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줄 알았던 글에 뜻밖의 댓글이 달렸다. 학인은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댓글의 내용은 이랬다.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요즘도 이런 회사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네요. 혹시나 노파심에 한마디 덧붙이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요. 회사에서 백날 불평해 봤자 어차피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립될 뿐입니다.’
학인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느끼곤 스스로 놀랐다. 어차피 공감을 바라고 시작한 기록도 아니거니와 익명의 사람이 쏜 화살 따위쯤은 흘려보내도 그만이었지만, 피어오른 분노는 허공으로 확산하는 향초의 연기처럼 손을 휘저어도 그 잔향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하나의 삐딱한 관심이 추진력을 얻을 수 있는 발판이 되어주었다. 학인은 바로 다음날 회사에서 더 적극적으로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학인이 도감을 작성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복기한 결과, 대다수의 교란종들은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마음대로 휘둘러야 그 직성이 풀리곤 했는데, 그 대상은 항상 다루기에 만만하고, 찍소리 한 번 못하고, 떨어진 명령에 굴복하는 순종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교란종들이 같은 조직 내에서 이들을 구별해 내는 방법은 상하관계가 명백한 ‘직급체계’가 가장 명쾌하면서도 편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항시 적용되지만은 않았다.
예컨대, 인간이란 본능적으로 처음 알게 된 사람 앞에선 잘 보이려는 습성을 지녔기 때문에 아무리 몰상식하고 무례한 교란종이라도 대부분 새로이 유입된 종에게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최대한 긍정적인 페로몬을 내뿜었다. 그래서 혹여나 애매하게 중간 계층에 위치한 선배들이 과거 교란종들의 부정적인 습성을 언질해도 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신입들은 ‘생각보다 괜찮으신 거 같은데’라는 반응으로 일관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이다.
하지만 새롭게 편입된 종이 어느 정도 환경에 익숙해졌다고 판단된 순간, 교활한 교란종들은 환심을 사기 위한 페로몬 방출을 멈추고 곧바로 그들의 적응력과 인내심을 시험했다. 이러한 행태가 온전히 인지한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기는 억지다. 하지만 몇 개월, 또는 몇 년에 걸쳐 같은 환경에서 함께할 종의 성격이 어떤지, 역치점과 자극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등을 파악해서 슬금슬금 벽을 허문 뒤, 나름대로 직급 너머의 또 다른 먹이사슬을 형성해 내는 것이었다.
조직에는 이 과정 중에 이탈하는 종이 생기기 마련이고, 가장 취약하면서도 호락호락한 대상만이 최하층에 여과되어 남게 되는데, 그게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학인은 깨우쳤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그의 변화는 고작 1차 변태(너무 미비해서 사람들이 크게 눈치채지 못하는 정도의 변화)에 불과했다. 학인은 그래서 그들의 완고한 경험법칙을 깰 만큼의 충격을 줌으로써 계층 이동과 동시에 그들이 구축해 놓은 오랜 질서에 작은 변화를 주고자 했다. 그리고 그 충격파를 가장 먼저 보낼 대상으로서 천성구 차장을 택했다.
예상보다 좌구산 잠자리는 싱거운 상대였다. 그는 출근해서 10시가 지나면 턱을 20도쯤 기울인 후 얇고 가는 눈을 감는 등의 태세를 취해 동면에 들기 위한 시동을 걸었다. 그러다 상위 포식자의 발소리를 기가 막히게 탐지하고는 불현듯 급하게 처리할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어김없이 학인을 찾았다. 그런 다급한 행동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는데, 자신이 졸지 않았다는 사실을 과장하여 보이기 위함이었고, 또한 업무에 열중한 듯한 인상을 자아내기 위함이었다.
평소의 학인이었더라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의무적으로 그의 곁으로 갔을 터인데, 마침내 고치를 깨고 나온 학인은 그러지 않았다.
“죄송한데 급하세요? 근데 저도 당장 급하게 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못할 것 같은데요.”
숨 막힐 정도로 보수적인 사무실에서 이 간단한 대사 하나를 입 밖으로 꺼내기까지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지만 여전히 그의 내면에 축적된 분노라는 원자가 그의 영혼을 구성하고 있는 분자식 구조에 끼어들어 변화를 일으켜주었다.
