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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선 Oct 19. 2021

#15.  떠나는 세 사람 중에 - (1)


어느덧 따뜻해진 기온에 얼었던 땅이 녹으며 수분을 머금고 폭신해졌다. 그 틈을 비집고 올라온 봉오리들을 화창한 햇살이 반겨줬고 그들은 마치 보답이라도 하듯 팔다리를 활짝 열어젖혔다. 길거리를 거닐던 사람들은 종종 보도블록 근처에 피어난 봄의 증거를 발견하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낮에는 점차 눈이 부실 정도로 햇빛이 강렬해졌고 어떤 날은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꽃잎은 떨어지고 대신 푸른 잎사귀들이 바람에 흔들려 와스스 소릴 내어 귀를 간지럽히는 여름이 올 것만 같았다.


계절이 바뀌고 바깥 온도가 상승하는 것에 장단을 맞추듯 회사 분위기도 조금씩 들끓었다. 재혁의 하극상이 벌어지고 일주일이 지났다. 김창희 주임은 대차게 예고한 대로 강 실장과 반 팀장에게 옥상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털어놓았다. 문제는 그가 실제 사실에 살을 붙여 사건을 부풀려놓았다는 것이었다. 교활한 김창희 주임은 이번 연극에 아무 역할도 맡지 않은 학인을 기어코 조연으로 끼워놓고야 말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강 실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두 사람을 위한 징계위원회가 열릴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 하지만 의외로 한 주가 지나도록 깜깜무소식이었다. 


그건 사건의 중심에 있던 당사자가 잠적했기 때문이다.


지난 금요일, 그러니까 김창희 주임에 이어 남은 두 사람이 옥상에서 내려간 직후 재혁은 곧바로 이틀간 자리를 비웠다. 그는 부서장의 승인도 받지 않고 일단 인사담당인 신명호 대리를 통하여 월요일과 화요일에 병가를 신청했던 것이었다. 주말에 도서관에서 NCS 문제를 풀고 있던 신명호 대리는 엉겁결에 문자로 받은 요청에 무척 당황스러워했지만 일단 보고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그가 굳이 상사에게 알릴 필요도 없이, 벼르고 있던 강 실장은 월요일 새벽부터 사무실에 나와 재혁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전 9시가 넘도록 재혁은 나타나지 않았고 마침 신 대리가 마치 그의 법률대리인처럼 모습을 드러내서는 그의 갑작스러운 병가에 대해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강 실장은 얼굴이 붉어지고 오른쪽 관자놀이에 굵은 핏대가 솟을 만큼 분노했으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곧장 열을 내리고는 정신이 빠진 사람처럼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수리되지 않은 재혁의 휴가 요청은 결과적으로 무단결근을 의미했다. 강 실장은 이례적으로 개념이 없는 신입사원 놈이 겁을 먹고 꽁무니를 뺐다고 비웃었다. 그리고 공범으로 지목당한 학인이 들을 수 있도록 굳이 3층까지 찾아와 '네 절친이 무단결근을 했으니, 7일 이상 이어지면 곧바로 규정에 의해 해고할 것'이라며 엄포를 놓고 갔다. 다소 억울한 학인은 동기를 잃을까 조바심이 났지만 사무실을 나가기 직전 자신의 표정을 은근슬쩍 살피는 강 실장의 면모로 보아 그가 약간의 허풍을 떨고 있다는 것을 꿰뚫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의 표정은 불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재혁은 왜 이렇게 제멋대로인 행동을 했던 것일까? 정말 그가 철이 없다거나, 뒤는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감정대로 행동하는 기분파라서? 아니면 믿는 구석이라도 있던 것일까? 사무실에 허리를 굽히고 삐뚜름하게 앉아 있는 학인은 그 이유를 반은 이해하고 반은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재혁은 그날 옥상을 나서기 전, 입꼬리를 귓불까지 지독하게 늘어트리며 머지않아 회사에 꽤나 흥미로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 자신의 동기에게 예고해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폭주하게 된 그 경위, 그러니까 김창희 주임에게 하극상을 일으키기 바로 전날 저녁, 강 실장 사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낱낱이 일러주었다.


