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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선 Oct 24. 2021

#19. 떠나는 세 사람 중 - (3)



일요일 오전. 정윤은 이제는 유품이 되어 버린 엄마의 물건들을 챙기기 위해 택시를 타고 요양 병원을 향했다. 하필 건물을 산비탈 바로 아래 택지에 축조하여 온통 오르막 길에 밤이 되면 음침한 곳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이 병원을 선택한 이유였다.


‘가성비 인생.’


옷도, 음식도, 하물며 엄마 병원에 장례식 까지……. 정윤은 자신의 소비 결정에 가장 최우선으로 따지는 요소가 ‘가격 대비 효용이 큰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가격은 싸고 만족도는 높아야 했다. 혹자는 알뜰하고 현명하다 칭찬해줄지 언정 정윤은 자신의 머릿속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이 궁상맞음이 지긋지긋했다.


“내 차는 오래돼서 저기까지 잘못 올라갔다간 차가 퍼져요. 여기서 내려 드릴 게, 7천 원 만 주셔.”


택시 기사가 요금에서 백 원 단위를 절사 하며 선심 쓰듯 말했다. 그는 오는 동안에도 자신의 애마가 언덕을 오르면서 부릉부릉 허덕이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데 병원을 지어놨냐고 구시렁거렸다. 체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정윤 역시 언덕을 오르기 시작한 지 1분도 안 돼서 굉음에 가까운 구형 세단의 엔진 소리처럼 숨이 거칠어졌다. 간신히 욱신거리는 종아리와 허벅지를 달래며 그리 넓지 않은 지상 주차장에 다다랐을 때쯤, 이파리가 듬성듬성한 소나무 가지에 자릴 잡은 까마귀가 또 까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옛말처럼 까만 새를 보면 정말 재수가 없었다. 정윤은 불현듯 엄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도 들렸던 까마귀 울음소리를 기억해냈다.


정윤은 부르튼 입술을 모아 결이 거친 숨을 뱉어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원래는 텅 빈 집보다도 더 익숙했던 이곳이 웬일로 낯설게 느껴졌다. 주차장의 서쪽으로는 낮은 울타리를 너머 도심의 전경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엄마가 처음 요양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러니까 엄마가 아직은 누구의 도움 없이 화장실을 가고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 때, 조금 멀어도 풍경이 마음에 든다며 기뻐했었다. 하지만 엄마가 배정받은 병실은 전경의 반대쪽이었기에 창문으로 볼 수 있는 그림이라곤 아직 토지공사가 덜 되어  흙투성이인 소형 굴삭기와 비탈에 듬성듬성 박혀있는 잡초들이 전부였다. 정윤은 잡히지 않을 것 같은 과거를 회상하며 씁쓸한 마음으로 시선을 위로 올렸다. 청명한 하늘은 어디 가고 미세먼지로 뿌연 게 칙칙하고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초록 이끼로 가득한 바위 표면에 맺힌 습기처럼 안구가 흐려지는 찰나에 느닷없이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이정윤 주임 휴대폰 맞나요?>


몇 번 들어본 목소리였지만 정윤은 누군지 기억나지 않았다.


“네, 누구세요?”


<아, 나 박상호 이사장입니다. 어머니 장례는 잘 치렀습니까?>


정윤은 코가 벌렁거릴 정도로 깜짝 놀랐다. 아무리 형식적인 안부 치례 일지라도 이사장이 직접 연락을 주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 네, 네. 이사장 님. 챙겨주셔서 잘 치렀습니다.”


