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간 순종적이기만 했던 학인이 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교란종들의 행태를 블로그에 올리는 것이었다. 일일 평균 방문자 수가 열 명 남짓한 그의 블로그에 내부사정을 폭로한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초점은 폭로가 아니다. 기록이다. 그 기록은 일종의 도감이었다. 교란종들을 분류하여 영원히 낙인을 찍기 위한 아카이브.
학인은 마치 드라마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것처럼 교란종을 지정하고, 그들의 생김새부터 성격, 평상시 태도, 내부 직원들의 평가 등을 글로써 상세히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매일 저녁 7시면 회사 길 건너에 있는 카페에서 몇 시간이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입구에 지뢰 같이 복잡하게 포진한 다육이 화분에 비해 내부는 조용하고 아늑해서 집중하기에 좋았다.
처음으로 기념적인 게시물을 장식한 건 천성구 차장의 이야기였다. 그에게 붙여진 ‘좌구산 잠자리’란 별명은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됐다. 천 차장이 매일 같이 쓰고 다니는 커다랗고 둥근 안경이 잠자리 눈과 비슷해서기도 했고, 마치 기면증 환자처럼 자리에 앉아서 하루에 최소 2시간씩은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언어유희적으로 승화시킨 결과물이기도 했다. 그가 교란종들의 이름 앞에 호처럼 붙인 산과 천의 이름들은 모두 그들의 서식지를 뜻했다.
사실 학인은 그를 ‘교란종’으로 지정할지 망설였다. 천 차장은 좋게 말하면 강원도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란 청년 같은, 꽤나 순박한 사람이었다. 모태신앙인 그는 매주 작은 정원이 딸린 성당에서 경건하게 성호를 그었고 감정에 휘둘려 실수로라도 모진 말이나 행동을 보였다면 즉각 사과를 건네는 순한 성품을 지녔다.
만약 학인이 회사 밖에서 개인적으로 천성구 차장을 알았더라면 의심의 여지없이 좋은 인연으로, 나이 차이는 좀 나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선한 형님으로 알고 지냈을 것이다. 하지만 천 차장이 천국을 가기 위해 하늘같이 모시는 그분은 순수하게 인간 천성구가 인간 진학인을 마주할 수 있는 운명을 허락하지 않았다.
천성구 차장은 무능했다.
<유용함의 정도에 따른 조직 생활에 필요한 직원의 성품>을 명제로 사용 빈도가 x축, 유용함을 y축으로 놓은 1차 함수 그래프를 그린다면, ‘순수함’과 ‘선함’은 ‘권위적’ 또는 ‘진취적’ 등의 기질과는 달리 원점에서 멀리 나아가지 못한 지점에서 경주를 마쳤을 것이다. 따라서 전자의 성향만 지닌 천성구 차장은 회사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과 값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회사는 함수보다는 훨씬 복잡한 구조의 조직이었다. 때때로 천 차장이 지닌 성품들이 특정 불리한 상황에서도 그 당사자를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방어막처럼 작동되기 때문에 사회성의 면에서는 훌륭하게 제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예컨대 직원들은 아무리 무능하고 실수가 잦은 천성구 차장을 ‘그래도 사람은 착해’라든지 ‘일부러 그럴 사람은 아니야’라는 식으로 포장해주곤 했다. 한 마디로 천성구 차장은 착한 바보였다. 그는 치열한 회사보다는 경건한 성당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섬세하지 못한 탓에 실수가 속출했고 기억력이 나빠 회의 시간조차 까먹기 일쑤였다. 상사들의 신뢰를 잃었고 따로 불려 꾸짖음을 듣는 빈도도 해가 갈수록 증가했다.
당황할 때마다 말을 더듬는 건 그의 주된 습관 중 하나였다. 그러한 행실은 천 차장이 더 어수룩해 보이도록 만들고 마음이 약한 동료들에게 동정심을 품도록 만들었다. 천 차장은 15년 경력임에도 모르는 게(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 많았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주변 동료들을 물고 늘어지는 게 그만의 생존방식이었다.
그가 지닌 고유의 방어막은 이때 진가를 발휘했는데, 반복적으로 자문을 구할 때마다 제일 첫마디에 ‘미안한데’라는 추임새를 붙여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이 불만을 품지 못하도록 무장해제 시키는 것이었다!
