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세 사람 중 첫 퇴사자가 탄생했다.
비록 그 선구자는 끝인사 한 마디 없이 홀연히 회사를 떠났지만 민생경제진흥원에는 잠시나마 큰 파장을 일으킬 것처럼 보였다. 사실 그 파장이라고 해봤자 고작 며칠이 전부였다. 원래 회사란 필연적으로 기억의 호흡이 매우 짧은 곳이었다. 도무지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유능한 존재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사적인 소문도 시나브로 흐려지기 마련이다. 이번에 회사를 뒤집어 놓은 '운전기사 사건' 역시 직원들은 마치 일리아드 서사의 어느 대목처럼 혹은 고담시를 구하고 유유히 사라진 배트맨 이야기처럼 며칠 동안 재혁의 영웅담을 읊조렸지만, 한 주가 지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두 망각해버리고 말았다.
그날 이후 강신우 실장의 처분에 대해 조금 덧붙이자면, 그는 주차장에서 재혁과 한 약조를 끝내 지키지 않았다.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못한 쪽에 더 가까웠다. 예상치 못한 슈퍼카의 등장으로 어안이 벙벙해진 그는 터벅터벅 사무실로 돌아왔다. 괜히 속이 쓰렸고 책상 위에 있는 위장약을 물도 없이 한 알 집어삼켰다. 그때가 오후 4시였다. 어느덧 하루가 고개를 넘자 그의 얼굴에는 샤프심 같은 수염이 자라 더 초라해 보였다. 그는 의자에 앉아 까끌까끌해진 자신의 턱을 손바닥으로 쓸면서 잠시나마 갱생 비슷한 마음을 먹었었다. 그래. 어쩌면 내가 조금 직급을 무기 삼아 제멋대로였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의 참회는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바로 그다음 날, 너무나 적나라한 폭로 기사가 다시금 인터넷을 달궜기 때문이었다.
소셜미디어에 익숙한 2030 직장인들에 의해 일파만파 퍼지며 공유된 해당 기사는 그가 진흥원 일자리지원팀의 팀장으로 있던 2010년도부터 2016년까지의 만행, 즉 틈만 나면 젊은 직원들의 험담에 오르내렸던 소설과도 같은 이야기들을 인터뷰 형식으로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저번 기사에서 처음으로 그의 만행을 폭로했던 박 모군은 자신 말고도 다양한 방식으로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직원들이 셀 수 없다고 덧붙였다. 박 모군은 현재 가해자로 지목된 K실장이 개인 약속이 있는 날이면 부하들을 돌아가면서 대리기사처럼 부린 것뿐만 아니라 일의 경중에 상관없이 실수한 직원에게 결재판을 던지거나 모욕적인 언사를 면전에 퍼붓기도 하고, 회식 때면 항시 노래방을 데려가서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도록 강요한 일, 또한 특정 여자 직원들을 대상으로 불필요한 악수를 청하고 어깨를 주무르는 등과 같은 성희롱도 일삼았다고 전했다.>
이 사실을 목도한 언론은 들끓었다. 페이스북에 공유된 기사에는 좋아요가 10만 개가 넘게 눌렸다. 다급해진 강 실장이 아무리 인맥을 동원해도 막을 수 없었다. 보통 회사 내 부조리 폭로라 하면, 홧김에 확 저질렀다가 돌아올 불이익을 예상한 폭로자가 이내 겁을 먹고 태도를 변경하여 쉬쉬하려 드는 게 인지상정인 터인데, 어찌 된 일인지 이번 사태는 사그라들긴커녕 바람을 머금은 산불처럼 더 활활 타오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평소에 의문을 품지 않았던, 회사 내의 어떤 정형화된 관계에 대해 다시금 고찰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어째서 오늘날의 조직에 궁극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업무에 대한 선호도나 익숙도 그 자체보다도 함께 일하는 주변 사람들의 개인적인 성향이 더 큰 요소로서 작용되는 얼개가 고착화되었는가?'라든지, 혹은 '직장 동료 또는 상사가 각각의 개개인에게 미칠 수 있는 그 권한과 경계는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라든지, 또는 '상위에 위치한 직원들이 지속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현대 시대의 수준에 부합하는 재평가 기준을 마련해야만 합리적인 회사 위계를 유지하고 조직이 퇴보하지 않지 않는가?' 따위의 주제들이 있었다.
물론 애초에 강 실장이 했던 찰나의 반성에는 이런 심오한 고찰 따윈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저 단순히 배신감에 머리 꼭대기까지 분노한 그는 일전에 도로 올려두었던 부서진 모니터를 이번에는 아예 투포환을 던지듯 벽에 날려버렸다. 그리고 화를 삭이지 못한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곧장 자신을 사지로 몬 당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개자식아! 어제 말 한 거랑 다르잖아!”