정윤은 신명호 대리를 통해 이사장의 조의금을 전달받았었다. 회사에서 쓰는 전용 봉투에서 0이 무려 6개나 붙어있는 수표 한 장이 꽤나 강렬해서 잊을 수가 없었지만 동시에 께름칙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닙니다. 내가 조직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직접 갔어야 했는데, 대구에 사는 친구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원래 이 나이쯤 되면 이렇게 계절이 바뀌는 시점마다 부고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오더라고요.>


“아니요, 아닙니다. 바쁘실 텐데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정윤 주임이 참 착해요. 그렇게 말해주니까 내 마음이 편하군요. 고마워요. 아무쪼록 잘 마무리 지었다니 다행이네요. 하느님이 인도해주셔서 어머니도 분명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적이 이어졌다.  사람 모두 15초가 넘도록 함구했지만 전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마치 다음 대화의 주제가 어떤 걸로 이어질  알고 있으면서도 먼저 꺼내기는 부담스러워하는 긴장감이 흘렀. 그러다 결국 이사장의 얇은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먼저 공허한 영역을 다시 뒤집기 시작했다.


<크흠! 저기… 안 좋은 일로 마음 추스를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이게 좀 중요한 사안이라서 내가 염치 불고하고 연락을 했어요. 사실 이런 거는 내가 직접 나설 일이 아닙니다만, 이 주임도 잘 아는 것처럼 요즘 회사가 굉장히 어수선했잖아요? 내가 부임하고 자꾸 외부로 안 좋은 얘기들이 전해지니까 책임자로서 내 입장도 많이 난처해서 말이에요. 그래서 직접 전화한 겁니다.>


“아, 네, 말씀하세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이정윤 주임. 혹시 일자리지원팀 한숙자 팀장이랑 문제가 있었습니까?>


질문을 던지는 이사장의 목소리에 분명히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정윤은 반색했다. 말단인 정윤의 입장에서 중간에 누군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이사장에게 한숙자 팀장의 만행을 보고할 수 있다는 것은 최고의 행운이었다. 순진한 정윤은 하얀 눈밭의 도토리를 발견한 다람쥐처럼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저 달가워했다. 그녀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세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꽁꽁 쟁여놨던 과거를 끄집어내기 시작하자 끝없이 이어졌다. 마치 막아놨던 둑을 열자 세차게 쏟아져 나오는 강물 같았다. 그 더럽고 뿌연 물길에는 한 팀장이 한수정 사원과 매일같이 자신을 험담한 것, 팀 내에서 따돌리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 정시 퇴근을 못하도록 퇴근 직전 일부러 과도하게 업무를 부여한 것, 질책할 때도 일부러 팀원들 앞에 세워놓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 것, 사적인 심부름을 시킨 것 등이 녹아 있었다.


“……한숙자 팀장은 일방적으로 불합리한 지시와 상습적으로 저를 모욕하는 행동을 해왔습니다.”


정윤의 긴 이야기를 들은 이사장은 말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입술을 꽉 다문 바람에 코를 타고 넘어온 바람이었고 그 세기가 너무 강해서 스피커가 지지직 거릴 정도였다.


<한숙자 팀장이 우리 이 주임을 아주 힘들게 했군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중 몇 개는 말이죠… 아무래도 각자의 입장에서만 조명하다 보니까 약간의 입장 차이를 보이는 거 같긴 합니다. 아! 참, 참. 내 정신 좀 봐. 사실 내가 며칠 전에 한 팀장하고 먼저 이야기를 나눠 봤어요. 어떤 상황인지는 좀 제대로 알아야 하고 또 양측의 말을 모두 들어봐야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날 한 팀장이 말미에 그러더군요. 자신이 부족해서 부하직원을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한 것 같다고…….>



“입장 차이요? 제 말에 한 치의 과장이나 거짓이 없다는 걸 맹세할 수 있어요. 그 여자는 분명히 이사장님에게 잘 보이려고 꾀를 내어 거짓말을 한 겁니다. 어떤 바보가 불이익을 줄 수도 있는 자신의 상사에게 ‘나 잘못했습니다’하고 고하겠어요?"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정윤의 목소리가 처음보다 격앙되었지만 오히려 더 힘을 주어 말을 계속했다.


