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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은 1주일 동안 교육과정을 마치고 3개월 간의 수습기간을 거쳐야 했다. 창희가 교육이 끝나고 경영지원부로 발령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바닥이 잿빛 대리석인 로비에서 작은 아빠인 박석기 부장과 언쟁을 하는 젊은 직원이 눈에 들어왔다. 근무시간에 사적인 통화를 하지 말라는 꾸지람에 직원은 반성할 줄 모르고 발끈했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 왜 저러는 걸까. 창희는 혀를 차며 남자를 흘기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진학인 대리였다. 멀끔한 외모에 적당한 키였지만 항상 눈을 가늘게 뜨고 무표정을 유지해서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나 보였다.
회사에서 진학인 대리는 어떤 의미로 유명했다. 보수적인 회사 문화를 바꾸길 시도하는 다크호스, 유일하게 바른 소리를 하는 잔다르크 등등. 창희는 아무리 상사라도 틀린 게 있으면 바로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듯한 진 대리 특유의 직진성이 거슬렸다.
도대체 자기가 뭐라고.
사무실은 늘 침묵했다. 가끔씩 울리는 민원 전화벨 소리를 제외하고는 시끄러울 날이 없었다. 대화가 단절된 어느 가정집의 모습과 흡사했다. 창희는 오히려 그게 좋았다. 회사는 회사다워야지. 드라마에 나온 장면처럼 친해진답시고 의미 없이 모여서 커피를 마시며 근무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때울 바에는 차라리 음주가무를 곁들인 회식이 나았다. 거기엔 최소한 상사들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라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진학인 대리는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걸까? 그의 저돌적인 태도가 이해는 안 갔지만 창희의 머리에 궁금증이 새겨졌다. 창희는 거북목 자세로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옆자리의 강원빛 과장에게 진 대리의 신상을 묻고 싶었지만 딱히 뭐라고 이유를 대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러다 문득 수습이 끝나고 인사관리팀에 발령이 난 후부터 시스템 상 인사기록에 접근 권한이 생긴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지방대 학사 출신, 자격증도 뭐… 컴활 1급, 무역영어 1급에 별거 없고. 토익 810.”
쥐뿔도 없으면서 주제넘게 엘리트 행세를 하다니. 창희는 자신의 스펙과 크게 다를 게 없는 진학인 대리를 그저 사회 적응력이 한참 떨어지는 선배 정도로 생각하며 인사기록카드 창을 닫았다.
두 달이 더 지나서 추석 명절을 맞이했다. 숨 막히게 뜨겁던 여름의 열기가 어느새 식고 선선한 바람이 피부를 간지럽히며 가슴을 설레게 했다. 20평짜리 비좁은 빌라에는 장남인 아버지 탓에 많은 친척들로 북적거렸다. 창희는 당당히 문 앞에서 친척들을 맞이했다. 설날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이제는 번듯한 직장이 있었고 더는 ‘어디 취직은 했니?’라는 걱정이 담긴 질문공세에 시달리지 않아도 됐다. 보통 어른들은 뭐 하는 곳인진 잘 몰라도 ‘기관’을 참 좋아했다.
저녁이 돼서야 마침내 은인이나 다름없는 박석기 부장을 마주했다. 늘 잘 다려진 셔츠에 정장만 입고 다니던 작은 아빠가 퇴직 후 보라색 등산복 차림으로 나타나자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였다. 그래도 표정은 한결 편해 보였다. 그가 사무실에서 항시 쓰고 있던 예민한 고양이 가면(직원들이 우거지상이라 부르던, 팔자주름이 깊게 파인 그 암울한 표정)을 벗고 빈자리를 인자함이 가득 메웠다.
“창희. 요즘 어때? 회사 잘 다니고 있지?”
“네, 작은 아빠. 덕분에 너무 좋습니다.”
창희는 얼굴이 더 좋아 보인다는 인사치레를 건네고 문득 생각난 진학인 대리에 대해 물어보았다.
“진학인? 진 주임은 왜?”
