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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선 Sep 11. 2022

반려동물들에게 내리는 사형선고, 유기(遺棄)

우리 “아기”라면서요? 버리셨어요?



세상이 많이 변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동물은 주로 관찰과 호기심의 욕구를 해소할 유희의 대상에 불과했다. 예컨대 학교 정문 앞에서 병든 병아리를 500원에 팔았고, 문구점의 인형 뽑기 기계 안에서는 노랗게 염색한 햄스터들이 무자비하게 내려오는 집게를 피해 다녔다. 그때까지만 해도 ‘애완동물’이란 그저 ‘귀엽다’는 이유로 꽂히면 어느 순간 키우는 게 소유의 수순이었다.


방송에서 제작되는 관련 프로그램 역시 1차원적인 수준에 불과했다. 특정 동물들의 습성을 관찰(혹은 실험)하거나 독특한 행동 패턴을 가진 동물들을 발굴해서 시청자에게 전달해주는 정도.(문득 과거 K 방송사의 모 예능프로그램에서 고양이를 고층에서 떨어트린 후 최대 몇 미터 높이까지 몸통을 돌려 착지할 수 있는지를 확인한 실험이 떠오른다. 아무리 안전장치를 설치했다고 하더라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조금은 비윤리적이고 비상식적인 실험임이 분명하다. 당시 그걸 보고 자란 아이들이 훗날 동물을 대하는 방식에 어떤 악영향을 끼쳤을지를 상상하며 홀로 논리적 비약을 해본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동물은 더 이상 인간이 '관찰'만 하는 일방적인 대상이 아니다. 이제는 공존하기 위한 '케어(care)'의 대상으로 승격했다. 동물농장에 나온 천재견들의 재주를 보고 감탄만 하는 게 아니라 문제의 견공(犬公)들을 전문가가 분석하고 직접 교정한다. 마치 과거 문제 있는 영유아들의 행동을 교정하던 예능 프로그램인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처럼.

   

동물과 인간을 동일선 상에 두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실 우리가 현시점에서 <동물권>과 관련하여 어떤 변곡점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나 일부 MZ세대는 '생명 존중'이라는 표어 하에 단순히 개나 고양이뿐만 아니라 전체 동물들의 권리를 위해 다방면으로 활동한다. 단편적으로 유기 동물을 보호하고 불필요한 육류 소비를 줄이기도 하며 비인도적인 동물 학대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호소하는 등 동물권 신장에 발 벗고 앞장선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인간과 동물 사이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한층 가까워진 덕분일까? 실제로 요 몇 년 사이에 반려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생태 공원은 말할 것도 없고 저녁에 아파트 단지만 거닐어도 총총 걸어 다니는 견공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마주친 애견인들은 “애기는 이름이 뭐예요?”라고 물으며 네트워킹을 하고 정보를 공유한다.


펫티켓(Petiquette)도 자리를 잡은 듯하다. 산책 시 목줄은 기본이요 배설물을 담을 배변 봉투를 챙기는 것은 물론, 혹시 모를 돌발상황에 대비해 필수가 아닌 견종임에도 입마개를 착용한 대형견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동물을 대하는 관점이 바뀐 만큼 이에 따른 시민의식도 발전하면서 상향 평준화된 것이다.


그런데 왜 유기 동물의 수는 좀처럼 줄지 않을까?


출처 : https://www.dailyvet.co.kr/news/policy/147576


검역본부가 21년에 발표한 실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유기동물 수는 최근 5년을 기준으로 평균 10만 마리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이 중 40%가 재 입양되지 못하고 안락사나 질병으로 사망한 다고 하니, 매년 최소 4만 마리 이상의 동물들이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셈이다. 집계가 안되고 객사하는 수까지 더한다면 실로 작지 않은 숫자다. 실제로 몇 년간 전국 방방곡곡을 여행한 필자 역시 어느 지역을 가든 유기된 동물들을 너무 쉽게 마주친다는 걸 몸소 체감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하던 와중,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평소 이쪽에 관심이 많던 지인의 제안이었고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으로 호기롭게 받아들였다.


2주 후, 지인을 따라 지역의 한 유기보호센터를 찾아 방문했다. 입구와 가까워지자 곧바로 격한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 조심스레 발을 들이자 견사 밖으로 풀어져 있는 수 마리의 견공들이 다가와 이방인의 냄새를 맡는다. 약 스무 마리의 견공들이 거주하고 있다. 시설은 낡았어도 걱정과는 달리 전반적으로 정돈되어 있고 깔끔하다.


지역에 위치한 한 유기견보호센터. 근처에 또 다른 동물들이 유기되는 상황을 막고자 위치 노출을 꺼린다.