"야, 재혁아. 근데 이래도 괜찮을까? 김창희 주임이 아무리 꽉 막힌 놈이여도 나름 회사 선배인데."


학인은 세렝게티에서 톰슨가젤을 쫓다 놓친 암사자처럼 헐떡이며 되돌아오는 재혁에게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온몸에서 나는 열을 식히기 위해 걸쳤던 코로듀이 소재의 카키색 겉옷을 벗어던지며 언짢은 기색으로 소심한 자신의 동기를 다독였다.


"괜찮아 형. 어느 조직이든 누군가 한 명쯤은 총대 메고 꿈틀 하는 지렁이가 있어야 뭐라도 바뀌는 법이라고. 아무리 한국사회가 보수적이라지만 여긴 유난히 선을 넘는 놈들이 많아. 무슨 분리수거 안 하는 미국 쓰레기 통 같아서 역겨워. 아무튼, 그래서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어제? 뭔데?"


재혁은 자신이 직접 겪은 상황이 조금은 재미있다는 듯 눈을 굴리며 잠깐 히죽거리더니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생생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강 실장 말이야. 퇴근 30분 전에 나한테 오더니 자기 약속 있는데 태워다 달라는 거야. 술 먹을 거라서 차 두고 간다고. 유명한 한정식 집이었는데 장소가 대충 가는 방향이기도 해서 그냥 알겠다고 했어. 그래서 퇴근하고 같이 주차장으로 갔는데 이 인간이 갑자기 자연스럽게 뒷자리에 타는 거 아니야?”


“진짜? 네가 무슨 개인 기사야 뭐야......”


학인은 이 대화에서 재혁이 오래된 은색 준중형 세단을 끌고 다니는 것을 상기해냈다.


“그러니까. 지가 무슨 회장님이라도 되는 줄 아나 봐. 기분 묘하긴 했는데 일단 어떻게 하나 보려고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출발했어. 가는 동안에도 얼마나 자기 인생이 성공했는지에 대해 자랑을 해대던지. 그리고 뒷자리에서 내 차를 이리저리 훑더니 갑자기 신입사원 첫차로 뭐를 사야 하는지 친히 충고까지 해주더라고?”


이야기에 집중하던 학인은 차를 추천하는 게 어느 면에서 기분이 나쁜지는 잘 몰랐지만 대충 눈살을 찌푸려 한 차례 공감을 표했다. 재혁은 청자의 공감적 태도에 힘입어 다음 이야기에 대해 더 자세히 묘사하기 시작했다.


재혁이 강 실장을 데려다준 식당은 지역에서 역사가 깊고 그만큼 비싸기로 유명한 한식집이었다. 호텔처럼 입구까지 차량 진입이 가능하도록 설계된 식당 건물에 도착했을 때 강 실장은 고맙다는 말 대신 자신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명령뿐이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재혁은 순간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침 화장실도 들리고 싶었던 차였기에 주차요원에게 키를 맡기고 식당을 들렀다. 바닥에 주름 한 점 없는 빨간색 카펫이 깔리고 허전한 대리석 기둥 앞에다 유려한 도자기를 배치한 이곳은 재혁에게 익숙한 곳이었다. 종업원들은 여전히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채로 정중하게 손님을 맞이 했고 그 품위에 어울리게 격자무늬 목재 천장에서는 귀를 괴롭히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아쟁 소리와 가야금 소리가 흘렀다. 모든 자리는 방으로 되어 있었다. 강 실장의 목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제일 안쪽 화장실 바로 옆에 위치한 방, 그러니까 천정 바로 아래 벽면에 '세종'이라는 명패가 붙은 곳에서 그의 목소리가 카운터까지 울려 퍼졌다. 우연히 그 소릴 들은 재혁은 큰 주저함 없이 그 즉시 건물을 빠져나와 자신의 차를 끌고 집으로 향했다.       


이야기를 마친 재혁은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갑자기 바닥에 침을 한 차례 뱉었다.


