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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선 Oct 22. 2021

#17. 선입견이 만들어 낸 무조건적인 불신



정윤은 3월부터 짧은 일기를 썼다. 원래도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하소연할 사람이 없어 대체제를 찾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간호사가 흘리고 간 플라스틱 볼펜을 끄적이게 되었다. 첫 집필의 시작은 병실에 앉아 우연히 눈에 띈 처방전 종이였다. 피부병에 걸린 길고양이처럼 눈썹이 다 빠진 엄마의 숨소리는 조금씩 약해졌고 틈만 나면 기침을 해댔다. 이럴 때면 한 번쯤 괜찮냐고 묻고 싶었지만 호흡기를 달고 있는 엄마가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명백히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머리로 현실을 부정할 뿐이었다. 곁눈질로 송장처럼 누워 있는 병약한 엄마의 얼굴을 보자 수많은 종류의 약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바스락 거리는 종이를 뒤집어 오른쪽 모퉁이에 써 내려간 하루 일과는 완성되고 보니 한숙자 과장의 비방글이 되고 말았다. 그 짧은 몰입의 순간에, 정윤은 작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 후부터 기록은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 병원에 올 때면 한숙자 과장이 자신에게 얼마나 차별적이고 몰상식한 수준의 행동을 했는지 처방전 종이가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하게 채워질 때까지 적고 또 적었다.


병원 뒤쪽 동산에 우거진 소나무 한 그루에서 배고픈 까마귀가 까악까악 울었다. 정윤은 괜스레 커튼을 쳐서 병실의 모습을 감췄다. 개원하고 한 번도 세탁하지 않은 듯한 면섬유가 뽀얀 먼지가 일으켰다. 콜록콜록, 두세 번 기침이 나왔다. 알레르기에 반응한 코에서 멀건 콧물을 뽑아냈다. 정윤은 아주 간절하게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게 병원이든 회사든 말이다. 언젠가 기적이 일어나 엄마가 건강해지는 날이 온다면, 정윤은 가슴에 품었던 사직서를 꺼낼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춤을 추지 않으면 도저히 못 배길 정도로 경쾌한 음악이 흐르는 웨스턴 바를 차리리라. 돈은 많이 벌지 않아도 상관없다. 돈이 없으면 손님이 먹다 남긴 술과 안주로라도 끼니를 때우면 되니까. 다만 즐겁게 살 것이다. 행복하게 살 것이다. 매일같이 적당히 오른 취기를 유지하며 오늘만을 위해 살 것이다. 그것이 피폐한 정윤의 삶에 자투리로 남은 소박한 꿈이었다.


***


일자리지원팀은 새로운 일감으로 분주했다. 곧 다가올 여름 방학 시즌에 맞춰 대학교와 지역 중소기업을 연계하는 대규모 채용 박람회 사업을 진행 중이었다. 팀장으로서의 첫 사업인 만큼 한숙자 팀장은 평소보다 더욱 예민하고 까탈스럽게 굴었다. 실적 또 실적. 요즘 한숙자 팀장을 보면 패션쇼의 모델을 보는 것 같았다. 예전보다 더 고가의 옷을 입고 출근하는 한숙자 팀장은 계획을 세우기도 전부터 실적을 강조하며 떽떽거렸다.


"다들, 회의실로 이동.”


퇴근 30분 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한숙자 팀장이 직원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아… 팀장님, 저는 공모전 사업 끝난 거 결과보고 때문에 지금 좀 바쁜데요."


웬일로 남경필 과장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지금 회의실에 들어간다면 퇴근 시간 전에 나오는 것은 어림도 없다는 것을. 이번 주 3일을 연달아 야근한 터였고 오늘만큼은 피하고 싶다는 소심한 내면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과장님, 미안한데 예외는 없어요. 신규 사업이 더 중요해. 뭔 말인지 이해했죠?"


한숙자 팀장은 블라우스 중앙에 길게 늘어진 끈을 검지 손가락으로 뱅뱅 돌리며 야속하게 돌아섰다. 남경필 과장은 건너편의 정윤과 눈을 마주하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던 정윤은 문득 자신을 향한 남경필 과장의 태도가 전보다 상냥해졌다고 생각했다. 그 사소한 친절이 고독한 정윤에겐 나름 감격이어서 마치 십여 년 전에 집을 나간 오빠라도 발견한 기분이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머쓱하게 미소를 짓고 서둘러 회의실로 향했다. 몇 개월 만에 회사에서 짓는 웃음이었을까?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느덧 낮의 수명은 길어졌고 굵은 한 줄기의 태양빛이 통창을 꿰뚫고 들어와 그림자를 길게 늘어트렸다. 아직 에어컨을 틀지 않은 회의실 안은 덥고 답답했다. 주황빛 일광을 조명 삼아 창가에서 팔짱을 끼고 무게를 잡던 한숙자 팀장은 총총걸음으로 들어온 남경필 과장이 문을 닫자 회의를 시작했다.


