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장소는 회사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호프집이었다. 대학교 상권이어서 직원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고 철 지난 인테리어로 늘 한적한 곳이었다.
칠이 벗겨진 테이블과 벽면을 채운 낙서들에서 고스란히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등받이가 없는 스툴에 학인을 포함하여 다섯 명이 앉아있었다. 일자리지원부의 김민지 주임과 윤상철 주임은 동기였고 나이도 같아 꽤 친했다. 그들보다 1년 선배이면서 학인보다 2년 후배인 신소희 주임은 붙임성이 좋고 수다스러웠는데 학인과 같은 기업지원부 소속임에도 팀이 달라 교류가 적어 데면데면했다.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신랄한 토론이 개시되었다. 하나같이 몸담은 조직을 향한 논평, 엄밀히 말하자면 교란종의 부적절한 품행, 더 나아가 개인이 품고 있는 사적인 불만들의 교류가 성행했다.
제일 먼저 김민지 주임이 기업지원부에서 탑다운 식으로 넘어온 사업에 대해 부당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강소기업 육성을 위한 바우처 사업'은 원래 기업지원부의 양호진 과장 담당이었는데 승진 후 새로 발령 난 반일식 부장에게 일자리지원부로 사업을 이전하자고 제안을 했던 터였다.
김민지 주임은 학인이 이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학인은 신중했다. 잠시 대답을 유보했고 찰랑거리는 잔을 빙빙 돌릴 때 갑자기 윤상철 주임이 끼어들었다. 눈썹이 짙고 각진 턱으로 강인한 인상과는 달리 평소에 입이 가벼워 마냥 신뢰할 수는 없는 인물이었다.
“어? 나도 양 과장님이 부장님 꼬셔서 사업 넘겼다는 얘기 들었는데?”
“너 뭐야? 누구한테 들었어? 박 대리님이 자기 팀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하지 말라 했는데?”
“순진하긴. 원래 소문이라는 게 여기저기서 다 새고 퍼지고 하는 겁니다. 아무튼 양 과장님 원래 정치질 잘한다잖아. 본인 업무 더 생기는 게 싫으니까 적당한 명분 하나 만들어서 적극적으로 어필했겠지. 어차피 반 부장도 천성구 차장 못지않게 일 안 하는 사람인 거 회사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고, 후배인 곽 과장님이 우리 일자리지원부에 있으니 거기로 넘기자고 했을 거야. 결국 힘없는 우리 일자리만 죽어나는 거지 뭐.”
대화가 무르익을수록 늘어난 빈병들이 하나둘씩 테이블의 여백을 채웠다. 매장도 의외로 떠들썩했다. 도무지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최신 아이돌 노래가 섞여 가게 안의 썰렁함을 메꿔주었다. 오고 가는 주제는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마트의 할인 코너럼 한 사람이 이 이야기를 꺼내면 우르르 몰렸다가, 또 다른 화제가 튀어나오면 다시 그리로 이목이 쏠렸다. 최근 주말마다 몰래 출근해서 탕비실에서 비밀스럽게 애정행각을 벌이다 발각된 경영기획부 유부남 과장과 계약직 주임의 불륜 일화가 주가를 올렸다. 남일에 담을 쌓고 일만 하다 이 소문을 이제야 접한 김민지 주임은 깜짝 놀라 마시던 맥주를 뱉었다.
“그래서 주임님이 휴직을 내신 거구나.”
하지만 역시 가장 몰입도가 높은 건 역시 회사 내부에 존재하는 만인의 적에 대한 이야기, 구룡산 두꺼비 반일식 부장에 대한 주제였다.
시작은 학인과 같이 그의 직속 부하직원으로 있는 신소희 주임의 한탄이었다. 승진한 뒤로 반 부장의 만행은 더욱 심해졌다. 일을 안 하는 건 고사하고 이제는 아랫사람을 거의 전용 비서처럼 부리려 했다. 그러다 직원들이 약간의 불만을 가진 기색을 보일 때마다 “나는 관리자니까. 책임을 지는 무거운 자리잖아. 그러니까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허들렛일도 너희 실무자 선에서 처리해야지. 안 그래?“라는 비슷한 레퍼토리를 뻔뻔한 표정으로 지껄였다.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신소희 주임의 하소연이 지홍윤 대리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학인은 후배들이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굳이 떠벌려 잊혀가는 일에 숨을 불어넣진 않았다.
