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히 들어가세요.”
차문이 닫혔고 택시 바퀴가 물웅덩이를 지나며 수면을 갈랐다. 갑작스러운 새벽녘의 부슬비를 맞으며 학인은 비틀비틀 걸었다. 눈앞이 팽팽 돌았다. 내일 출근인데 너무 생각 없이 마셨구나. 그는 늦은 후회를 뒤로하고 귀가를 재촉하다 문득 마지막 대화를 반추했다.
1차가 끝나고 버스 막차 시간을 이유로 신소희 주임과 김민지 주임이 빠졌지만 아쉬운 윤상철 주임의 고집으로 자리를 옮겨 술을 더 마셨던 터였다. 학인은 애니메이션 피규어가 잔뜩 진열된 작은 선술집에서 마침내 그림자 같던 김창희 사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들어온 지 5개월 남짓 된 신입사원이었는데, 로비에서 우연히 만난 네 사람에게 먼저 다가와 자신도 저녁 모임에 데려가주면 안 되냐며 애원하듯 말을 걸었다. 학인은 처음에 마르고 어딘가 병약한 분위기를 풍기는 김창희 사원이 끼는 것이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하지만 2차에서 윤상철 주임과 대화를 풀어나가는 기묘한 방식을 목격하고는 그에게 형용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
마감 직전에 들어온 손님을 차마 거부할 수 없는 주인의 불편한 시선을 무시하고 세 사람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우측 벽을 장식한 고양이 모양의 장식이 멈출 줄 모르고 위아래로 팔을 흔들었다. 배가 부른데도 후라이드 치킨을 주문했고 곧 주방에서 기계음과 함께 고소한 튀김냄새가 퍼졌다.
윤상철 주임은 이미 꽤나 취해있었다. 말투가 부정확하고 자꾸만 포크를 떨어트렸다. 각진 턱 근처로 거뭇거뭇한 수염이 올라와있었고 피곤으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 위해 눈을 부릅뜨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반면 박창희 사원은 얼굴은 붉은 기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에 말에 따르면, 선천적으로 알코올 분해효소가 없어서 술을 한 잔도 마시지 못하는 체질이라고 했다. 1차에서 의심 많은 윤상철 주임이 여러 번 잔을 채워주려 했지만 박창희 주임이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을 보고는 권유를 그만두었다.
세 사람 중에 제일 먼저 입을 연 것도 역시나 윤상철 주임이었다. 그는 말이 많았다. 또한 모든 부서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수다를 떨 만큼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자신의 첫 후배에게 회사생활 어떠냐는 진부한 질문을 던졌고 아니나 다를까 박창희 주임은 답변에 뜸을 들였다.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직원 분들도 다 너무 친절하십니다.”
“에이 좋기는! 다 이미지 관리 하는 거지. 원래 처음엔 다 그래요. 조금 지나면 달라질걸요?” 윤상철 주임이 일부 선배들을 겨냥해 말했다.
그런데 비아냥을 들은 박창희 사원이 갑자기 고개를 까딱거리며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반응이 조금 전까지 움츠려있던 모습(그는 주로 말린 어깨 아래로 보이는 얇은 허벅지를 붙이고 조신하게 앉았다)과는 너무나 상반되어서 학인은 흠칫 놀라 옆에 앉아 있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창희 씨 왜 그렇게 웃어요?”
“그냥 웃겨서요. 근데 그건 누구나 다 그러죠.”
“네?” 윤상철 주임이 반문했다.
“아니, 세상에 그러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두가 그렇죠. 솔직히 지금 주임님도 속내를 전부 드러내진 않을 테니까요. 다들 가면 하나씩 쓰고 사회생활하는 거죠.“
“아……. 너무 꼬아서 듣는 거 아니에요? 뭐 내가 불편하게 했어요? 그래도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인 건데 너무 적대적으로 그러지 말죠, 우리. ” 그러자 곧바로 그의 태도가 더 저돌적으로 변했다.
