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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선 Oct 17. 2023

6. 약한 종들은 불편한 대상의 기세에 편승한다

약한 종들은 본능적으로 강한 종을 따른다. 동정이나 연민을 일으키는 대상이 편할지라도 결국은 복종을 거부할 수 없는 불편한 대상의 기세에 편승하게 된다. 그러한 맥락에서 학인의 변화도 그에게 약간의 기세를 부여해 주었다. 후배들은 언제부턴가 미약하게나마 목소리를 내는, 권력의 상징 중 하나인 상향 거절이란 화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된 학인의 주위로 모이기 시작했다.     

두어 달에 한 번씩 비밀스럽게 모여 술자리를 갖곤 하는 저년 차 후배들이 처음으로 학인을 부른 건 박석기 부장이 나가고 2주가 지난 뒤였다.


<대리님, 혹시 모레 저녁때 시간 되세요?>


퇴근 한 시간 전, 일자리지원부 윤상철 주임의 메시지를 받은 그는 의구심과 동시에 작은 희열을 느꼈다.     

과거의 그는 본래 ‘착한 부하직원’으로만 통했고, 이는 어떤 관점에선 회사를 향한 충성심을 내포했기 때문에 애사심이 적은 후배들에게 본의 아니게 거리를 형성했던 터였다. 상사의 말을 군말 없이 따르고 어떠한 종류의 부탁도 거절하지 않는, 딱히 싫은 티를 내거나 불만을 늘어놓지도 않고 묵묵히 내적 지진을 흡수해 내는 그런 수용적인 종류의 직원. 그게 바로 초창기의 그였다.


과거 현재의 학인처럼 불만을 표출한 직원이 한 명 있었다. 그녀는 지홍윤 대리였고 반일식 부장이 차장인 시절, 아직은 머리카락 잔해가 해변의 해초처럼 처량하게 남아 있던 그때, 업무를 모조리 떠넘기고 자리에 앉아 명랑하게 스포츠 영상만 보고 있는 반 차장과 담판을 벌였다.


“그만둘게요.”


쌓인 분노를 참지 못한 지홍윤 대리는 다짜고짜 퇴사를 선언하고 자리로 돌아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     

“뭐라고? 지 대리?”


반일식 차장은 귀에 끼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숱 없는 눈썹 아래로 썩은 동태눈깔을 끼고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 그의 모습을 보자 지홍윤 대리는 더욱 화가 치밀었고 그동안 퇴적물처럼 쌓인 앙금을 토해냈다.


“못 들으셨어요? 때려치운다고요. 도대체 일은 저 혼자 하는 거예요? “

“뭐야. 어제 노동부 사업 정산 때문에 야근 좀 했다고 지금 삐친 티 내는 거야? 나도 우리 지 대리 고생한 거 다 알지. 아, 수고했어. 수고했어! 진짜!”


반 차장이 대충 턱짓으로 성의 없는 칭찬을 마무리 짓고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자 지홍윤 대리는 기가 찬 듯, 한 줌의 숨을 파! 하고 내뱉었다.


“이번이 문제가 아니고요! 지난 2년 간 주 업무였던 차장님 뒤치다꺼리. 그 짓 더 이상은 못하겠다는 겁니다. 무슨 비서처럼 전화는 다 받아서 필요한 메모만 요약해 주고, 자기는 맨날 야구경기 아니면 골프영상이나 보고 있고. 일한 생색은 자기가 다 내고. 회사 놀러 왔어요?.”       

“뭐, 뭐? 야! 이게 오냐오냐 해줬더니 기어오르네.”     

“제 말이 틀렸어요?”


두 사람의 언성이 천장에 부딪힐 정도로 높아졌다. 하지만 박석기 부장이 출타 중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말릴 윗선도 없었고 주변 팀원들은 그저 숨을 죽이고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귀를 기울였다. 갓 입사한 학인도 그중 한 명이었다.


