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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선 Oct 20. 2023

9. 요즘 같은 세상에 채용 비리가 어디에 있을까


“요즘 같은 세상에 채용 비리가 어디에 있냐고. 과정도 블라인드라서 나이는 물론이고 최종 학력까지 확인조차 못하는 정직한 세상인데 말이지. 괜히 욕심내서 서류 잘못 건드렸다가 걸리면 큰일 나.”


처음에 박석기 부장은 조카를 채용해 달라는 형의 청탁을 거절했다. 집안 내력인지 어려서 못 먹은 탓인지 빼빼 마른 체형에 집요한 성격까지 비슷했다. 박창희 주임의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홉 살 차이의 어린 동생이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자 어디 대기업 청탁처럼 큰 거 몇 장이라도 쥐어 줘야 해 줄 거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렸을 적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열다섯 살부터 중국집 주방에서 일을 한 큰 형의 손에서 큰 그는 은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옆에는 연달아 취직에 실패한 조카 창희가 다리를 저는 지 아비와 똑같이 간절한 눈으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작은 아빠. 딱 한 번만 기회 주시면 제가 회사에서 정말 부끄럽지 않은 직원이 될 수 있어요. 네?”


도대체 혈연은 무엇인가. 그는 훗날 문제가 터질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대신 조건이 있다.”


혼자만의 힘으로 서류를 통과해야만 그 뒤의 과정에서 손을 쓰겠다는 것. 그게 박석기 부장이 형과 조카에게 내건 조건이었다.


월급은 좀 적어도 장남인 창희에게 기름 쩐내가 가시지 않는 주방 대신 안정적인 직장을 꽂아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마지막 기회라 생각한 그의 형은 돈을 들여 조악한 자기소개서에 대한 컨설팅을 받았고 그의 아들은 1차 전형에 버젓이 통과했다.


조카는 약속을 지켰고, 이제 박석기 부장의 차례였다. 그는 전화로 소식을 듣자마자 인사팀장을 불렀다. 두 사람은 흡연자라는 공통점으로 유대가 있었다. 담배를 태우며 사담을 나누다가 은근슬쩍 본론으로 넘어갔더니 인사팀장은 아무 거리낌 없이 두 개의 서술형 문제에 대해 언질 해주었다.


면접 조작은 그것보다 쉬웠다. 경영지원부장을 제외하고 내부 면접관 선정위원회에서 운 좋게 박석기 부장이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외부 면접관이라고 해봤자 잘 아는 지역 대학의 교수들이었고 그들을 회유하는 건 한우에 소주 한 잔 곁들이면서 적당히 부탁하면 될 일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채용비리가 어디에 있냐고? 아무리 잘 지은 건물에도 틈은 존재했다. 이렇게 박창희 주임은 작은 아버지이자 상사인 박석기 부장 덕분에 취직에 성공했고 실망스러운 직원이 되지 않겠다는 자신의 다짐을 지키고자 했다.


박창희 주임은 흔히 중산층 집 자녀들을 싫어했다. 제대로 이룬 것도 없으면서 고생도 해본 적이 없는 탓에 늘 위아래로 불평불만이 끊이질 않았다. 또 엄청 유복하진 않아서 주도적인 삶은 꿈도 꾸지 못하는 주제 마치 비틀어진 세상에서 홀로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냥 구시렁거렸다.


진흥원에서 일을 시작해 보니 그런 놈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대단한 스펙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다른 양서류들 앞에서만 으스대는 놈들. 그런 놈들일수록 상사가 조금 뭐 좀 시키거나 뭐라고 하면 곧바로 노동부에 신고한다고 호들갑을 떠는, 비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도둑놈들이 너무 많았다.

만약 집에 빚이 있고, 부모 중 한 명이 보험도 안 되는 희귀병에 걸려 수발까지 들어야 하는 상황이어도 과연 저딴 나약한 소리를 했을까? 멀쩡한 사지로 일을 할 수 있음에, 꼬박꼬박 적당한 월급을 받을 수 있음에, 그런 훌륭한 조직을 먼저 이끌어 준 우리 선배들을 모실 수 있음에 감사할 줄 알아야지. 김창희 주임은 생각했다.


“범사에 감사하라. 모르나? 머저리 같은 새끼들. 밖에 나가면 지옥이야. 여기가 천국이라고.“


김창희 주임은 자신을 도우려다 약점을 잡히고 일찍 퇴직하게 된 작은 아빠를 떠올리며 더 악착같이 회사를 다니기로 마음을 먹었다. 더 이상 갈 곳은 없었다. 그에겐 회사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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