<뭐라고요? 나는 분명 내가 녹음한 원본만 제보 포기하는 걸로 이해했는데? 양심도 없어요? 당신이 쌓은 업보에 대한 벌은 받아야지. You should be punished for sure. 안 그래요? 술 먹느라 바쁘니까 이런 걸로 전화하지 마요. 아니면 나 좀 태우러 오든가.>
전화는 이대로 끊어졌고 안타깝게도 강 실장이 분노한 정도와 통화 시간은 비례하지 못했다.
하지만 의외로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원하는 결과값을 내놓지도 않는 법이다.
고작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은 말단의 용기와 활약으로 어찌어찌 악마의 모가지가 기요틴에 올려졌음에도, 강 실장이 받은 징계라고는 고작 3개월 정직처분이 다였다. 목이 날아가기를 기대하던 학인에게 그 정도 처분은 정수리나 조금 벤 수준에 불과했다. 사실 그나마 이것 또한 학인이 첫 출근날 그렇게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김석규 원장의 퇴임 전이었기에 가능했던 결과물이었다.
일각에서는 며칠 뒤면 새로 부임하는 원장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은 강 실장이 김석규 원장에게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어찌 됐든 아무리 메일 수신함을 새로고침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혀끝이 씁쓸해진 학인은 그 결과를 곱씹으면서 ‘회사란 기대 이상으로 모순과 우스운 구석이 많은 곳이구나’라고 마음속 깊숙이 한탄했다. 취직 전에 가졌던 간절함이 퇴색되고 회사에 대한 충성심과 열의가 사그라지는 순간이었다.
남들이 부럽다는 '안정감'.
그리고 도대체 어떤 잘못을 저질러야 조직에서 잘릴 것인가 라는 의구심과 곧바로 그 의구심이 반증해버린 논제, 즉 뭔 짓을 해도 영원히 잘릴 일이 없다는 하찮은 안일함이 마음속에 생긴 공백을 대신했다.
***
또 며칠이 그렇게 지나갔다.
주말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직장인들에게 평일은 늘 멈춘 듯했지만 어쨌거나 시간은 흘러서 돌아보면 어느 지점에 정착해 있었다. 그 사이 진흥원에는 새 원장이 둥지를 틀었고 김석규 원장이 떠났다. 김 원장이 직접 물을 주고 볕을 쬐이던 금난초 화분도 사라진 그의 자취처럼 어디론가 치워졌다.
"배달 왔는데요. 여기 박상호 님이 몇 층에 계시죠?
신임 원장의 취임 첫날, 원장실에는 고가의 난과 여타 화분들이 끊임없이 배달되었다. 소탈하던 김 원장과 달리 박 원장의 성향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산책을 핑계 삼아 자주 사무실을 돌던 김 원장과 달리, 박 원장은 점심시간이 끝나는 오후 1시부터 1시 30분까지는 사무실에 틀어 박혀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주목할만한 것은 그가 이 비밀스러운 개인 시간 동안에는 대면 결재나 급하지 않은 보고 조차 철저하게 꺼려했다는 점이었다. 최측근인 임 비서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는 드립 커피밖에 먹지 않는 신임 원장을 위해 점심시간이 끝나고 커피를 내려주어야 했는데 그때마다 방 안에서 무언가를 휘두르는 듯한 붕 붕 소리나 둔탁하게 딱 하는 타격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다.
"그 소리가 도대체 뭘까요?"
본인 역시 궁금했던 임 비서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대근과 신 대리를 휴게실에서 만나 단서를 제공했다.
"허허, 이렇게 아직도 감이 없어서야. 의심의 여지가 없이 백 퍼센트 골프지."
"네? 설마 골프 연습이요?"
"가능성이 높네요. 안 그래도 원장님이 독대하는 직원들마다 골프 치냐고 물어본다고 하더라고요."
"어휴! 뭔 애도 아니고 일일이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죽겠어요 정말. 그래도 보기 싫었던 놈 한 명 사라져서 좋다 했더니 더 별로인 사람이 온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좀 말은 많았어도 김 원장님이 그립네요."
"그러게 내가 말했었지? 좀 귀찮게 굴어도 그 양반 있을 때가 편한 거라고. 임 비서도 좋은 시절 끝이야."
저마다 포인트는 달랐어도 떠난 상사를 그리워하는 분위기가 아직 회사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건 학인도 마찬가지였다. 존경하는 상사와의 이별에 아쉬운 마음을 지니고 있던 학인은 그래도 김석규 원장의 마지막 근무 날 우연히 그를 복도에서 마주칠 수 있었다. 그는 평상시 자주 매던 자주색 타이에 푸근한 미소를 장착하고는 학인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요즘 어때요? 별일 없죠? 앞으로도 열심히 하세요."
