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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선 Oct 12. 2023

4. 두 번째 교란종


블로그 제목 란 공백을 새로운 다섯 글자가 채웠다. 청풍호 여치. 두 번째 교란종인 박석기 부장이었다.   

그는 호리호리하고 큰 키와는 대조적으로 옹졸하고 소심하고 아주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 한 번 뭔가에 꽂히면 그 의문이 해소될 때까지 주야장천 그 이야기만 꺼내는 식으로 주변사람을 괴롭혔다.     

그의 옹졸함은 단순히 업무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애꿎은 인간관계에까지 전이돼서 대하는 사람에 대한 호감도가 매번 명백하게 겉으로 표출되었는데, 가장 불호인 사람이 바로 천성구 차장이었다.


대다수의 교란종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개인의 사적인 일보다는 회사의 공적인 일을 항시 우선하는 태도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이상적인 근로자가 갖출 자질이라고. 학인은 이들이 기반을 다져온 과거의 시대가 성장과 합심을 중요시하던 환경이었다는 걸 미루어 보았을 때, 분명 이견과 발생하는 세대 차이에 대해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할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데에 충분한 여지를 남겨두었던 터였다. 그런데도 이 시대착오적인 청풍호 여치, 즉 박석기 부장은 그 경계선이 도대체 어디쯤인지 가늠도 못 하고 갈팡질팡하며 타인의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곤 했다.


예를 들어, 박 부장은 자신의 기준에서 완벽히 처리되지 않은 업무(그 업무가 얼마나 중요하거나 급한 지와는 무관하게)가 남은 상태로 직원이 휴가를 쓰는 것에 경기를 일으켰다. 어차피 법적으로 보장되는 근로자의 휴일이었기에 의외로 소심한 그의 성향상 강제로 반려하는 강수를 두진 못했지만, 결재를 전날 퇴근시간 직전까지도 고의로 차일피일 미루는 식의 행패를 부렸다. 그래서 당사자는 최종 승인을 받을 때까지 그의 엄청난 히스테리를 감내해야만 했다.


한 번은 관내의 지자체 및 기관장들을 초빙하여 세미나를 개최하는 중요한 오찬 행사를 며칠 앞두고 눈치 없는 천성구 차장이 휴가를 낸 적이 있었다. 오전에 내부망 시스템을 통해 결재요청을 확인한 박 부장의 표정은 종이 구겨지듯 일그러졌고 곧바로 자신이 납득할 때까지(어차피 이해할 생각조차 없었지만) 취조를 시작했다.


“천 차장. 목요일에 휴가 냈네?”     

“아 예, 부장님.”     

“이 사람아, 내일모레 세미나가 있는데 지금 휴가를 간다는 거야?”     

“아유, 부, 부장님! 행사 준비는 거진 다, 다 해놨습니다.” 천 차장이 얼버무리자 박 부장은 더 집요하게 캐물었다.     

“다하긴 뭘 다 해 이 사람아. 보도자료 내용이랑 원장님 인사문 다시 검토했어? 참석자 현황은? 할 일이 이렇게 많은데 말이야. 내일 무슨 일인데? 뭐 있나?”     

“지, 집에 조금 급한 일이 있어서요.”      

“그러니까, 급한 일이 도대체 뭔데? 알아야 허락해 주던지 할 거 아니야.”     

“아, 그게……. 집에 어, 어머니가 조금 몸이 안 좋으셔가지고요”


이건 거짓말이었다. 천 차장은 주인에게 학대를 받아 겁을 잔뜩 먹은 몰티즈 같이 어깨를 움츠리며 불안한 태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순순히 속내를 드러낼 만큼 순진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매번 그럴듯한 새로운 변명거리를 만들어낼 만큼의 순발력도 없었기에 박석기 부장이 놓은 덫을 피하지 못했다.


“너는 인마! 무슨 맨날 한다는 소리가 어머니가 아프다는 거야? 저번에는 무슨 요양병원 모시고 간다고 했잖아. 나보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몸소 박석기 부장의 히스테리를 수시로 겪은 부서원들은 이 지긋지긋한 검열을 피해 하나둘씩 사무실을 나섰다. 그나마 제일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던 김은미 대리는 ‘도대체 직원 휴가 사유가 자기랑 무슨 상관인데?’라고 생각하며 학인을 향해 동의를 구하는 식의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일전에 아버지 기일을 사유로(박 부장이 또 집요하게 이유를 캐물었기 때문에) 휴가원을 냈는데 ‘제사는 밤에 지내는데 왜 네가 휴가까지 내고 일찍 가야 되냐?’라고 면박을 주는 박석기 부장을 보고 혀를 내두른 터였다.


“어, 어머니가 원래 몸이 조, 좀 안 좋으셔서요. 죄송합니다.“


천성구 차장이 고장 난 장난감처럼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자 박 부장의 타원형 얼굴은 이내 럭비공처럼 변했다.


그렇다고 그 이상 나아가진 못했다. 박석기 부장에게는 사실 그럴 권한도 이렇다 할 증거도 없었다. 합리적인 의심만 품었을 뿐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조심성이 많은 데다 배짱도 없어 확신 없는 일을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부재했다.


그렇게 천 차장이 어렵게 휴가를 간 이튿날 아침, 심각한 표정으로 천 차장의 빈자리를 노려보며 분노를 되새김질하던 박석기 부장의 전화기가 울렸다. 의심에 단서를 제공하는 중요한 전화였다.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박 부장의 오랜 친구이자 도청 기업지원과에 재직 중인 홍성욱 팀장이었는데, 천성구 차장을 좌구산 근처에서 열리는 지역 경제인 골프 대회에서 만났다고 전했다.