학인이 박 부장이 나가기 직전에 대리로 승진한 탓에 박석기 부장에게는 여전히 주임이란 호칭이 더 편했다(그는 실제로 대화가 끝날 때까지 학인을 주임이라 불렀다). 우물쭈물하던 창희는 어쩐지 회사 분위기를 흐리는 안하무인 같아서 궁금하다는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아니야, 그 반대지. 말대답 한 번 안 하고 말 잘 듣는 직원이지.”
“네? 진짜요? 하지만 부장님께 막 대들고 그랬잖아요?” 의외의 반응에 창희가 되물었다.
“아! 뭐 말년에 갑자기 좀 이상해지긴 했던 거 같은데. 원래는 뭐 좀 부탁하면 곧잘 하던 놈이 별 것도 아닌 거에 싫다고 거절을 하질 않나! 그래도 우리 회사에 그만한 직원이 없어. 걔가 그래 보여도 원래 서류랑 필기 점수가 낮아서 탈락 위기였는데 면접 1등으로 뒤집고 선발된 직원이야! 창희 너처럼 내가 직접 면접 들어가서 내 손으로 뽑았거든.”
“대리님은 뭐가 그렇게 뛰어났었나요?”
“서류도 그렇고 걔가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엄청 특출나진 않았어. 근데 면접관 앞에서 떨지도 않고 말도 똑 부러지게 잘하고 말이야, 또 눈빛도 살아있고. 이놈아, 내가 네 선배로서 중요한 사실 하나 말해주마.” 박석기 부장이 다리를 고쳐 앉으며 창희에게 다가갔다.
“지역에 있는 공공기관이든 중소중견 기업들은 너무 ‘나 잘났어요’ 하는 사람을 굳이 뽑을 필요가 없는 거란다.”
“왜요? 당연히 스펙 좋은 사람 뽑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창희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박석기 부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적당한 사람. 튀지 않고 이미 형성되어 있는 생태계에 잘 녹아들 수 있는 수용적인 사람. 자신을 희생할 줄 알고 오래갈 수 있는 사람. 그게 바로 우리한테는 인재야.”
작은 아빠가 인정한 직원이 진학인 대리라니. 창희는 부푼 마음을 품고 학인이 낀 술자리에 적극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혔다. 간절함 없는 가짜 인재들이 아닌 진짜배기. 그런 선배와 친해져야만 창희는 날개를 달고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 외에 현재의 처지에 감사할 줄도 모르고, 불평불만을 일삼으며 희생정신은 개나 줘버린 또래의 선후배들은 암이었다. 근묵자흑. 창희는 현시점에서 안 좋은 사상에 물들지 않게 경계하는 자세가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인은 완벽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는 이 소중한 곳(창희에게 회사)과 희생정신으로 역사를 일구어 후배들에게 길을 터준 숭고한 선배들을 욕하고, 폄하하고 심지어 타락시키고자 했다. 로비에서 목도했던 진 대리의 무례한 언행. 그 모습이야 말로 타락한 진학인 대리의 참모습이었으나 순진한 박석기 부장은 그것도 모르고 자신의 후배를 두둔했다.
"괜찮은 애야. 나는 우리 조직을 정말 사랑해. 그러니까 너도 진 대리처럼 열심히 해야 해."
창희는 굳이 이 슬픈 소식을 작은 아빠에게 전하지 않았다. 그저 반드시 자신이 그의 뒤를 이어 소중한 조직과 전통을 지키겠다고만 약속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고 이 접촉은 바통 터치를 의미했다.
연휴가 끝나기 하루 전날, 창희는 홀로 사무실에 출근했다. 사무실 형광등 스위치가 있는 입구 끝 벽 쪽으로 걸어가면서 진학인 대리의 자리를 잠시 훑어보았다. 책상은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했고 옆에 쌓인 서류 뭉치들도 흐트러짐 없이 정돈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변했고, 25년의 세월 동안 축적된 사내 질서를 무너트리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 놈은 내가 막아야지. 범사에 감사할 줄 몰고 날뛰는 직원은 자연스레 도태되는 게 순리지. 창희는 비열하게 웃으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