첫날 큰 포부가 담긴 연설과는 달리 의외로 간결하게 말한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편하고 옆집 아저씨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학인은 내민 손을 맞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두 사람의 손이 떨어지면서 학인은 어쩐지 서로를 엮고 있는 유일한 연결고리도 함께 소멸한 것 같은 기이한 느낌에 휩싸였다. 그리고 동시에 어떤 깨우침을 하나 얻게 되었다. 첫 대면 때 그렇게 자신을 압도하며 긴장감을 자아내던 이 사내는 더 이상 안면이 있는 60대 아저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하물며 어떤 관점에서는 조직에서의 이탈로 이웃보다도 못한 사이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을.
직장 동료라는 게 이렇게 하찮고 얕은 관계일 줄이야.
싱거운 작별인사를 마친 학인은 속으로 한탄하며 키보드 위로 공문 서류가 널브러진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며칠간 재혁의 퇴사로 인한 상실감에 고통스러워했던 그였는데, 오늘은 또 완전히 대립되는 깨우침으로 잠깐 혼란스러움에 시달렸다. 그의 얼굴 근육은 경직되어 있었고 눈동자는 심지가 꺼진 램프처럼 텅 비어있었다. 그러나 개인의 음울한 기분을 일일이 달랠 여유를 줄만큼 회사는 관대하지 않았다.
"진학인! 너 내가 확인하라고 한 거 확인했어?"
반 팀장이 자리에서 치실로 가야금을 퉁기며 물었다.
"아까 했는데 전화를 안 받아서요. 지금 다시 한번 해보겠습니다."
"어휴 그럼 네가 먼저 전화를 달라고 메모를 남기는 융통성을 발휘할 줄 알아야지 이 사람아! 그걸 종일 기다릴 거야?"
요즘 그에게는 특별한 고통 없이도 출근이 지옥이었다. 혹시라도 누가 '회사 생활 어때?'라고 묻는다면 딱 한 마디로 요약해 줄 터였다.
좆까.
***
"한 10분 뒤면 도착하신답니다."
새로운 지도 체제 아래 진행된 가장 큰 행사는 하필 인도 하원의원의 내원이었다. 작년에 수립한 계획대로 별도의 전문 통역을 고용하지 않고 학인을 단독으로 행사를 진행하는 것은 누가 봐도 패착이었다. 그럼에도 반 팀장이 자신의 부하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이유는 5개월 전에 읽은 학인의 자기소개서의 한 대목에서 비롯되었다.
사람의 뇌는 항상 믿고 싶은 것을 더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 이드와 에고의 충돌. 즉 그 현상은 자신에게 놓인 조건이 불리하여 은연중에 회피하고 싶은 상황일 때, 아니면 갖고 싶은 대상이 충분하지 않을 때 주로 일어난다. 막일을 뛰며 고작 한 달에 두어 번 집에 들어오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시장에서 홀로 백반집을 운영해서 바쁜 어머니. 어려서 애정이 결여된 환경에 놓인 채로 성장한 반 팀장은 그 기능이 유달리 발달된 사람이었다. ‘약 6년 간의 대학 생활 동안 영어회화 스터디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영어 실력을 길렀습니다.’라는 대목은 이상하리만치 그의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특출 난 구석이 없어도 자신만의 보호색을 구축하여 최대한 오래 버틸 수 있는 끈기. 자신과 비슷한 놈을 고르려는 무의식의 결과였을 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학인의 어학 수준은 거의 원어민에 육박할 정도로 과장되어 있었다. 실제론 전혀 그렇지 않는데도 말이다. 곧 도착할 인도 경제 사절단을 기다리면서 반 팀장은 자신의 계획에 문제가 없을 거라 최면을 걸었다.
‘뭐, 엄마 가게에 있는 똥개도 이제는 단골도 알아보고 쓰레기 봉지도 내다 놓는데 뭐든 6년을 하면.......’
박 원장은 행사 장소인 호텔 로비에 직접 나와있었고 외국 사람을 만나는 사실에 약간 흥분한 듯 보였다. 테가 없이 각진 안경에 광택이 나는 헤어 제품으로 머리를 쓸어 올려 고정한 탓인지 그는 원래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고 날카로운 이미지를 풍겼다. 그가 어떤 성향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이런저런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음에도 벌써부터 잘 보이려는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약싹 빠른 반 팀장은 정말 박 원장에게 줄이라도 서듯 떡하니 바로 뒤에 서있었다. 그는 안 그래도 최근 뜻밖의 횡재로 인해 더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이게 모두 별 볼일 없다 여겼던 신입사원 한 명이 만든 나비효과였다.
잘 따르던 선배가 아무런 피해도 없이 혼자 징계를 먹다니. 강신우 실장의 앞날이 이런 식으로 꼬여서 안타까울 거리는 추호도 없었다. 혹시라도 신이 착실한 양의 기도를 듣고 마침내 기회를 내려주신 거라면 그야말로 황송할 따름이었다.