"더군다나! 한숙자 팀장은 절대로 그런 반성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진짜 이 정도로 말종인 인간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 하필 저희 회사라는 게 큰 충격이었다고요. 얼마나 구제불능인지 궁금하시죠? 돌아가신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계시다는 제 말을 정말 믿지 않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척한 것인진 모르겠지만 계속 병원도 못 가게…….”


<그래서, 회의실에서 홧김에 폭행을 한 건가요?>


갑자기 박상호 이사장의 어투가 냉소적으로 변했다. 정윤 역시 폭행이란 단어에 반응하여 높였던 언성을 낮추었다. 마치 두 사람의 위치가 순식간에 뒤바뀐 듯했다.


“그건…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았는데도 막무가내로 못 가게 막자, 저도 모르게 너무 화가 나서 우발적으로 한 행동이었습니다. 그건 명백히 제 잘못입니다만, 그 상황이었으면 어느 누구라도 그랬을……”


<아아! 그렇죠? 그러니까요! 분명 한숙자 팀장도 잘못한 게 있고… 우리 이 주임도 조금은 잘못한 게 있지 않습니까! 결국 사람 사이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항상 그 사건에 관여된 모든 사람이 함께 기여하는 법이죠. 물리학 배웠어요? '작용과 반작용 법칙' 알죠? 그럼, 이 해프닝은 결과적으로 쌍방이 되겠군요? 그렇지요?>


정윤은 이사장과 자신이 도달하려는 최종 목적지가 완벽하게 다르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가 구태여 말단 직원에게 직접 전화를 건 이유도 선한 천성에 고인을 추모한다거나 정윤을 도와주기 위함이 아니었고 그저 외부로 잡음이 새 나가지 않게 최대한 조용히 무마하기 위함이었다.


“이, 이사장님. 그건 정말 마, 말도 안 돼요! 온전히 제가 괴롭힘을 당한 거라고요!”


이사장의 결론이 너무 황당한 나머지 정윤은 말을 더듬었다. 정윤의 시퍼런 눈밑도 이 감정에 응하며 파르르 떨렸다. 


<이정윤 주임. 진정하고 잘 들어봐요. 올해 나이가 몇이죠? 이십 대 중반이었나요?>


이사장은 능수능란하게 주도권을 잡고 대화의 흐름을 이끌었다. 이를 아는 정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 이른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했군요. 우리 딸내미도 곧 대학을 졸업할 터인데… 곧 이정윤 주임처럼 사회에 뛰어들겠지요. 그 철없고 아기 같은 녀석이 무슨 일을 한다고 참! 아무리 생각해도 헛웃음밖에 나오질 않아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이 주임 역시… 아마 아직 세상에 무지한 걸 수도 있습니다. 이 조직 생활이라는 게 말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부당하다고 느끼는 일들이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는 꼭 부당한 일이 아닐 수도 있고, 또 내가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억울해도 부득이하게 참고 넘어가야 되는 경우가 허다하거든요? 나를 포함해서 지금 높은 자리에 올라온 사람들이 다 이 주임 하고 비슷한! 혹은 그것보다 훨씬 심한 모욕을 견디면서 버텨온 사람들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기성세대들의 말버릇을 풍자하기 위해 ‘라떼, 라떼’ 한다죠? 온갖 역경을 거친 우리 베이비 붐 세대들이 자신의 과거를 떠벌리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흔히 속된 말로 짬밥 좀 먹었다는 상사들이 개인적으로 기분 좀 상하게 했다고 해서, 자기 혼자 엄청난 피해자인 것처럼 구는 것이 정말 정상일까요? 요즘 젊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처럼 뭐든 나는 정상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 비정상이라는 식의 비뚤어진 마음가짐을 지니게 되면 지금처럼 원활한 조직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게…….”


정윤이 반박하려 했지만 이사장은 틈을 주지 않고 재빨리 말을 이었다.


