데 너 설마 어디 숨어서 잤니?”


한숙자 과장이 벌떡 일어나 정윤의 이마를 살피며 얼굴을 찌푸렸다. 앞머리가 벌어진 정윤의 미간 위쪽으로 동그랗게 눌린 자국이 나 있었다.


“아니요! 절대로 아닙니다.”


정윤이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사이 한숙자 과장은 웬일로 순수히 넘어갔다.


“일단 알겠어. 어쨌든 자기 별로 안 바쁘다는 거지? 그럼 내 부탁 좀 들어줄 수 있어?”


오늘 한 과장은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말투는 여전히 불친절했지만 목소리는 평소보다 나긋나긋했다. 정윤에겐 잘 내지 않는 사무적인 톤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최근 들어 한숙자 과장의 개인적인 부탁이 부쩍 늘었던 터였다. 요가 매트 중고 거래를 대신 다녀와라, 업체에서 선물 받은 어메니티 키트를 주차장에 있는 차에 실어 달라, 편의점에 가서 택배를 보내달라 등등. 한숙자 과장은 일단 고의로 일을 주지 않은 뒤에 안 바쁘냐는 의도된 질문을 던져 정해진 대답을 유도해냈다.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기 위한 교묘한 수법이었다.

그렇다고 정윤이 당하기만 하는 바보는 아니었다. 정윤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활용하고 싶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현 상태에서 그깟 잔심부름을 처리해주는 것은 적대적인 상사와 친해질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적을 이길 수 없으면 친해져라!’


얼마 전 서점에서 읽었던 <직장생활 탄원서>라는 자기 계발 서적에 나왔던 문구였다. 정윤은 이 문구를 포스트잇에 적어 다른 사람들은 잘 볼 수 없는 자신의 파티션 구석에 부적처럼 붙여 놓았다.


“정윤 씨, 저기 말이야. 회사에서 좀 떨어진 곳에 <신사 호텔> 하나 있는 거 어딘지 알지? 5성급.”


“<신사 호텔>이요? 저는 잘 모르겠……”


“아, 뭐야! 정윤 씨 지금 왜 순진한 척하고 그래? 그런 거 전문이면서?”


한 과장의 말을 들은 윤수정 사원이 또다시 소리를 내며 킥킥거렸다. 남경필 대리가 고개를 돌려 윤수정 사원을 잠깐 째려보았다. 그 소리가 너무 인위적이어서 누가 들어도 일부러 냈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유유상종이었다. 한 과장 역시 넘어지는 도미노처럼 연이어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입술 주위 근육만 크게 실룩거렸을 뿐 재빨리 입술을 깨물어 무표정을 유지했다.


“크흠. 아무튼 거기 라운지에 세탁소 찾아가면 내가 맡긴 검은색 블라우스 있어. 이따 점심시간에 그거 좀 찾아 줄래? 내가 열한 시 반에 미용실 예약이 있어서 그래. 돈은...” 한 과장은 검은색 가죽 장지갑을 열어 확인했다. “내가 지금 당장 현금이 없네. 정윤 씨가 먼저 내줄래? 내가 나중에 갚을게. 나 이따가 한 시 반까지 급하게 입을 일 있으니까 꼭 제시간에 와야 해. 알겠지? 이해했어?”


“이해했습니다!”


정윤은 엄마의 첫 심부름을 수행하는 어린아이처럼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한 과장이 내미는 붉은 갱지로 된 영수증을 받아 들었다.


***


점심 식사가 끝나고 12시 20분. 휴대폰으로 호텔 위치를 찾아보던 정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호텔은 회사에서 버스로 28분이나 걸리는 거리였다. 시간 내로 다녀오기에는 빠듯한 시간이었기에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야만 했다. 대로변에서 어렵지 않게 잡은 택시는 10분 만에 정윤을 호텔 정문까지 데려다주었다.


“아가씨, 이거 잔액 부족인데요?”