“자, 뭐 때문에 불렀냐면.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우리가 요번 사업에서 좋은 실적을 내려면 기업들이 그래도 수준 높은, 그러니까 복지나 연봉 수준이 대학생들의 눈높이에 맞는 기업들을 반드시 참가시켜야 돼. 근데 그 기업들을 끌어오기 위한 대책이 부실해. 다들 뭔 말인지 알지?”


상사의 안건을 확인한 직원들이 어리둥절하며 서로를 번갈아보며 쳐다보았다. 이튿날 저녁, 차갑게 식어버린 도시락을 먹으며 나눈 주제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 그 이유였다. 원래 회사에서 생산성 없는 회의는 큰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무언가 노력을 쏟고 있다는 측면에서 개인의 불안감을 덜어주는 기능을 지닌다. 효과가 없는 위약을 먹었을 때 호전을 보이는 플라시보 효과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한숙자 팀장의 업무 방식도 이 구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딱히 토론할 건더기가 없어도 무의미한 회의를 통해 지속적으로 심적 위안을 얻고자 했다.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은 애꿎은 직원들에게 돌아갔다.


“어휴 팀장님, 어차피 리스트에 나와 있는 기업들은... 어제 협조 공문 보냈고,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인지도가 있는 제조업인 경우는... 차주부터 개별 컨택하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참여율 결과가 나오고... 그다음 단계면 모를까... 구태여 당장 방안을 추가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요.”


남경필 과장이 현란하게 펜을 돌리며 소심하게 반발했다. 정곡을 찔린 한 팀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맞습니다, 팀장님. 여기서 이러기보다는 며칠 뒤에 반응 보고 대응하시는 게... 곧 퇴근인데, 헤헤.”


윤수정 사원도 조심스럽게 맞장구쳤다.


“그러다가 만약 모집 안 되면? 너네가 책임 질 거야? 질 거냐고? 얘네들은 뭘 믿고 이렇게 태평한 거야 도대체?”


직원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자 한 팀장은 불안한 속내를 숨기지 못하고 아예 막무가내로 떼를 쓰기 시작했다.


“위잉, 위잉......”


회의실 안에 느닷없이 진동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팀원들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숙여 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더듬는 모양새가 꽤나 다급한 것이 학교에서 몰래 휴대폰을 가져왔다가 적발된 학생들 같았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확인한 몇몇 직원들은 마치 나는 범인이 아니었다는 듯 당당히 테이블에 휴대폰을 꺼내 두었다.


“전화 좀 끄자?”


한숙자 팀장이 거슬린다는 듯 전방에 삿대질을 하며 주의를 주었다. 다행히 한 번은 그냥 넘어갔다. 다만 이마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인상을 잔뜩 쓴 것을 보니 좀 전의 반발로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금방 진동소리가 사그라들자 한숙자 팀장은 긴 인조 속눈썹을 붙인 눈을 부자연스럽게 깜빡거리며 다시금 초조함을 드러냈다.


“그리고... 아! 박람회 동안 면접 볼 대학생들은? 체크했어? 그날 이사장님도 오셔. 요즘 애들 눈도 높아졌는데 숫자만 채우는 중소기업들만 꽉 찬 박람회장이면 부스에 파리만 날릴 수도 있다고. 그럼 기업 대표들은 또 반발할 거고! 그때 어떡할 건지 한 번 생각해봐야……”


위잉 하는 진동소리가 또 한 차례 울렸다. 한숙자 팀장이 한 번 더 참기에는 인내심이 부족했다. 아니나 다를까 필러를 맞아 부자연스럽게 툭 튀어나온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 정말. 내가 회의 시간에 휴대폰 다 끄라고 분명히 말했지? 아직도 내 회의 때 휴대폰 켜 두는 사람이 있어? 에티켓 몰라? 영화 볼 때도 끄는 휴대폰을 회의할 때는 무슨 생각으로 안 끄고 들어오는 건데? 누구야. 누구 핸드폰이야?”


구태여 범인을 색출해내기 위해 닦달할 필요도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던 정윤이 엉겁결에 신내림을 받은 무당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주변에 있던 윤수정 사원이 기함하듯 놀랐다.


“이정윤, 또 너야? 솔직히 말해 봐. 너 나 스트레스받게 해서 죽이려고 그러는......”


“죄송합니다, 팀장님. 저, 잠시 전화 좀 받으면 안 될까요? 엄마가...”


정윤이 한 팀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끼어들었다.