<뭐! 솔직히 부하직원이라면 상사의 간단한 심부름도 가끔 할 수 있는 거고, 사회생활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집에서 엄마나 언니가 동생한테 심부름시키는 것처럼요. 한 팀장도 이 주임의 마음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방 맞고 나서 정신이 퍼뜩 든 거 같다면서 반성한다고 하더군요. 자신이 욱해서 폭행 신고한 것도 없던 일로 하겠다고… 내가 약속까지 받다 놨어요! 그래서 말인데…… 모친상 휴가 끝나고 다음 주에 서로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쌓인 게 있으면 내 앞에서 풀고! 앞으로 우리 조직의 발전을 위해서도 화해를 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해결방안이 아니겠는가…라고 나는 밤새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사장은 긴 연설을 끝내고 만족스럽다는 듯 허허 웃음소리를 흘렸다.


“지금 화해라고 하셨어요? 한숙자 팀장이 아무런 처벌도 없이 제가 그냥 넘어간다면 그동안 당한 일들이 부당하지 않았다는 걸 제 스스로 입증하는 꼴이라고요! 저는 절대로 그런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사장님.”


정윤은 거의 울분을 토하며 반발했다.


<어허, 이 주임. 내가 한 말이 잘 이해가 안 갔나? 그렇게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말해줬더니만! 원만하게 잘만 해결한다고 약속만 해주면 당연히 서로 불편할 테니까 내가 이 주임을 다른 부서로 발령 내리는 쪽으로…>


“잘못은 한숙자 팀장이 했는데 왜 제가 옮겨야 되나요? 회사에서 제대로 징계 내려주지 않으면 저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이사장은 몰랐지만 정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윤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헛기침을 내어 목을 가다듬었다.


<아니, 이 사람이 진짜! 좋게 좋게 말해주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네? 네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떡할 건데? 어? 그만둔 박재혁이 처럼 악의적인 기사라도 내려고? 참나! 그까짓 기사 하나 대응하는 거 일도 아니야. 그리고 네가 그딴 식으로 하면 나는 뭐 앉아서 눈만 깜빡거리고 당할 거 같아? 근무 태만, 품의 손상, 뭐 허위 사실 유포 등 갖다 붙일 수 있는 건 다 붙여서 너도 징계 때릴 줄 알아! 알았어? 그러니까 잘 생각해서 결정 내리라고!>


띠릭 전자음 소리와 함께 통화가 끊어졌다. 동시에 정윤은 주차장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중환자실에서 울었을 때와는 그 소리의 결이 조금 달랐다. 서럽게 목을 놓아 우는 쉰 목소리에는 어떤 억울함이 서려있었다. 그 분함이 건물 뒷산까지 전해졌고 이에 반응한 까마귀가 날갯짓을 했다. 까마귀는 한쪽 날개를 다친 듯 불편하게 몇 차례 푸드덕거리더니 추진력을 잃은 부메랑처럼 아래로 낙하했다. 솔방울이 널브러진 소나무 뿌리 근처로 추락한 까마귀가 힘없이 울음소리를 냈지만 정윤은 이를 듣지 못했다.


***


월요일 아침 여섯 시 반. 학인은 요즘 들어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잔다고 하더라도 지금처럼 새벽이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눈이 알람보다도 일찍 떠졌다. 스트레스 때문인가? 주말이 끝나는 일요일 밤이면 그의 눈에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불안한 눈망울처럼 두려움이 가득했다. 필시 유정과의 이별도 한 몫했으리라. 그 이후로 두 사람은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었다. 원래 아침이면 메시지가 오곤 했다. 주로 새벽에 기상하는 유정은 설정하지 않은 모닝콜처럼 늘 같은 시간에 자신의 기상을 알려왔다. 더 이상은 휴대폰에 표시되지 않는 애교 섞인 말투를 떠올리자 텅 빈 속이 뱃멀미라도 하듯 메슥거렸다. 그는 아침부터 밀려드는 씁쓸함을 되새김질하듯 곱씹다가 도망치듯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부엌에서부터 거실을 타고 풍겨오는 고소한 기름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학인의 엄마가 의심스러움이 섞인 어조로 물었다.