“에? 그러고 끝이야? 그렇게 갔는데 뭐라고 안 했어? 기다리라고 했다며?”


“왜 안 했겠어. 두 시간쯤 지났나? 집에서 밥 먹고 헬스장 가서 운동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길래 고민하다 받았더니, 강 실장이더라고! 얼큰하게 취해서 꼬인 혀로 자기 볼 일 끝났다고 어디냐고 묻대? 그래서 나는 지금 헬스장이고 다시 갈 수 없으니 택시 타고 귀가하시라니까 갑자기 '이런 개념 없는 새끼'라는 말을 일곱 차례나 지껄이며 한 오분을 넘게 쌍욕을 해대는 거야. 난 대충 ‘예, 예 죄송합니다’ 하고 영혼 없이 대답하다 끊었지. 그리고 아까 아침에 출근했는데 자기 방으로 소환해서 또 비슷하게 지랄하더라고?”


갑자기 말을 멈춘 재혁이 사악하게 씩 웃어 보였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게?”


“무릎 꿇었어?”


학인이 농담을 건넸다.


“아, 뭔 소리야. 그 자리에서 바로 녹음한 거 틀어줬지.”


“뭐? 너 통화 내용을 녹음했어?”


학인은 기함했고 그 동시에 두 팔이 소름이 돋았다.


“당연하지. 그렇게 습관적으로 사람 깔보고 무시하는 새끼들은 이렇게 한 번 된통 당해봐야 못 차릴 정신도 번쩍 차린 다고. 보통 이런 류의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자기가 뭘 잘못하고 있는지도 몰라.”


“듣더니 뭐래?”


“한동안 턱 빠진 사람처럼 입 벌리고 아무 말도 안 하던데? 그래서 내가 나랑 아주 가까운 사람이 지역 방송사에서 높은 사람이라고 말했거든? 상사라고 선 넘은 행동하는 거 더 이상 못 참겠다, 언론의 순기능이 뭔지 보여주겠다고. 그랬더니 막 성질을 내면서 뭐, 자기가 아는 언론사 부장이랑 기자가 몇 명인데 그깟 신뢰성 없는 익명 제보 하나 묵살하는 거는 일도 아니라면서… ‘버릇없는 놈이 현실감각까지 떨어지네’ 어쩌고 저쩌고 하길래 진짜 너무 짜증 나서 사무실 박차고 나온 타이밍에… 형한테 딱! 인터폰이 온 거야. 옥상으로 올라오라고.”


이야기를 만족스럽게 끝낸 재혁은 재킷 속주머니를 뒤져 갑자기 담배를 꺼내 들었다.


"뭐야, 너 담배 끊었잖아?"


 "아 형.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어떻게 참아. 내가 아무리 비교해봐도 여긴 진짜 군대보다도 더 좆같은 곳이야. 형도 빨리 탈출해. 나 조만간 탈출할 거니까. 한국 사람들 은근히 이상하다니까. 21세기에 여전히 몇 안 되는 분단국가라서 억울하게 군대 끌려 간 거까지는 리스펙. 근데 자기들이 겪은 것 중에 개 같은 게 있었으면 없애고 안 할 생각을 해야 되는데 그대로 녹아들어서 따라 한다니까? 강 실장도 백 프로 옛날에 어렸을 때 자기 상사한테 제공했던 서비스받으려고 한 거라고.”


재혁의 이야기를 듣고 초점이 없는 시선으로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보던 학인은 잠시 후 힘없이 웃으며 홀린 듯 불쑥 손을 내밀었다.


“야. 나도 한 대만 줘라.”


재혁은 잠시 학인이 내뱉은 말이 진심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그럼에도 학인이 결정을 무르지 않자 왈가왈부하지 않고 새로운 담배를 하나 꺼내서 학인에게 건넸다. 결국 오랫동안 꺼져있던 학인의 심지에도 불이 붙었다. 콜록. 독한 담배 연기를 흡입한 학인의 폐가 얕은 비명을 내뱉었다. 담배는 자전거 타기와 비슷했다. 처음엔 어려워도 한 번 이해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적응했다. 학인은 단 두 번의 흡입만으로 다시 예전처럼 능숙하게 연기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근데, 재혁아. 그 방송사에 있다는 가까운 사람은 누군데? 믿을만한 사람이야? 강 실장 말대로 제보했는데 인맥이나 뭐 권력에 묻히면 어떡해? 별 것도 아닌 걸로 괜히 일만 키운 거 아니야?”