“천성구 이 새끼가 진짜!”


전화를 끊은 박 부장은 치미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의자가 뒤로 밀려 캐비닛을 강타할 정도로 벌떡 일어났고 그 자리에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린 채 눈알을 굴렸다.     


이쯤 되면 의문이 든다. 천성구 차장은 왜 박 부장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을까?


실제로 행사 준비를 위해 남은 업무가 크게 없었기 때문에 천 차장의 휴가를 낸 태도가 크게 흠잡을 구석은 없었다. 박석기 부장이 나열한 일들은 이미 수차례 검토가 끝낸 업무로, 일을 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것마저도 김은미 대리나 학인의 선에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박 부장도 속으로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골프’라면 얘기가 달랐다. 박 부장에게 ‘골프’는 터부였다. 박석기 부장은 휴가를 내고 ‘골프’를 친다는 생각 자체를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건 근무태도와 직결된 문제였다. 또한 지극히 박 부장 혼자만의 선입견이기도 했다.


왜 부장님은 골프 안 치세요?’라는 남들의 질문에 골프 스윙 자체가 허리에 안 좋고, 운동 효과도 없는데 비싸기만 해서 잔디 위에 돈만 뿌리는 쓸모없는 스포츠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는 단순히 클럽을 휘둘러 멈춰있는 공을 맞추는데 젬병이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이었다. 또래에 비해 뒤늦게 시작한 탓도 있겠지만(그는 마흔여덟에 시작해서 2년 만에 접었다) 기본적으로 재능이 없었다. 가제트같이 얇고 길쭉한 팔은 무용지물이었고 공 앞에만 서면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골프는 무자비했다. 초보자에 대한 배려도 없었고 차례가 되면 적막 속에서 날아드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마치 무대에 선 느낌마저 들었다. 소심한 그에게 그 이목을 견딜 담력 따윈 없었다. 공은 초원 위를 활개 하는 매처럼 뜨질 못했고 오히려 지하의 부름을 받은 듯 땅이나 물아래로 꺼지기 일쑤였다.


그가 결정적으로 ‘골프’에 척을 지게 된 건 돈 때문이었다. 내기에서 연속으로 다섯 번 진 다음 날, 박석기 부장의 고가의 골프채는 중고 매장 제일 앞 열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는 매장의 주차장에서 현찰을 세며 내기로 잃은 돈의 일부를 이렇게라도 되찾은 것에 안도했다.


그래서 박석기 부장의 관점에서, 천 차장이 유흥업소에서 술을 퍼마시거나 성당 야유회 차 간 계곡에서 신선놀이를 하는 건 용서가 됐어도, 그 스포츠만큼은 용서가 안 됐다.


“그것도 이렇게 ‘중요한 행사’를 바로 앞두고 말이야…….”


박 부장은 자신의 빈약한 명분이 꺾이지 않도록 살을 붙여가며 끊임없이 합리화를 했다.



이 일은 학인이 2년 차 때 벌어진 사건이었고 그와는 크게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박석기 부장이 교란종으로 지정된 이유와 연관이 있었다.


박석기 부장은 오전 내내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고민했다. 해이해진 조직 내의 기강. 직원 간의 신뢰 실추 등. 그는 순진한 척 앞에선 조아리지만 은근히 뒤통수를 치는 괘씸한 천성구 차장을 제대로 손봐주고 싶었다. 하지만 전화 제보만으론 아직 부족했다.


“또 근처라서 잠깐 들렀다고 변명할 수도 있는 거잖아? 괘씸한 놈.”


어떤 고민거리가 해결되기 전까지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암울한 표정으로 며칠을 보내는 그의 불편한 습관 탓에 김은미 대리를 포함한 일부 여직원들은 박 부장을 ‘우거지상’이라고 불렀다. 역시나 오전 내내 우거지상으로 사무실을 휘젓고 다니던 그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리며 학인에게 다가온 것은 오후 2시가 다 돼서였다.


“진학인 주임, 잠깐만 나 좀 보지.”


학인은 곧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상상하지 못 한 채로 묵묵히 박 부장을 따라 건물 밖으로 나섰다. 푸른 하늘을 둘러싸고 배회하던 서늘한 가을바람이 이따금 주차장 구석에 선 두 사람을 기분 좋게 훑고 지나갔다. 학인은 순간 왜 바깥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사무실 안에 갇힌 자신은 암울한 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하늘을 응시했다.


“지금 바쁘나? 뭐 하는 거 있어?”     

박석기 부장이 짝다리로 담뱃불을 붙이며 근엄하게 말문을 열었다.

“아니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그… 좌구 군청에서 좌구산 국립공원 쪽으로 한 10분? 거리에 골프장 하나 있어.”     

“네? 골프장이요?”     

“그래. 가면 대충 알 거야. 천성구 차장 차 알지? 은색 도요타. 3049.”     

“아, 네…….”     

박석기 부장은 뜸을 들였다.     

“지금 네 차 끌고 거기 가서 입구에서 기다리다가 천 차장 차 보이면 사진 찍어서 나한테 바로 전화해. 12시 30분 티업이라고 했으니까, 지금 가면 4시… 얼추 맞을 거야. 지금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미행. 이런 것까지 해야 되는 건가? 학인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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