자신의 가장 주된 조력자의 태업에도 천성구 차장은 놀라기는커녕 차분했다. 그건 학인의 거절의사가 천성구 차장의 예의범절 기준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천성구 차장은 선하고 단순했다. 그는 그저 지금 당장의 골칫거리인 서류로 머리가 아팠고 골똘히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다 버짐이 핀 입을 움직였다.
“아, 그, 그러니? 이, 이거 별거 아니긴 한데……. 바, 바쁘면 내가 그냥 알아서 할게.”
학인이 이 미약한 승리로 쾌재를 불렀을까? 아니다. 그의 마음은 반대로 허망함이 가득 채웠다. 천 차장이 순순히 물러난 덕분에 수년간 지저분한 그의 파티션을 넘나들며 뒤치다꺼리와 비위를 맞추기 위해 소모한 감정들이 무의미하게 다가왔다. 어쨌든, 자신감을 얻은 학인은 그 기조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그 뒤로도 천성구 차장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습관처럼 공을 넘기려 할 땐 어리숙한 체했고 불필요한 질문에 간결한 몇 마디만 건넸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좌구산 잠자리는 학인을 부르지 않았다. 이게 학인이 일궈낸 첫 성과였다.
천성구 차장과의 경험에서 깨우친 것처럼, 조직 내의 인간관계상 우위를 가르는 본질은 ‘거절 가능 여부’였다. 본디 아랫사람은 상향 거절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반대로 관리자(일반적인 상사)는 자신의 계층적 우위를 활용하여 관용이나 수용적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배타적인 자세로 편협한 사고를 고수하는 것이 좀 더 손쉬운 의사소통 방식이라 여긴다. 그들이 그러한 방식을 취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관용적인 모습과 지식 또는 능력의 열세에 대한 인정이 자신의 권위를 격하시킨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직적 구조에 익숙한 교란종에게 거절(또는 거부)이란 어떤 관점에서 보면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기 때문에 자신을 겨냥한 하위계층의 거절의사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건방지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민한 박석기 부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감투에 대한 욕심이나 남의 시선이 크게 중요하지 않는 천성구 차장과는 달랐기 때문에 학인은 그를 상대하는데 애를 먹었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었고 박 부장은 오른쪽 어금니에 낀 질긴 고기를 빼내려 쩝쩝 입맛을 다지며 앉아 있는 학인에게 다가왔다. 자리에서 세 번째 교란종 작업에 한창이던 학인은 황급히 마우스를 놀려 파일을 닫았다.
“뭘 그렇게 놀라? 뭐 이상한 거라도 본 거 아니지?”
“아닙니다. 식사하셨어요?”
“아, 그래. 진 주임. 예전에 입사하기 전에 캘리포니아 다녀왔다면서?”
“네. 여행으로 잠깐요.”
“맞지? 하여튼 이 기억력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다름이 아니고. 우리 딸들이 이번에 안사람이랑 같이 미국에 지 고모 만나러 가려나 봐. 근데 그 전자 비자인가 뭔가 신청해야 된다더라고? 맞지?”
“아마도… 그랬던 것 같아요.”
“그렇지? 진 주임이 여행도 많이 다니고 그래서 이런 거 전문가잖아. 그래서 좀 도와달라고. 그것 좀 우리 진 주임이 대신해줄 수 있지? 내가 안사람 거하고 큰딸 작은딸 개인정보는 다 이따 전화해서 물어보고 우리 진 주임한테 보내줄게.”
속이 뻔히 보이는 칭찬. 부탁을 가장한 지시. 그는 필요한 일이 있을 때면 꼭 ‘우리’라는 수식어를 덧붙여 포섭하려 했다. 학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딸은 학인의 또래였고 지금은 검색만 하면 블로그마다 친절히 모든 과정을 설명해 주는 편한 세상이었다. 베이비부머 세대라 이런 작업이 서툰 박 부장의 것도 아니고, 하물며 동갑내기 딸의 시중까지 들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학인은 최대한 정중히 거부했다. 죄송하지만 제가 할 일의 범위가 아닌 것 같다고. 처음엔 이것도 사회생활의 일부이니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난다는 식의 우회적 거절이 낫겠다고 판단했지만, 그건 날 것이 아니었다. 분명 탈피 전의 그였다면 ‘그럼 여권 사본을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비용 결제는 어떻게 할까요?…’라고 말끝을 흐리며 장렬히 굴복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극히 사소한 일이라도 더 이상 불필요한 시중을 들기 싫다는 영혼의 아우성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러한 지시(또는 부탁)가 당연한 듯 당당하고 인자한 시선으로 학인을 바라보고 있는 박석기 부장에게 이 피가 뚝뚝 흐르는 진심을 내보이지 않고는 영속적인 변화를 이루어낼 수 없다는 걸 그는 이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뭐? 네가 할 일의 범위?”