학인이 과거의 습관처럼 입에 머금은 연기를 명주실을 뽑듯 입꼬리 쪽으로 얇게 뿜어내며 내심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럴 리는 없어. 권력이 있어서 그걸 쓴다면 이번에는 확실히 내 쪽이야.”


자신한 재혁의 두꺼운 손가락이 끝까지 타들어 간 담배꽁초를 퉁겼다. 아직 살아남은 담뱃재 불꽃이 작은 폭죽처럼 바닥을 향해 번쩍였다.


"Because it’s ma grandpa.(우리 할아버지거든).”


***


“박재혁 그 새끼가 혹시 너한테 무슨 말 안했냐? 아니면 너네 둘이 한 패야?”


오후까지도 재혁과의 접촉 또는 거래에 실패한 강 실장은 결국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학인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면담을 가장한 취조를 시작했다. 늘 야외에서 골프와 테니스를 치는 탓에 태양에 피부를 그을려 까맣고 꾀죄죄한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초조하면서도 화가 나 보였다.


“아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학인이 시치미를 떼자 까만 점이 박힌 그의 커다란 코 옆의 팔자주름이 깊어졌다.


“그럼 지금 연락도 안 하고?”


“네. 재혁 씨랑은 원래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하자."


강 실장은 마치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나무토막처럼 각진 자신의 주먹으로 가볍게 책상을 한 번 내리 치고는 얕은 숨을 후 하고 내뱉었다.


"여기서 솔직하게 말하면 네 징계는 없던 거로 해주마. 수습 끝나자마자 이런 식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건 앞으로 네 회사생활에 치명타야. 어차피 겁대가리 없는 니 동기 새끼는 잘릴 테고. 내가 굳이 따로 손을 쓰지 않아도 원장님께 보고 한 번이면 그냥 처리될 일이라고. 무슨 말인지 알아? 회사는 무슨 학교에 있는 애새끼들 마냥 품어주고 용서해주는 곳이 아니야! 그러니까 동기 보호한답시고 괜한 정의감에 함구하지 말고 빨리 털어놔. 죄책감 느낄 필요 전혀 없다니까? 너는 너의 삶을 사는 거고 걔는 걔의 삶을 사는 거야.”


간절함을 숨기지 못한 강 실장의 목소리는 공기가 과도하게 섞여 파르르 떨리기도 하고 이리저리 음계를 넘나들기도 했다. 학인이 계속 뜸을 들일 수록 강 실장은 더욱 애가 탔다.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한 강 실장이 과거 정윤에게 한 것처럼 똑같이 윽박지르려던 바로 그 순간에, 어쩐지 다급하게 느껴지는 반 박자 빠른 노크소리와 동시에 실장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실장님, 마음대로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 2시 5분에 뜬 인터넷 기사 좀 보셔야 될 것 같습니다."


에이 시발! 진짜 그 개새끼가!”


강 실장은 신명호 대리의 보고를 듣자마자 온 힘을 다해 욕설을 퍼부었다. 이윽고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고는 책상 위에 있던 모니터를 라켓으로 단련된 두툼한 손바닥으로 후려갈겼다. 충격으로 모니터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면서 플라스틱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말았다.


"진학인……. 너는 일단 이따가 다시 보자. 신 대리 네 자리에 기사 띄워놨지? 앞장서! 아아, 어디 언론사야? 일단 당장 그 기자 새끼한테 먼저 전화 연결해서 내리라고 해!"