센터 관리자님의 간단한 브리핑 후에야 일거리가 생긴다. 우선적으로 밥통과 물통을 갈아준 뒤 배변을 치우고 견사를 청소하는 것이 우리의 주된 임무. 듬직한 견공들을 견뎌낼 수 있다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펜스를 사이에 두고 이방인을 격하게 경계하던 대부분의 견공들은 막상 견사에 들어가니 꿀 먹은 벙어리다. 다시 말해서 속된 말로 겁 많은 '아가리 파이터'들이다.


구름이 걷히고 쏟아지는 뜨거운 햇살. 더위를 식히기 위해 견사 주변에 물도 뿌려준다. 물과 친하지 않은 몇 마리의 견공들은 물을 뿌리며 쫓아오는 나를 피해 슬금슬금 거리를 둔다. 귀엽기도 하고 괜히 심술이 나서 물을 흩뿌리며 다가가자 후다닥 도망간다. 그러다 이내 다시 관심을 갖고 모습을 드러낸다. 말 못 하는 견공들과의 교감. 순간 봉사라는 걸 잊을 만큼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매년 줄어들지 않는 유기견들. 특히나 입양이 힘든 중대형의 견공들이 그 수가 더 많다.


막간의 휴식 시간.


봉사자들의 끼니 해결을 위해 기부받은 소중한 컵라면을 먹기 위해 천막 아래에 앉아 있는데 정기 봉사자 한 분이 레퍼런스를 주었다. 이곳은 일정 개체 수를 유지하여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환경이 좋은 편이라고.


그 말을 들은 순간 얼마 전에 방문했던 부안군의 도로 위에서 헤매던 떠돌이 개가 떠올랐다. 하얀 털에 빨간 목줄을 하고 있던 녀석은 내가 도망가라고 울린 경적소리를 듣고도 아랑곳 않았다.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아스팔트 중앙을 배회하며 킁킁거렸다. 신호가 바뀌면서 반대편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를 세우진 못했지만 더 크고 길게 경적을 크게 울려 반대편 운전자들에게 ‘위험요소’가 있음을 알렸다. 서서히 서행하며 다가오는 차들 모두 경적을 울리자 넋이 나간 녀석은 그제야 길을 터주었다.


누군가에게 좋은 환경을 유지하기 위한 결정이 다른 이에게는 절망이 될 수도 있다니


파란 하늘 아래 펜스 너머의 여유로운 견공들의 모습. 이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 저 펜스가 어쩌면 바깥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는 안전지대가 될 수도 있다. 유기된 처지는 여지없이 가여운데 또 한편으론 안도가 된다. 갑자기 혼란스럽고 모순된 기분이 마음을 채운다. 일부의 쾌적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위한 결정이 다른 이에게는 생존의 기회를 잃을 수도 있다는 딜레마를 만들기도 한다.


하물며 갓난아이도 화장실에 버렸다는 기사가 나오는 세상인데 일말의 죄책감이나 들었을까? 그저 저런 처지에 놓이게 만든 모든 이들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Epilouge


짠 하고 나타나 세상을 구해줄 슈퍼맨은 없다. 그래서 나약한 우리는 유기 동물 전체를 구할 수도 없다는 사실 역시 담담히 받아들여야만 한다.


뿌듯함과 쓸쓸함을 지닌 채 일과를 마치고 정리하던 와중, 문득 창고 안 벽면에 쓰인 글귀가 보인다.


장비를 보관하는 컨테이너 창고에 쓰인 글귀.


마치 누군가의 비난에 항변한 듯한 독백. 맞는 말이다.


비록 우리가 유토피아를 건설할 순 없더라도 위험에 처한 대상들을 도울 도의적 책임과 의무가 있다. 사회에 약간의 부작용이 있더라도 감내해야 한다고, 희생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설사 그게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만을 추구하는 행동이라는 비난이 존재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글귀에서처럼 유기견 한 마리를 데려올 형편은 안 되니 조금 다른 방식으로 희미한 기여를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또한, 우리 모두가 이 사회적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수 있도록.


궁극적으로는 반려 동물들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유기’라는 행동이 파렴치한 짓임을 고려 중인 누군가가 반추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이 나비효과로 인해 23년 발행될 통계 자료에는 몇 년간 기미가 보이지 않던 수치가 조금씩 감소하지 않을까…… 라며 홀로 마음의 짐을 덜어본다.





언젠가 작성한 글로 수익을 얻게 된다면 막연히 소액이라도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를 하고 싶다는 작은 꿈이 하나 있다. 훗날 그 기부 대상에 ‘견공들을 위한 포션도 있었으면…….’이라는 상상에 잠기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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