학인의 거절에 순간 정적이 이어졌고 노란 청풍호 여치의 얼굴로 혈액이 모이며 벌게지기 시작했다. 학인은 함구한 채 자신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보는 박 부장에게 때론 솔직한 의사표현이 마냥 무례함이 아님을, 무조건적인 수긍만이 조직의 충복이 아니라는 자신의 견해를 전하고 싶었다. 그 동시에 굳어진 교란종들의 습성에 변화를 꿰어낼 수 있고, 어리석은 자신의 오만함을 인정하게 되고, 비로소 적절한 선을 지키는 그들과 원만하게 지낼 일말의 가능성의 여지를 열어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박석기 부장은 벌레를 씹은 표정으로 ‘못하겠단 말이지…….’라고 혼잣말을 읊조리며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이 사건 즉시 박석기 부장의 보이지 않는 블랙리스트엔 천석구 차장에 이어 학인의 이름이 등재했다. 약 한 달을 시달려야만 했다. 박 부장은 그전까지 천 차장에 했던 것처럼 먹잇감을 바꿔 옹졸하고 집요하게 사사건건 변절자의 행동에 시비를 걸었다.
학인이 연차 휴가를 올렸을 때, 박석기 부장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라며 학인을 호출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심각한 표정 속에서 꿉꿉한 담배냄새가 밴 검지로 주름진 인중을 가린 채 죄인이 먼저 자백하고 용서를 구할 때까지 수분 간 침묵을 유지했다. 하지만 이 습성을 이미 잘 알고 있는 학인 역시 물러서지 않고 그의 핏기 없는 입술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자 결국 박 부장은 참지 못했다.
“할 말 없나?
“네? 할 말이요?”
“그래. 정말 몰라? 왜 불렀는지?”
적절한 사유를 대면서 부디 넓은 아량을 베풀어달라는 식의 저자세. 학인은 그가 뭘 원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시같이 박히는 뾰족한 시선을 견디며 끝까지 모른 채 했다. 그리고 박석기 부장은 결국 주기가 돈 분화구처럼 폭발했다.
“연차 말이야 연차! 연차를 저번 달에도 썼는데 또 써? 뭐 회사 놀러 왔어? 이럴 거면 아예 때려치우고 쉬지 왜? 너는 지금 내가 1년에 몇 번이나 쉬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 너만 쉬고 싶어? 다른 직원들도 다 쉬고 싶어! 제발 눈치 좀 챙기자!”
내 부탁을 안 들어줬으니까 나도 네 부탁 안 들어줄 거야. 박석기 부장의 안경 뒤로 위치한 야비한 눈매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히려 학인의 입술에는 미세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 교란종이지. 뒤바뀐 영혼은 예상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흥분으로 전율했다.
“지금 저번에 제가 부탁 안 들어드려서 일부러 이러시는 거죠?” 학인은 점점 더 대범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뭐라고? 이 새끼가 그동안은 몰랐는데 진짜 건방진 놈이네?”
“제가 제 생각을 솔직하게 말씀드린다고 해서 그게 건방진 건 아니죠, 부장님. 그리고 그렇잖아요. 원래는 안 그러시던 분이 그날 이후로 저를 완전히 다르게 대하시는데, 눈치 못 챌 바보가 있을까요?”
사실 박석기 부장의 괴롭힘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박석기 부장은 눈 밖에 난 학인을 노골적으로 사냥해 왔다. 학인이 회사가 근방인 친구와 점심을 따로 먹었을 때도 방으로 불러서 조직이 와해되는 분위기를 조장한다며 개인적인 행동을 삼가라며 꾸짖기도 하고, 로비에서 짧게 통화를 하다 마주친 날엔 근무태만이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꼭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학인도 마냥 억울하진 않았지만, 아이러니했던 것은 박 부장이 간혹 사우나를 다녀오기도 하고(사우나를 다녀오면 꼭 캐비닛의 거울을 보고 찹찹 소리를 내며 열성적으로 향이 강한 자신의 스킨을 발랐다), 50분에 한 번씩 흡연구역으로 나가 담배를 태웠고, 사적인 약속이 있는 날엔 퇴근 시간 20분 전에 사무실을 나가는 등, 실은 본인이 근무태만의 선두주자이자 가장 모순적이었다는 사실이었다.