***


강 실장의 욕설에 관한 기사는 삽시간에 퍼져나가면서 전화기 소리가 사무실 이곳저곳에서 울려댔다. 수화기를 받는 족족 여러 기자들의 문의가 쇄도했다. 그들은 올해 노동부에서 중점 사업으로 두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직장 내 갑질 근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타이밍 좋게 공공기관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이란 어떤 방식으로든 엮어서 자극적인 기사로 반죽하기에 더할 나위 없었기에 너도나도 득달같이 달려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하이에나들의 사냥에 진절머리가 난 직원들은 처음에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항으로 내부적으로 확인 후 공식 의견을 내놓겠다’라는 멘트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다가 나중에는 그냥 전화기 선을 뽑아버렸다.


강 실장은 다소 복잡한 심정으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벽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삐질삐질 땀을 흘리고 있었다.


앙금.


분노는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가셨는데 그 순간의 화가 만들어낸 잔여물은 여전히 바닥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거미줄처럼 액정이 깨져 있는 모니터를 집어 들었다. 밖에서 간간히 들리는 전화벨 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몸 안에 감정을 나타내는 풍선이 있고 외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 풍선을 계속 키워내는 기분이었다. 마치 학창 시절 도내 청소년 테니스 대회에 참가했을 때와 비슷했다. 걱정으로 정신이 멍하고, 영혼이 몸을 떠난 느낌. 재수 없게 또라이 한 놈을 만나 지금껏 공들인 탑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도 있다는 걱정. 이 진한 염려가 전 날 먹고 아직 입에 남은 파의 잔향처럼 도무지 가시질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동안 애면글면해온 시간들이 하나 둘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하고 몇 년 간 집 근처 학교들의 체험학습 강사로 전전하던 30대의 어느 날, 테니스 협회를 통해 흥미로운 제의가 들어왔다. 한 공공기관에서 계약직으로 이른 오전과 저녁, 두 타임용 계약직을 채용한다는 제의였다. 더 이상 테니스와 관련된 직업은 꼴도 보기 싫었지만 할 줄 아는 건 연두색 털북숭이 공을 치는 것뿐이었다. 그는 우선적으로 가능한 한 불안정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곧장 협회로 전화를 걸었고 얼떨결에 평생 자신과는 관련이 없을 줄 알았던 '회사'라는 곳의 울타리를 넘게 되었다. 그게 이 여정의 시작이었다.

   

일을 시작하면서 그가 관찰한 직장인들은 늘 업무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보통 그 탈출구라 하면 음주 아니면 운동이었는데 의외로 높은 직급에 위치한 사람들이 골프와 함께 테니스를 즐겼다. 덕분에 그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사권을 쥘만한 사람들과 친분을 돈독히 할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얻었다. 2년간 그들과 함께 공을 때리면서 지역 생활체육 대회도 출전했다. 경기가 끝나면 요염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을 한 명씩 끼고 찐한 노래와 술을 우승컵에 담아 잔을 부딪혔다. 그렇게 그의 인생은 점점 그들의 영역으로 동질화되었다. 아니, 그렇게 되는 듯했다.


그러다 97년에 IMF가 터졌다. 정규직들도 잘리는 마당에 소위 '오락용 보직'에 있는 사람은 고려할 가치도 없던 시기였다. 그때 그는 국장을 찾아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릎을 꿇으려 했다. 처자식을 들먹이며 비굴하게 굴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에, '연두색 공'으로 맺어진 나이 많은 친구들이 그를 구제해주었다. 다른 보직으로 전환하여 재 채용해준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회사에 발만 살짝 담근 '테니스인'에서 진정한 화이트 칼라 '직장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인생에 어떤 확신에 차게 되었다. '접대로 완성된 인맥만큼 확실한 생존수단은 없다'라는 철학이 굳어졌다.                     


'그래. 그래도 혼자 죽을 수는 없지. 내가 아무리 지금 이 순간에 궁지에 몰려 비난을 받는다 해도 난 살아남을 수 있어. 97년에도 살아남은 게 이 강신우라고. 일단 징계를 피하진 못해도 반드시 그 새끼 하나만큼은 자르겠어. 그래야 그 미친놈이 사회가 얼마나 피눈물 나는 곳인지 알게 되겠지.'