정윤이 건넨 카드가 먹통이자 택시 기사가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 정말요? 죄송해요. 그럼 이걸로 해주세요.”


잠깐의 기다림 끝에 카드단말기에서 영수증이 출력되며 결제가 이루어졌다. 동시에 핸드폰으로 알림이 울리면서 보고 싶지 않은 숫자를 알려왔다.


‘잔액 38,200원.’


내일이 월급날이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을까! 정윤은 24시간만 버티면 조금이나마 채워질 잔고를 상상하며 가슴을 쓸었다.

사실 이러나저러나 월급날은 정윤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아무리 엄마가 중증환자 산정특례 대상자로 지정되어 국가보조금 혜택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정윤 혼자서 생활비와 병원비를 감당하기엔 빠듯했다. 돈이 통장에 찍히고 숨만 쉬어도 빠져나가는 금액만 월급의 60%. 특히 평일엔 돌볼 사람이 없는 탓에 공동 간병인만으론 부족하여 틈틈이 개별 요양보호사를 고용하는 것이 부담이 컸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이 이렇게 현실적으로 다가온 것은 처음이었다. 차라리 동화 속의 콩쥐가 부러울 정도였다. 적어도 도와줄 두꺼비라도 있었으니까.

 

호텔의 묵직한 회전문을 통과한 정윤은 자신의 행색과는 괴리가 느껴지는 로비로 들어섰다. 입구에서부터 경쾌한 박자의 비올라 연주가 주를 이루는 클래식 음악과 산뜻한 시트러스 향이 그녀를 반겼다. 괜히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는 하나의 마케팅 전략이었다. 고급 대리석 바닥은 얼룩 하나 없었고 높은 천장에서 반짝이는 수많은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을 연상케 했다. 이런 곳에 세탁소가 있다니. 정윤은 믿기지가 않았다.


“혹시 여기에 세탁소가 있나요?”


반신반의하며 묻는 정윤에게 상냥한 직원이 위치를 안내했다. 로비 화장실이 위치한 복도 구석에서 벽을 반쯤 뚫어 만든 간이 세탁소를 찾아냈다. 그 사이로 다림질을 하는 한 남성이 보였다. 검은색 베스트 안에 하얀 셔츠를 입은 60대 남성은 셔츠 소매를 걷고 다림질에 열중했다.


“어서 오세요!”


금색 안경테를 머리 위에 올려놓은 세탁소 직원은 젊은 손님을 바라보자 로비 직원처럼 다소 과하게 친절한 표정을 겸비한 채 정윤을 맞이했다. 정윤은 필시 잦은 직원 예절 교육의 순기능이라 확신했다.


“옷 좀 찾으러 왔는데요.”


정윤이 한숙자 과장에게 받은 영수증을 건네자 남자는 돋보기안경을 코끝까지 내려쓴 후에 꽤 오랫동안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아하! 이거, 이거. 한숙자 고객님 꺼. 이거 안 그래도 마지막 다림 작업하는 중인데, 딱! 10분만 기다려요. 그럼 끝나. 아니 근데 주말에 찾으러 온다고 여유롭게 하라더니 갑자기 오셨네? 잠깐 여기 앉아서 기다리셔.”


정윤은 헤진 가죽이 삼각형 모양으로 벗겨진 스툴에 앉아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벽에 걸린 오래된 전자시계가 12시 44분을 가리켰다. 돌아가는 시간이 충분해서인지 마음이 오히려 허전하게 느껴졌다. 세탁소 주인의 느긋하면서도 섬세한 작업은 1시가 되기 1분 전에 끝이 났다.


“3만 5천 원입니다.”


“잠깐만요, 3만 5천 원이요?”


금액을 들은 정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무슨 문제라도?”


“그건 아닌데, 저는 한 번도 세탁소에서 상의 한 벌에 이런 돈을 지불해본 적이 없어서요…….”