“너 내가 지금 몇 년차인 줄 알아? 15년 차야. 네가 지금 선배 대신 일 좀 했다고 하극상을 벌여? 야! 나는 뭐 너 나이 때 안 한 줄 알아? 원래 다 이렇게 하는 거야. 실무자 때 업무 좀 익숙해지고 여러 가지 광범위하게 배우라고 그거 몇 년 시켰더니 푸념이나 하고 있고. 이래서 네가 안 되는 거야! 8년 차 대리, 내년에도 대리. 만년 대리!“ 비아냥이 도를 넘었고 지홍윤 대리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그러세요? 차장님은 운 좋게 정규직 전환되시고 덕분에 승진도 하셔서 참 좋겠습니다. 그전까진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눈치만 보던 사람이 말이에요. 근데 이 놈의 회사는 참 웃겨요. 직급이 오르면 오를수록 돈은 많이 받는데 일은 더 안 해도 되는 규정이라도 있나 봐요?”     

“아, 참나! 내가 강조했지! 가르쳐줘도 뭘 모르네. 관리자는 실무자가 아니라…….”     

제발 그 뻔뻔한 입 좀 닥치라고!


순간 지홍윤 대리가 소리를 질러 순식간에 반일식 차장의 육성을 잠재워버렸다. 한바탕 벌어진 싸움이 고조되면서 잠깐의 고요가 찾아왔다. 반일식 차장과 똑같이 딴짓을 하고 있던 천성구 과장은 양심에 찔린 듯 괜히 외부 전화를 받는 척을 하며 불편한 자리를 떠났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지홍윤 대리의 뺨에는 눈물을 흘렀다. 그 한 방울은 분노와 답답함, 억울함이 집약된 정수였다. 모두가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진 않았다. 그 모습이 꼭 장애물 없는 드넓은 초원에서 사나운 표범에게 무기력하게 물어뜯기는 톰슨가젤을 가엾이 지켜보는 물소들 같았다. 톰슨가젤은 숨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발악을 준비했다.


“……. 그 대단하신 실무자 관리와 책임이요? 뭘 관리하는데요? 제가 볼 땐 응원하는 야구팀 선수들 전력 관리를 더 열심히 하시는 거 같은데요? 그리고 뭘 책임지는데요? 결재할 땐 질문 한 번 없다가 실수 하나라도 나오면 전부 실무자 탓으로 몰고, 간부회의 갈 때마다 사업에 대한 건 아무것도 몰라서 국장님한테 안 깨지려고 똑같은 거 두 번, 세 번씩 물어보고 회의 들어가는 양반이! 도대체 뭘 책임진다는 거냐고요? 아, 됐어요. 저 그동안 많이 참았어요. 장점만 있는 회사가 세상에 어디 있겠냐 싶어서 마음 다잡고 계속 다녔다고요. 7년 간. 근데 여기는 회사가 문제가 아니에요. 당신 같은 사람이 문제지. 사람이 문제예요. 우리가 정말 같은 사람인진 모르겠지만.”


지홍윤 대리는 얇은 카디건과 에코백에 소지품을 챙겼다. 반일식 차장은 잠시 벌레를 씹은 표정으로 지홍윤 대리의 가냘픈 몸짓을 응시하다가 갑자기 표정을 바꿔 키득거리더니 차가운 한 마디를 던졌다.


나가.


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던 지홍윤 대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다시 뒤를 돌았다.


“뭐, 뭐라고요?”     

“아, 나가라고. 붙잡아주길 바라나? 그렇겠지. 너 이제 마흔이잖아? 계약직 직원이 그 나이에 어디 갈 데가 있을 리가 없잖아? 뭐 당신이 엄청 대단히 능력 있는 직원 같지만 그거 아니야. 착각이라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조금 더 했을 뿐이라고. “


어느새 천천히 춤을 추는 듯한 가벼운 발걸음으로 움직인 반일식 차장과 조각상처럼 복도 중앙에 굳어버린 지홍윤 대리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고 눈화장이 눈두덩이 주변으로 거뭇거뭇 번져있었다. 반일식 팀장은 그런 부하직원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쐐기를 박았다.


“회사는 당신 없어도 어떻게든 돌아가.”



학인은 기억이 희미해진 일을 반추하면서 자신의 작은 변화가 어찌 보면 대화도 몇 번 나눠보지 못한 지홍윤 대리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의 순종적인 태도가 5년이 지나 마침내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그의 영혼은 썩은 사과처럼 문드러졌다. 인내로 인한 부패. 두 사람은 표출하지 못하고 참았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그리고 안개로 가득하여 앞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앞에서 선택을 했다. 학인은 간신히 찾은 동아줄에 의지해 여전히 버티는 중이었다. 다음 결과가 어떨지는 다시 발이 지면에 닿았을 때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홍윤 대리는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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