 

어쩐지 고요한 사무실에서 자신의 과거를 파노라마로 만들어 훑어보던 그는 인터폰으로 신명호 대리를 부르려다 그의 인터폰이 먹통임을 알고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 난데. 원장님께 보고 드려서 징계 위원회를 좀 열어야겠어. 하던 일 끝나면 잠깐 내 방으로 와봐."


앙갚음을  생각에 그의 뱃속 깊은 곳에서 희열이 치솟았다. 하지만 감정에 잠식당하면 잘될 일도 그르치는 . 수백 번의 시합을 통해 얻은 교훈이었다. 그가 다시 평정심을 찾으려 심호흡을   문득 휴대폰이 울리며 그의 명상을 방해했다.


차를 빼 달라고? 뭔 소리야 도대체? 제대로 주차했을 텐데 뭔 놈의 차를 빼 달래?”


문자를 보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는 문득 지금 자신이 과도하게 예민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강 실장은 미처 못 끝낸 명상을 시작하기 위해 다시 한번 폐를 부풀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나 한 번 흐트러진 집중력은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청심환. 나간 김에 환이라도 하나 사다 먹어야겠어.'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차 키를 들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기사 때문일까? 건물 내에서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꼭 비난의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며 수군대는 것만 같았다. 그는 문 바로 앞에서 대기하다가 부산스럽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는 잔망스러운 잰걸음으로 자신의 차가 주차된 곳까지 빠르게 이동했다. 그런데 그가 아끼는 검은색 대형 세단은 주차 라인에 맞추어 제대로 주차되어 있었고 오히려 어떤 고급 외제차 한 대가 그 바로 앞에 서서 차로를 완전히 가로막고 있었다.


이게 뭐야? 이건 내 차를 뺄 상황이 아니잖아? 어떤 개념 없는 새끼가 이딴 식으로 주차를 해놨어! 얼레? 시동도 켜놨네?”


그가 씩씩거리며 문제의 차의 연락처를 찾으려 차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선탠이 짙은 차량 문이 기다렸다는 듯이 덜컥 열리더니 덩치가 큰 사내가 내렸다.


“참 신기하게 이런 건 또 개념 없는 행동인 지 잘 아시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얼굴을 돌려 차주를 확인한 강 실장의 눈이 점점 커졌다. 명품 선글라스에 세련된 정장을 입고 차에서 내린 사내는 다름 아닌 재혁이었다.


“너, 너 뭐야? 이거 네 차야? 아니 그건 상관없고. 지금 갑자기 나타나서 뭐 하는 거야? 나랑 장난하냐? 그 기사는 또 뭐고? 한 가정의 가장인 사람의 인생 망치려고 작정했어? 어? 너 이 새끼야! 내가 너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너 자를 거야. 내 말 알아들어?”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흥분한 강 실장은 재혁의 멱살을 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재혁이 언짢은 표정으로 강 실장의 팔을 꽉 붙잡았다. 서로 힘이 비등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 하나 밀리지 않고 계속 같은 자리에 서있었다.


“누가 누굴 고소를 한다고요? 녹음 파일도 처음에 욕하는 거 겨우 10초밖에 안 풀었는데 벌써부터 멘탈이 흔들리면 어떡합니까? 데일리페이퍼 제일 처음 나간 기사 타이틀 읽어봤어요? '신입사원한테 쌍욕 하는 공공기관의 상사!' 굉장히 순한 맛으로 나갔잖아요? 요즘도 이런 회사가 있는지 생각보다 이슈가 안돼서 나는 아쉬웠는데. 그래서 좀 더 괴롭혀 볼까 생각 중인데, 어떠세요? 예를 들어 당신이 여태껏 뭔 부당한 일을 저질렀고 자기 원하는 대로 안 될 때마다 직원들을 막대하는 쓰레기였다는 걸 2차로 몽땅 밝히면 어떻게 될까요? 소문 듣자 하니 부처 예산도 위조 증빙 만들어서 개인 용품 구매하고 회식 때는 건배하는 척하면서 슬쩍 어린 여직원 만지는 더러운 성희롱도 좀 하신 거 같던데?”


