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 다소 늦은 나이에 사회에 뛰어든 학인은 자신이 또다시 불안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멈춰서 돌아보니 삶의 목표가 그저 ‘취업’에 불과했고 그러한 맥락에서 그는 이미 모든 걸 이뤄낸 터였다.
돈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복지가 좋은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모니터에 뜬 합격통지서를 확인하고 그의 마른입에서 새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름 끝이 ‘원’으로 끝나는 크지 않은 규모의 기관이었다. 애매한 한자식 이름 탓에 지인들은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인지를 물었다. 공무원은 아니야. 그냥 공공기관이야. 여전히 흐리멍덩한 눈동자를 만족시키진 못했지만 ‘아’ 하고 흘러 나오는 탄식에 학인은 만족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학인에게 성공의 척도는 타인의 인정이 전부였다.
“근데 모든 것이, 신기루였지.”
얼큰하게 취한 학인은 뒤늦게 깨우친 깨달음을 술잔에 담아 단숨에 비워냈다. 대상 없는 푸념에는 한탄과 약간의 후회가 섞여있었다. 30년간 의심 없이 달려온 트랙 위의 종점에는 ‘타인의 인정’이라는 남루한 무형의 상징만 남았을 뿐, 만족감도 성취감도, ‘진학인’이라는 인간의 영혼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뭐가?” 병진이 물었다.
“회사 말이야.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늘 고압적이고, 내리는 결정은 자기중심적인 데다 비합리적이고, 결정적으로 상식적이지가 못해. 그런데도 내부에선 왕처럼 굴어. 마치 애초에 성골로 태어난 것처럼 엄청난 대우를 받아야 하는 왕족인 줄 안다고.”
학인이 몇 주간 자신을 괴롭힌 이 고충을 마침내 털어놓은 건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인 병진과 가진 술자리에서였다. 이미 테이블엔 빈 소주병이 네 개나 놓여 있었고 꺼진 불판 위에서 딱딱하게 굳은 껍데기가 둘의 만담이 꽤 길었음을 알려주었다.
학인의 앞에서 빈병을 높이 들어 능숙하게 주문하는 병진은 해양 토목 건축물을 수주하고 설계하는 대기업에 다녔다. 그는 자신의 분야에서 박사까지 마친 후 능력을 인정받아 어느새 과장 진급을 앞두고 있었다. 그의 불룩한 배는 또 다른 성취의 증거였다. 복부에는 회사의 충성한 시간만큼이나 잔뜩 기름을 머금고 있어 고등학교 시절의 날렵한 그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학인은 그런 달라진 친구의 모습을 훑으며 상사 중 한 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시간 남짓 잠자코 학인의 하소연을 듣던 병진은 중간중간 마치 어린애의 어리광이라도 듣는 듯 신경질적인 미소를 짓기도 하고, 어떤 대목에선 작게나마 공감하듯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 애석하게도 네가 앞으로 같은 회사에 몸담은 이상, 그들이 네 미래를 쥐고 있다는 걸 아는 거지.”
“내 말이. 먼저 들어와서 한 자리씩 꿰찼다고 마냥 갑질하는 거지. 일말의 존중도 없어. 면접 때 그렇게 주인의식을 가지라더니 왜 지들만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거냐고. 무슨 개인회사야? 공공기관인데.”
“만약 그게 싫으면 하느님에게 빌었어야지. 그분들 보다 빨리 태어나게 해 달라고. “
병진은 비아냥 조로 반박하며 낄낄거렸고 할 말이 없어진 학인은 화풀이를 하듯 힘을 주어 새 소주병을 땄다. 곧바로 병진이 병을 가로채어 학인의 잔을 채웠다.
“미안. 사실 현실에서 너무나 당연한 네 하소연에 크게 공감이 가진 않아. 그렇게 너를 괴롭히는 게 정확히 뭔지를 잘 모르겠어서. 공공기관에 그 정도 보수면 나름 네 입맛에 맞는 회사고, 5년 전에 입사해서 지금까지 버틴 거잖아? 그럼 지금은 돌아가는 사정도 어느 정도 알 테고, 분명 적응도 다 했을 건데…. 근데도 그렇게 회사에 치를 떠는 이유가 뭐야? 그냥 6년 차 정도 되니까 지친 거 아니야? 뭐 다들 직장인 슬럼프, 이런 거 있잖아. 이유 없이 회사의 모든 게 싫어지는 시기지.”
“아니.” 학인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뭐 아까 말한 대로 사회가 강요한 길만 걷다 보니 이제 와서 새로운 꿈이라도 찾고 싶다 이건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게 궁극적인 문제는 아니야. 나도 여기서 자리 잡고 잘해볼 생각이었다고.”