'지금껏 우러러봤던 강 실장이 견고한 철옹성이 아니라 고작 트럼프 카드를 쌓아 만든 부실 건축물에 불과했다니! 낄낄. 만약 요번 원장에게 잘만 보인다면 내가 당분간 공석인 실장의 자리를 쉽게 꿰찰 수도 있을지도 몰라.’
그는 꿰맨 자국이 있는 두툼한 검지 손가락으로 수염자국이 선명한 인중을 세네 차례 비비며 거무죽죽한 잇몸이 드러날 정도로 히죽거렸다. 그리고 신분상승의 사다리의 발판 중 하나가 되어 줄 자신의 지원군을 야심 가득한 시선으로 확인했다. 그의 시선의 끝에는 다소 긴장돼 보이는 학인이 있었다. 그는 끝내 반 팀장의 성화에 못 이겨 반 강제로 통역으로 나섰던 터였다. 한동안 텅 비었던 그의 눈동자에는 오랜만에 어떤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어려있었는데,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 억울함과 적개심, 분노 등이 섞여있었다.
학인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려 고개를 들었다. 파란 하늘이 그의 시선에 스며들었다. 불편한 심기와 달리 날씨는 너무 화창하다 못해 완벽했다. 구름이 없어서 어디 한 곳에 제대로 초점을 둘 수도 없이 맑은 하늘을 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그곳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그러는 사이에 회색 20인승 중형버스가 나타났고 호텔 입구 쪽 언덕길을 오르며 천천히 멈췄다. 그리고 누가 봐도 인도에서 온 사람들이 차례로 내리기 시작했다. 태양에 그을린 듯 진한 구릿빛 피부를 지닌 아홉 명의 사절단에는 나이가 지긋한 하원의원과 그의 딸, 또 다른 젊은 하원의원 한 명과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인들, 거기에 유명하지 않은 배우 한 명이 끼어있었다. 남자들은 모두 파란색, 주황색 등의 화려하고 원색의 정장을 입었고 여자들은 인도의 모조 보석과 금빛 천 레이스가 달린 전통 양식을 띄는 드레스를 입었기 때문에 모두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행 중 유일하게 튀지 않고 평범한 옷을 입은 두 명이 주한 인도 대사관의 직원인 듯했다. 환대하러 나온 진흥원의 직원들은 손님들의 다소 난해한 행색에 눈을 굴리며 당황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다들 그냥 그 나라의 고유의 문화이겠거니 싶었다.
"Hello. Good to see you. I'm Alex Azar.(안녕하세요, 알렉스 아자르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아자르 의원이 박상호 원장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근처에 있던 학인은 바로 나서지 못하고 여전히 나머지 일행에 질척한 진흙처럼 섞여있었다. 인도 억양이 진하게 섞인 의원의 목소리를 듣자 괜히 더 떨렸다. 그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오래된 트럭의 엔진처럼 덜덜 떨렸다. 의원은 학인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영어로 몇 마디를 더 이야기했다. 턱과 인중에 검고 숱이 빽빽한 수염을 지닌 나이 든 의원의 말이 끝나자 박 원장을 필두로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학인을 바라보며 통역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대 공포증.
학인은 마치 무대 위에 오른 사람처럼 정신이 없고 등은 땀으로 축축해졌으며 얼굴 전체가 화끈거렸다. 지체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어느새 원장의 우측으로 몸을 뺀 반일식 팀장이 음소거 상태로 '뭐해!'라고 고함치고 있었다. 전신을 휘감는 긴장감에 지배당한 학인의 눈에 반 팀장의 마임이 들어올 리 없었다. 군중들 속에서 '뭐 하는 거야'라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다. 기다리다 못한 박 원장이 결국 투박한 발음의 영어로 적막을 깼다.
"쏘리, 쏘리 하하. 나이스 투 미츄. 마이 네임 이즈 팍. 미스터 팍! 하하. 난감하네. 여기 빨리 통역 좀 부탁해요. 먼 길 오느라 너무 고생 많았으니까 오늘 저녁은 아주 맛있는 한국 음식으로 내가 사겠다고."
그러자 즉각 반 팀장이 아주 크지 않은 목소리로 부하를 다급하게 재촉했다.
"진 주임! 멀뚱멀뚱 가만히 서서 뭐 하는 거야? 빨리 가서 응대하지 않고. 원장님이 난감에 하시잖아!"
“어..... 그러니까.”
머리가 백지가 된 학인이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는데 까지는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는 바싹 마른 입술을 움직였고 해서는 안 될 말을 거친 숨과 함께 토해내고 말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못할 것 같습니다."
학인은 미친 사람처럼 인파를 헤치고 행사장 밖으로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