재혁의 협박에 강 실장은 현실적으로 자신이 놓인 상황을 파악한 듯 잡은 멱살을 놓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소란으로 근처를 지나치던 행인들이 하나둘씩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회사에서 상사랑 부하 간에 그 정도 융통성도 없냐? 가는 길에 태워달라고 한 게 그렇게 아니꼽냐? 나 땐 인마 매일 회사 선배들 차로 태워 다니고 술 먹고도 대리하고 그랬어! 그리고 성희롱? 너 이 새끼야 증거 있어? 그렇게 따지면 그냥 한 번 악수하고 그런 것도 성희롱이냐?”


“정말 아직도 뭐가 문제의 본질인지도 모르시네. 당신 생각과 상관없이 상대방이 거부감들만 한 상황은 당연히 하질 말아야죠. 그리고 미세하게 본인 유리한 쪽으로 상황 바꿔서 말 바꾸는 거 같은데, 내가 만약 이 회사 말고 다른 어떤 대안이나 선택권도 없는 불쌍한 인생이었다면 나는 계속 불합리한 일들을 스트레스받으며 참아야 했을 때고, 결국 오늘 기사의 주인공은 당신이 아니라 내가 되어 있었겠죠. '또라이 직장 상사에 시달린 신입 사원 결국 극단적 선택' 뭐, 이런 제목으로. 아무튼 그럼 원본 음성 파일부터 풀어서 하나둘씩 다시 기사 낼 테니까 한 번 잘 막아 보세요."


"어린 새끼가 영악해가지고… 야! 너 원하는 게 뭐야? 그렇게 좋은 차 어디서 빌려가지고 재벌 인척 연기라도 하면 내가 무서울까 봐? 네가 무슨 삼성 이재용 아들이야? 합의금 얼마면 돼? 한 100만 원 주면 그거 원본 지우고 조용히 입 다물래?"


턱을 치켜들고 가슴을 펴서 최대한 거만한 자세를 유지한 강 실장은 재혁의 폭로에 한 풀 꺾이기는커녕, 자신의 지갑을 꺼내서 오만 원짜리 지폐를 세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열 장쯤 세었을 때 '아 씨, 모자라네'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앞에서 그 모습을 관찰하던 재혁은 박장대소를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낮고 큰 목소리가 주차장에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강 실장은 도무지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를 몰라서 이내 하던 일을 멈추고 멀뚱멀뚱 서 있었다.

 

"100만 원이요? 아 또 실장님이 끝까지 큰 웃음 주시네. 그런 거 필요 없다고요. 이거 내 차 맞고, 재벌은 아니지만 운 좋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돈도 많아요. 흔히 한국에서 말하는 Gold Spoon! 금수저라고요."


재혁이 부처님 상처럼 아주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재킷 주머니에서 자신의 명품 지갑을 꺼내서 열어보였고 그 안에는 수표가 가득했다. 그걸 본 강 실장은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밀어 넣었다. 


"이제 조용하네. 내가 당신한테 요구하는 건 딱 하나입니다. 앞으로 직원들 괴롭히거나 부려먹지 마시고 평생 회개하는 마음으로 퇴직할 때까지 착하게 산다고 약속하면 내가 선처하죠. 아니면 녹음한 거 바로 전국 방송국에 회사 이름하고 당신 이름, 직책, 사진까지 모조리 첨부해서 보낼 테니까."


"그래, 내가 미안하다."


"그리고 이거.”


재혁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어 정중히 건넸다.


"이게 뭐야?"


“원래는 돌아가서 나 엿 먹일 작정이었죠? 내 사직서예요. 빠른 수리 좀 부탁합니다. 역시 회사는 내 체질에 안 맞는 거 같네요. 아참, 그리고. 남한테 차 지적하기 전에 본인 차나 좀 바꾸세요. 그 나이 먹고 이게 뭡니까?”


강 실장은 자신은 평생 일을 해도 살 수 없는 고급차를 타고 사라지는 재혁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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