그날도 키보드를 손끝으로 요란하게 두들기던 천성구 차장은 기안문 서두의 문맥에 꽂혀 연거푸 한숨을 내뱉다가 어김없이 경계태세에 들어간 미어캣처럼 고개를 내밀어 파티션 건너편에 앉아있는 학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 학인아! 저기 미안한데 자, 잠깐만 와서 이것 좀 봐줄래?”
다급한 천 차장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팽팽하게 늘어진 학인의 집중력이 실이 끊어지듯 툭 하고 풀어져버렸다. 그때 그는 문서작성이라면 치를 떠는 반 팀장이 떠넘긴 사업 결과보고서 작성에 한창이었다. 티가 나지 않는 강도의 한 줌의 숨이 천천히 코를 타고 흘러나왔다. 학인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천 차장에게 다가갔다.
달력과 명패를 성벽처럼 두른 천성구 차장의 고립된 자리는 말 그대로 쓰레기장이었다. 서랍장 위에는 일회용 커피 잔들이 도미노처럼 줄을 섰고, 마우스 옆의 종이컵은 가래침을 계속 뱉어대는 바람에 수분을 머금고 증발하기를 반복해서 면이 우글거렸다. 거기에 지독한 비염을 상징하는 코 푼 휴지 뭉치들도 녹아내린 눈사람처럼 키보드 주변에 굴러다녔다. 학인은 코끝으로 타고 들어오는 정체불명의 불쾌한 냄새를 참으며 그의 위생 관념을 다시금 상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 여기 중간에 이 문장 한 번 봐봐. 무, 문맥이 좀 어색하지 않니? ‘지출코자 합니다’, ‘지출하고자 합니다’ ‘지출하려고 합니다’ 네가 보기엔 좀 어떤지 보고 말해줄래?”
천성구 차장의 질문은 대부분 이런 것들이었다. 조금도 중요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자신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사소한 것들. 혹시라도 윗사람들에 의해 지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드리운 그림자의 해소에 대한 갈망 같은 것. 자주적인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지각하지 못한 채 타인에게 대리 판단을 요청하는 것과 같은.
학인의 입사 초까지지만 해도 천 차장의 도움 요청은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그저 자리에서 ‘혹시 이거 누가 좀 잘 아는 사람 없나…….’라며 소심하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를 잘 아는 기존의 팀원들은 마치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주뼛거리며 등장하는 잡상인을 대하듯 못 본 체했고, 그러면 특유의 늘어지는 천 차장의 목소리가 침묵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다.
순진했던 학인은 마냥 이 불편한 공기를 계속 들이켜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직 천성구 차장의 성향을 충분히 학습하지 못했을 때의 일이었고, 무시당하는 상사에 대한 약간의 측은지심과 함께 시답잖은 질문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었다. 일종의 충성이자 호의였다. 그러자 해가 갈수록 천 차장의 의존도는 더욱 심해졌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부하직원을 불렀고 설명이 조금 복잡하다 싶으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에이! 미안한데, 이거는 그냥 학인이 네가 해줘. 그게 빠르고 낫겠다. 업무는 효율적으로 해야지. “
시간이 지나서 학인의 인내심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임계점에 다다른 순간이 있었다.
출근해서 자리에 앉기도 전에 천 차장은 어김없이 엄청난 큰 문제라도 터진 것 같은 다급한 어조로 그를 불렀고 역시나 굳이 물어볼 가치도 없는 시답잖은 것들이었다.
그게 가로막고 있던 감정의 둑을 툭 하고 건드렸다. 학인은 본능을 억누르지 못하고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상태로, 주변 동료들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한숨을 푸 하고 입으로 내뱉었다. 한숨소리를 놓치지 않은 천성구 차장에게도 감정 변화가 이어졌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을 가질 것이란 학인의 예상과는 달리 좌구산 잠자리는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분개했다.
“너 지금 한숨 쉰 거니?” 평소에는 듣지 못하던 날카로운 말투였다.
“네?”
학인은 뜻밖의 반응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대꾸도 하지 못했다. 꼭 자신이 평소의 천성구 차장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기 말이야. 내가 그렇게 한숨 쉴 정도로 널 짜증 나게 했어? 뭐 모, 모르는 거 물어본 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
적막 사이로 냉랭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무시당하는 게 일상이었던 그에게 비웃음과 괄시는 일종의 분노 방아쇠였지만 학인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