학인은 소위 ‘맞는 말’만 했다. 윗사람에게 항상 공손하고 틀려도 상사의 말에 고개를 조아리는 것이 예의라는 과거의 미덕. 그러한 관점에선 그는 단지 건방지고 무례한 직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박석기 부장 스스로도 그러한 사상이, 또한 찌든 자기 자신이 구태의연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머리에는 또 한 번 인지부조화가 일어났다.
“내, 내가 그렇게 공과 사도 구분 못하는 사람으로 보이냐? 아니 그러면, 부하 직원한테 그깟 부탁 하나 못해? 그렇게 정이 없어? 아, 됐어! 진학인 주임 이제 얼마나 정 없고 얼음장 같은 사람인지 내가 잘 알았으니까, 나가. 서로 가능하면 얼굴 보지 말자고. 나가!”
이때 학인의 영혼은 의외로 형용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하고 싶은 말을 꺼내 잘잘못을 따지고 싫은 사람과의 관계의 단절이 통쾌한 쾌락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는 더 우울함에 잠겼다.
실제로 며칠이 지나자 학인의 영혼은 너덜너덜해졌다. 그는 집에 돌아오는 대로 샤워를 했다. 빠진 머리카락이 배수구를 수북이 메웠고 물이 차올랐다. 문득 병진의 충고가 떠올랐다. 적응하는 편이 빠르다. 그렇지. 말단 직원 주제 내가 뭐라고. 분란을 일으키는 것보단 그냥 수긍이 편하지. 학인은 또다시 5년 전,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했던 과거의 자신으로, 솔직하지 못하고 자신의 영혼에게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교란종들이 선호하는 모습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수도꼭지를 우측으로 돌렸고 겨울 냉기를 머금은 물탱크 속에서 차갑게 식은 냉수가 얼굴을 때렸다. 학인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건 스스로에 대한 고문이자 채찍질이었다.
***
박석기 부장과의 싸움에서 패색이 거의 짙은 가운데 운이 따라주었다. 갑작스레 박 부장의 히스테릭한 괴롭힘이 멈춘 것은 인사위원회 심의 결과가 내부 게시판에 올라온 덕분이었다. 박석기 부장의 정년망토의 사용기한이 6년이 채 안 남은 시점에서 그의 이름이 승진 대상자 명단에서 누락된 것이었다. 반대로 그보다 한참 후배인 반일식 팀장이 2급 부장으로 승격됐다. 학인도 대리로 승진했다.
“아이고! 어떻게 소식을 듣고 또 전화까지 준 거야? 아무튼 고마워, 고마워. 이 자식이 벌써 라니 인마! 늦은 거지! 작년에 진작 달았어야 했는데 말이야. 뭐? 누구? 아… 박 부장님? 뭐, 잘 결정하시겠지. 좀 남긴 했는데, 눈치가 있으면 뭐 밑에 후배들 위해서 이제 그만…….”
반일식 팀장 주변은 승진 축하 전화로 떠들썩했고 한 시간 간격으로 꽃다발과 난이 들이닥쳤다.
반대로 굳게 문이 닫힌 박석기 부장의 방은 보이지 않는 어둠과 고요, 무관심이 드리웠다. 오전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그는 오후 3시가 되자 마지막 동면에서 깬 노쇠한 곰처럼 느릿느릿 굴에서 나왔다. 그리고 몸이 좋지 않다며 국장에게 보고한 뒤 조기퇴근을 청했다. 그의 등장에 적막이 흘렀고 직원들의 시선이 갈색 낡은 가죽 가방을 축 처진 어깨에 멘 박석기 부장을 쫓았다. 그 시선엔 약간의 동정과 함께 후련함이 배어있었다. 학인도 약간의 연민을 느꼈지만, 그건 그의 영혼이 원치 않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한 주 뒤, 박석기 부장은 명예퇴직을 신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