5년 전, 그녀의 안타까운 죽음은 광고배너로 도배된 작은 지역 신문사의 사이트를 통해 게시되었을 뿐, 세상으로 널리 알려져 억울한 영혼이 성불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학인은 우연히 형사인 친구를 통해 그녀가 다이어리에 시 구절 같은 유언 하나를 남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 끝없는 고요와 암흑이 가득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토양 깊숙이 잠기고 싶다. 잉태의 기회를 박탈한 신의 뜻이 구슬프지만 혹여나 인간이 아닌 사탄을 낳을 염려로부터 미리 해방해 준 것에 나는 한 없이 기쁘다.>
한밤 중 근교의 어느 아파트 건축 현장에서의 추락사. 평상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던 그녀의 이타적인 성품처럼 투신도 최대한 인적이 드문 장소에서 이루어진 듯했다. 그런 지홍윤 대리가 가족에게 자신의 심적 고충에 대해 털어놓았을 리가 없었다. 은연중에 회사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정도만 짐작하던 그녀의 남편은 장례를 치르고 다음날 상복도 벗지 않은 채 사무실을 찾아왔다. 술에 취한 듯 광대 언저리에 홍조를 띤 40대 남성이 다짜고짜 ‘지홍윤 대리 괴롭힌 새끼 누구야? 관리자 당장 나와!’라는, 거의 울먹임에 가까운 고성을 지르며 범인을 색출하고자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비애로 사무친 홍윤 대리의 남편을 달래고 회의실로 데려가 차를 대접하며 응원의 말을 건넨 것이 바로 반일식 차장이었던 것이다!
“많이 힘드시죠? 일단 이 따뜻한 대추차 좀 드세요.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지 대리가 업무가 조금 많아서 가끔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긴 했습니다. 여직원들 말로는 그...... 불임도 아마 크게 한몫했다고 하고요.”
반일식 차장은 일부러 한이 맺힌 사람의 아픈 가정사를 언급하는 무례를 범했다. 그러자 정신줄을 거의 놓아 동공에 초점이 없는 이 젊은 홀아비는 마치 자신을 탓하기라도 하듯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며 대성통곡했다. 의도적으로 주의를 돌리려는 악랄한 계략이 먹힌 것이다. 얼굴에 희미하게 번졌던 미소가 이내 사라지고 그는 헛기침을 해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에...... 아무튼 잘 아시다시피 아주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직원이어서 회사에서도 중요한 업무를 도맡는 바람에 스트레스가 심한 것뿐이었습니다. 제가 중간 관리자로서 더 챙겼어야 했는데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혹시라도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이지만, 하늘에 맹세코! 직장 내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 굳이 예를 들자면 뭐 어떤 성희롱이라든가, 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반 차장은 이 문장을 특히 힘을 주어 강조했다) 불합리한 업무 지시 등의 괴롭힘은 일절 없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으니 회사를 향한 오해와 노여움은 부디 푸셨으면 합니다.
반일식 차장은 적대감이 줄어든 남편이 회사 건물을 나설 때. 끝까지 자신에게 갈 잠재적 피해를 축소하기 위해 두 손을 맞잡으며 불필요한 회사의 타격도 있으니 언론사의 인터뷰를 삼가달라고 덧붙였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어도 산 사람의 목소리는 귀하게 쓰이는 법인데. 함께 상사를 욕하며 거의 가족 행세를 하던 고인의 두 단짝 동료들(지 대리의 과거 사수이자 친한 언니인 9년 차 이상미 대리, 같은 팀으로 단짝인 6년 차 신혜숙 대리) 중 그 누구도 깜빡 속은 남편에게 실마리를 전해준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지레 겁을 먹었다. 신혜숙 대리는 자신의 괜한 증언이 혹여나 왜곡돼서 물의를 일으킬 염려로 동료의 안타까운 죽음을 외면했고, 이상미 대리는 애초에 ‘남의 집’ 일, 그러니까 자신이 개입하는 행동 자체가 오지랖이라고 판단했다.
어쩌면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던 5년 전의 비극적인 사건이 묻히는 바람에 별다른 경험적 자극(깨우침)을 받지 못한 교란종은 여전히 습관적 패턴을 고수하고 있었다. 여전히 자신의 경험과 생각만이 옳다는 편협한 사고로 주변인들을 괴롭혔다. 학인은 자신을 포함하여 그런 후배들이 가엾게 느껴졌다.
그간 쌓였던 저마다의 힐난이 테이블 위로 빗발치는 동안 학인은 그저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는 이렇다 할 대꾸를 하지 않았다. 원래 이러한 호소에는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피차 마찬가지인 처지에 학인에게 문제해결을 요구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애초에 그럴 거라는 희망을 품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이는 당선 확률이 극히 희박한 정치인에게도 최소한의 지지자들이 생기듯, 같은 집단에 속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일회성 하소연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후배들은 이런 선배의 존재를 높이 사고 학인을 치켜세워주었다.
“저는 대리님 같은 분 없었으면 진짜 퇴사했습니다.”
“저도요.”
윤상철 주임과 신소희 주임의 아부가 그리 기분 나쁘진 않았고 학인은 이에 기분이 좋아져서 나갈 때 지갑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