“얘, 너 요즘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니?”


“내가?”


학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시치미를 뗐다.


“뭔 ‘내가’야 ‘내가’는. 너 지금 몰골이 말이 아니야. 표정 좀 펴. 입꼬리도 늘어난 엿가락처럼 축 쳐진 게,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 같다니까? 혹시 유정이랑 안 좋니?”


“그런 거 아냐. 그냥… 회사가 좀 힘들어서 그래.”


“얘는! 그럼 회사 다니는 게 무슨 학교 다니는 것처럼 마냥 쉬운 줄만 알았어? 원래 다들 그렇게 사는 거야. 안 되겠다. 너 주말에 시간 좀 비워라. 진찰받고 보약이라도 지어서 맥이든 해야지…….”


식탁에 앉은 학인은 반찬 투정을 하는 어린아이처럼 젓가락으로 밥공기를 반복해서 쑤셔댔다. 철없는 아이처럼 그동안 회사에서 있었던 고충을 토로하며 포근한 엄마 품에 안겨 울고 싶었다. 그만두고 싶다, 때려치우고 싶다… 는 말을 목젖까지 바로 아래까지 끄집어냈다가 계란말이를 친히 숟가락에 올려주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간신히 삼켜냈다. 불현듯 과거 자신의 어리석은 다짐이 떠올랐던 것이다. 학인은 취직한 날 기뻐하며 자신으로 인해 행복해하는 엄마를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었다. 지금은 그런 자신의 결정이 지금 이 순간엔 후회스러웠다. 타인의 기대치에 부합하기 위한 대가가 자신의 영혼이 갉아 먹히는 것이었음을 미리 알았다면 그런 기세 등등한 영혼의 맹세 따윈 하지 않았을 텐데. 학인은 숟가락에 올린 계란말이를 한입에 밀어 넣고는 숟가락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출근시간은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회사에 도착해도 8시가 채 안 될 것 같았다. 첫 출근 때도 못했던 8시 출근을 거의 5개월이 지나서야 해내는 것이었다. 조금씩 여름의 공기를 자아내는 낮에 비해 아침 공기는 여전히 선선했다. 아스팔트가 희미하게 젖어있고 잔디밭으로부터 진한 풀냄새가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 밤사이 부슬비가 온 모양이었다. 버스정류장 뒤에 있는 하천에서는 작은 힘을 얻은 시냇물이 쫄쫄 흐르고 있었다. 힘없는 시선으로 주변 풍경을 훑는 사이 831번 버스가 도착했다. 올라타는 승객들의 수가 평소의 절반밖에 안 되었다. 


덜컹거리는 버스가 어색할 정도로 한산한 도로를 거쳐 마지막 정류장을 앞두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창밖으로 다소 이질감이 드는 회사 건물 앞 광경이 그의 시선을 빼앗았다. 학인은 썩은 동태 눈깔처럼 빛을 잃은 눈으로 더 자세히 관찰했다. 애매한 강수량으로 더욱 지저분해진 건물 전면의 우측 최상단에는 하얀 현수막 비슷한 것이 서쪽에서 불어오는 미약한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사람이 직접 먹과 붓을 이용해 만든 것처럼 보이는 조악한 작품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박상호 이사장과 한숙자 팀장을 고발한다. 말단 직원이 억울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죽음을 대가로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인가. 다음 생에는 부디 좋은 사람들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웅성거리는 버스가 다시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면서 수분에 번진 글씨가 조금씩 멀어졌다. 건물 앞 가로수를 이룬 플라타너스 나무 사이로 몰려 있는 행인들이 분주한 것이 스쳐 지나갔다. 반대편 차선에서 신호를 무시한 구급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위태롭게 유턴했다. 곧 버스가 정차했고 학인은 사이렌 소리가 울리는 방향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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