“뭔데 그럼?” 학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뾰족한 턱을 천천히 끄덕이기 시작했다.
“인간이야.”
“뭐?” 병진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되물었다.
“그래 맞아. 도무지 같은 시대에 존재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이곳의 인간들. 그게 나를 벼랑 끝으로 몰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야. 누가 깔아줬든 그게 유일한 길이라 생각하며 30년간 열심히 달려온 대가가, 고작 이런 출구 없는 지옥에서 다시 30년을 질척거리는 거라면 차라리 맑은 연못에서 걱정 없이 헤엄이나 치는 양서류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비는 게 낫겠어.”
이번에는 병진이 말없이 잔을 들이켰다. 그가 보기에 학인은 처음에 가진 높은 기대치와 이에 부합하지 않는 현실에서 오는 괴리를 참아줄 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학인은 오랜 친구였고 남들보다 훨씬 더 섬세한 구석이 있었다. 겉으론 아닌척했지만 자신의 일부를 희생해서 주변을 보살피는 이타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고, 병진은 이 점을 신뢰해 학인과 13년 넘게 우정을 지키고 있었다.
병진은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를 짝사랑했었다. 수수하게 생긴 외모에 또래 같지 않은 성숙한 면모가 수줍은 사춘기 아이들을 홀렸다. 공교롭게 이 아이는 학인을 좋아했다. 사물함에 열쇠고리를 선물로 넣어 두고 교실 밖에서 몰래 사진을 찍었다. 학인은 크게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의 친구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 아이를 냉랭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병진은 이때 혹여나 자신과의 관계가 틀어질 가능성에,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행동을 한 학인이 얼마나 세심하고 이타적인지를 깨달았다.
하지만 때로는 그러한 기질이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병진은 다시금 사회의 섭리에서 섬세함의 기질이 나약함이 될 수 있음을, 또한 무던함이 오히려 강함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상한 몰골로 쓴 소주를 연거푸 목에 털어 넣는 친구를 안타깝게 여겼다. 굳이 비유하자면 자신은 거북이였고 학인은 개복치였다.
“학인아, 누구나 회사에 불만은 있어. 우리 회사도 별반 다르지 않아. 좀 큰 회사라고 드라마에 나오는 상사들처럼 합리적인 사람들만 있을 거 같아? 절대 아니야. 후배한테 모르는 척 일 떠넘기고 냉큼 자기가 넘겨받고 보고해서 공로 채가는 과장, 한밤중에 사적으로 술 먹고 전화해서 아침에 집으로 태우러 오라고 문자 남기는 파트장 새끼도 있어. 그런데 세상에 절대 악은 없거든. 도저히 상종 못할 사람도 항상 장점은 있기 마련이야.”
병진의 직설적인 조언이 결코 위로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일부러 뾰족한 말들을 던졌다. 그는 단지 자신의 친구에게 필연적으로 감내해야 할 현실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상처를 보호할 단단한 딱지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 나도 고작 몇몇 상사 욕하면서 불평하려는 게 아니야. 그저 상식적인 세상을 바랄 뿐이야. 정말이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극히 상식선에 있는 그런 환경.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위계 속에서도 지켜야 할 선은 지킬 만큼. 내가 이상한 거야? “
“아무리 너에게 악이라도 통하면 곧 그게 상식인 세상이야.”
병진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허망한 표정을 띤 학인의 얼굴을 응시하며 잔을 채웠다. 한동안 상온에 둔 소주병은 어느새 온도차로 인해 수분이 흥건해졌다. 잔이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고 두 사람은 말없이 잔을 들이켰다.
학인은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식당은 퇴근 후 회포를 푸는 직장인들로 떠들썩했다. 웃음꽃을 피우며 한껏 흥분하여 열변을 토해내는 그들의 모습은 꼭 다른 세상 같았다. 각기 다른 소음들은 피어오르는 숯 연기처럼 허공에서 서로 맞물리다 결국 하나의 소음으로 공명했다. 그러다 문득 목적지도 없이 기차 승강장의 한복판에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학인아, 그냥 내려놓고 적응하는 편이 빨라. 의지로 바꿀 수 없는 것에 쓸데없이 에너지를 쏟아붓고 살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아.”
“그런가. 진짜 그 수밖에 없는 건가.”
사회생활 선배로서 병진의 통찰력은 분명 학인이 간과했던 어떤 부분을 해소해 주는 데 적절한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타오르는 학인의 의구심을 소화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학인의 내면의 출혈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어느새 뭉쳐서 단단해진 염증은 단순히 한 조직에서 서로 다른 인격체 간의 융화 과정이기에 결이 다른 몇몇 개인이 무조건 수용해야 하는 것이라고 치부하기엔 그 덩치가 너무 컸다. 그리고 학인은 그 덩어리를 차마 삼킬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