“아, 당연히 그러시겠죠. 여기 호텔 세탁소는 대부분 비싼 명품 브랜드 의류나 가방을 맡기는 분들이 많아서 일반 세탁소랑은 기술도 품질도 다릅니다. 제가 또 대한민국 세탁 명장이거든요! 티브이에도 여러 번 출연했는데 못 보셨나요?”


정윤은 주인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공포영화를 본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좀 전의 여유는 소멸하고 마음은 조급해졌다. 시간은 이제 막 1시를 지나고 있었다. 세탁료를 지불하고 나면 남은 돈으론 택시를 탈 수가 없었다. 만약 버스를 탄다면 늦을 확률이 높았다.


“사장님! 여기 제일 가까운 버스 정류장이 어디예요?”


정윤이 결제할 카드를 건네며 물었다.


“여기서 나가서 좌측 후문으로 나가서 우측 끝에 보이는 담장 쪽문으로 나가면 바로예요!”


“감사합니다. 이 쇼핑백 맞죠?”


인상 좋은 주인의 끄덕임을 봄과 동시에 정윤은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클래식 음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역동적인 움직임에 로비를 지나치는 모든 투숙객들이 곁눈질을 했다. 정윤은 개의치 않았다. 사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다행히 버스 정류장은 건물 바로 옆이었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다리는 1분이 10분처럼 느껴졌다. 발을 동동 구르며 10초에 한 번씩 휴대폰 시간을 확인하던 그때, 경로가 회사를 지나치는 버스 한 대가 코너를 돌아 정류장으로 들어왔다. 좌석 대부분이 채워져 있었고 정윤은 제일 뒷자리에 앉았다. 버스는 평소와 같은 속도로 운행 중이었음에도 체감 상 기어가는 것 같았다. 다음 정류장에서 느긋하게 올라타는 사람, 하차 시 버스카드를 못 찍는 바람에 미적 거리는 사람 모두에게 괜히 화가 났다. 불안감을 견디지 못한 정윤은 버스 정면을 계속 응시하며 내리기 두 정거장 전부터 일어나 있었다.


“과장님. 도착했습니다. 저 안 늦었어요.”


세이프였다. 시계 분침은 2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윤은 가쁜 숨을 가까스로 몰아 쉬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한 과장은 자신의 자리가 아닌 정윤의 책상 옆에 서 있었다. 처음에 정윤은 한 과장의 너무나 달라진 모습에 자신의 자리를 막고 서 있는 여성을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늘 사자 갈기처럼 부슬부슬한 폭탄 머리는 완벽하게 펴진 상태로 관자놀이 옆에 붙어 찰랑거렸다. 즐겨하는 스모키 화장도 평소보다 더 진해서 정윤을 노려보는 그 모습이 먹이를 노리는 검은 표범처럼 보였다.


“뭘 이렇게 부산스럽게 뛰어와? 아슬아슬했네. 근데......”


한 과장은 양 무릎에 손을 얹고 여전히 숨을 고르는 정윤을 바라보며 의아해했다.


“내 옷은 어딨어?”


정윤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황급히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연실색한 정윤이 쇼핑백을 버스에 두고 내린 것을 깨달은 시점은 평소 모습으로 돌아온 한숙자 과장의 윽박지름이 한 차례 고막을 때린 후였다.


***


같은 시간, 학인은  직원을 대상으로 발송된 이메일 하나를 확인하고 있었다. 경영지원팀의 <반기 인사 발령 공고>라는 제목의 이메일은 신명호 대리가 발신자였다. 모든 직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있는지, 침묵의 요정이 삽시간에 주변 소리를 빨아들였다.

학인 역시 첨부파일을 열었다. 한 페이지 자리 문서는 승진자 명단이 서두의 짧은 인사말과 함께 표로 정리되어 있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現 김석규 원장 퇴임 -> 新任 박상호 원장 취임


- 일자리지원팀 한숙자 과장 -> 차장(팀장 직무대리*)

- 정보전산팀    박대근 과장 -> 차장대우

- 일자리지원팀 남경필 대리 -> 과장대우

- 마케팅지원팀 노미영 주임 ->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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