휴대폰을 쥐고 있는 정윤의 표정에서 불안한 기색이 떠나질 않았다. 마치 초자연적인 감각으로 인해 감지한 불안한 예측에 사로잡힌 노파처럼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웃기지 마. 이게 또 퇴근 시간 되니까 도망가려고 어디서 거짓말을 해? 한두 번이야? 너 그 전화받기만 해 봐. 진짜 우리 팀에서 네 자리 없어지는 줄 알아.”


평소에 으르렁 거리던 한숙자 팀장은 더 이상 소리치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냉랭한 목소리로 정윤을 압박했다. 언성을 높이지 않고 내리깐 목소리와 강렬한 시선만으로 아랫사람을 심복 시킨다. 이것이 한숙자란 사람이 생각하는 팀장의 품격이었다.


웬일인지 정윤도 물러서지 않았다. 두 사람의 눈싸움이 몇 초간 이어졌다.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세 번째 진동이 울렸다. 다음 라운드의 시작을 알리는 복싱 경기의 종소리처럼 이번엔 한숙자 팀장이 먼저 움직였다. 저돌적인 보폭으로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를 내며 얼이 빠진 정윤의 앞으로 다가온 한숙자 팀장은 억지로 정윤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낚아채려 했다.


“내놔!”


한 팀장은 점점 광기로 치닫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 사이에서 작은 몸싸움이 일었다.


“아이 참, 팀장님 진정하세요...”


모기 같이 앵앵거리는 남 과장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파도에 뒤엉킨 해초처럼 얽혀있는 두 사람을 중재하지 못했다.


어정쩡하게 물어선 남경필 과장의 만류에도 한 팀장은 기어코 정윤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냈다. 그리고 온 힘을 다 해서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쿠당탕 소리와 함께 검은 물건 하나가 바닥에서 몇 차례 구르다 화이트보드 지지대와 부딪혔다. 회의실 안의 모두가 일제히 비명소리를 질렀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누구 하나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오직 정윤과 한숙자 팀장의 거친 숨소리만이 적나라하게 겉돌았다.


“다들, 회의에 방해하는 행동… 아니, 남에게 피해 주는 행동들 조심하자.”


약간의 이성을 되찾은 한숙자 팀장이 머쓱해하며 찰랑거리는 자신의 머리를 정돈할 때 신명호 대리가 허겁지겁 뛰어와서 팽팽해진 긴장의 끈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회의실 안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을 열고 들어선 그에게 쏠렸다. 웬일인지 늘 평온했던 신명호 대리의 얼굴에는 미소가 증발하고 절망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이렇다 할 설명 없이 다급히 정윤을 불렀다.


“정윤 씨! 왜 전화 안 받아요! 나와요! 지금. 빨리!"


정윤이 무슨 일인지 이미 다 아는 사람처럼 서둘러 회의실을 나서려 하자 한숙자 팀장이 테이블과 화이트보드 사이로 한 발자국 움직여 길을 막아섰다.


"넌 허락도 안 받고 어딜 가려고? 그리고 뭐야! 신 대리. 우리 지금 회의 중인 거 안 보......”


정윤의 어설프게 날린 주먹이 한숙자 팀장의 얼굴에 꽂혔다. 한숙자 팀장은 하려던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지르며 엽총에 배가 뚫린 수꿩처럼 고꾸라졌다. 청색 카펫 바닥에 나동그라진 그녀는 계속 아이고아이고 하며 탄식을 했다. 늘 말끔했던 얼굴이 코피로 지저분하게 얼룩져 있었다. 윤수정 사원이 경기를 일으키며 재빠르게 일어나 팀장을 부축했다.


정윤은 뒷 상황은 보지도 않고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내달렸다. 두근두근 심장이 빠르고 강하게 뛰었다. 좀 전의 충격으로 중지와 약지가 욱신거렸지만 전신을 지배한 긴장감에 마취가 되어 고통을 느끼진 못했다.


"정윤 씨, 이쪽으로! 제 차로 가요!"


어느새 뒤따라온 신명호 대리가 어깨너머로 떨어트린 안경을 전해주며 소리쳤다. 정윤은 앞서가는 신명호 대리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건물 내부에서 사람이 뛰어다니는 모습은 소방대피훈련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흔하지 않았다. 직원들은 도로 위의 멧돼지를 보듯 잔상처럼 지나치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리가 긴 신명호 대리의 달리기가 평균 남성에 비해 빠른 속도임에도 정윤은 의외로 뒤처지지 않았다. 신체 어디선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듯했다. 숨도 차지 않았다. 숨이 차고 싶었다. 정윤은 허파에 일말의 공간도 없을 정도로 더 세게 달렸다. 겨우 이 정도로 숨이 차선 안됐다. 엄마는 적어도 이것보다는 백배는 숨이 찰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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