“불편이요? 전혀요. 저는 그냥 제 생각 그대로를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마음 맞는 사람들. 틀린 말은 아니죠. 근데 제가 오늘 지켜보기엔 약자들의 일시적이고 깊이가 아주 얕은 동맹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이 동맹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각자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편이 갈라지겠죠. 분명 언젠가 라인을 타고 서로의 험담을 해서 등에 칼을 꽂는 추태를 부릴 겁니다. 원래 인간이란 간사하니까요.“
취기가 오른 윤상철 주임은 크게 놀랐고 친하지 않은 후배의 도발적인 태도에 약이 오른 듯했다. 당황한 그는 할 말을 잃은 채 입을 벌리고 몇 초 정도 박창희 사원을 노려보다가 담배를 피우겠다며 비틀비틀 밖으로 자리를 피했다.
어색한 기류 속에 두 사람만이 남겨진 가운데 학인은 그만 끝내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잘 튀겨진 치킨에서 여전히 따뜻한 김이 올라왔다. 막 일어나려는 참에 박창희 주임이 다시 입술을 씰룩여 팔자 주름을 만들고 학인에게 말을 걸었다.
“대리님. 저는 대리님 만큼은 존경합니다. 진심입니다.”
그의 고리타분한 말투는 시대와 그의 나이를 완전히 초월한 것처럼 이질감이 느껴졌다. 마치 홀로 연극 무대에서 분투하는 연기자처럼 느껴졌다. 학인은 여전히 악성 아토피처럼 피부를 간지럽히는 불편함을 견디며 조심스럽게 다시 방석이 깔린 의자에 앉았다.
“아, 그런가요? 근데 창희 씨 우리 서로 아직 잘 모르지 않나요?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본 적도 없고요.“
“아니요. 저는 진 대리님의 이야기를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배울 점이 있는 선배님이시죠.”
“배울 점이요?”
“네. 요즘 또래를 보면 끈기도 없고 불평불만만 하는 사람들 밖에 없지 않습니까?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처지에 놓였는지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말이죠.”
“무슨 말인지 잘…….“ 박창희 주임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아까 김민지 주임님의 이야기만 해도 그렇죠. 기본적으로 업무처리 속도는 업무의 익숙함의 정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당연히 경력이 오래된 상급자와 하급자는 익숙함의 정도가 확연히 다르죠. 경험 없는 하급자의 눈에는 그저 농땡이를 피우고 있는 것 같아 보여도 결국 업무량은 상사가 훨씬 많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조직의 구조가 그렇습니다. 아는 게 쥐뿔도 없는 말단 직원에게 많은 양의 업무를 줄 수도 없을뿐더러, 큰 책임을 지울 수는 더더욱 없죠. 그런데 저연차 직원들은 이러한 속사정은 꿈에도 모른 채 자신보다 빨리 일을 처리하고 효율적으로 쉬고 있는 상사의 겉모습만으로 비난하곤 하는 거죠. 그런데 대리님은 그러시지 않았죠. 늘 윗사람을 따르고 존경하고, 배우는 자세로 회사에 헌신하는, 우리 진흥원에 가장 잘 뽑은 직원이라고 들었습니다. “
“아니요.”
박창희 주임의 장광설을 학인은 부인했다. 조명이 두 사람의 얼굴을 수직으로 투사하면서 이목구비 아래로 그늘이 졌다.
“창희 씨의 생각이 맞는 부분도 있죠. 하지만 최소한 여긴 아닙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판단해 봐도 무책임한 사람, 무능력한 사람 등 생태계를 흐리는 교란종이 너무나 많아요.“
“네? 대답이 많이… 의외시네요. 대리님은 몇 년 전부터 아주 애사심이 강한 직원이라고 들었습니다.”
“한 땐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네요. 아까 윤상철 주임이 했던 말 기억나요?“
“처음에만 잘해준다는 그 말 말입니까? 그런 것 따위 솔직히 아무 상관없습니다. 저는 잘해주시던 안 해주시던 제가 잘해서 인정받고 싶은 사람이거든요.”
아까의 존경이 담겼던 박창희 사원의 시선은 이제 멸시가 담긴, 윤상철 주임을 바라보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학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선배들의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마치 자신이 직접적인 모욕이라도 받은 것 같은 모멸감이 해골 같이 마른 몰골에 퍼졌다.
“그렇군요. 창희 씨야 말로 진정으로 회사가 탐날 만한 인재네요. 이 가면무도회 같은 조직 속에서 무대에 올라 스포트라이트 받을 수 있는 역할은 창희 씨 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밖에서 윤상철 주임이 괴롭게 속을 게워내는 소리가 들렸다. 학인과 박창희 주임은 서로 다른 가치관 속에서 소리 없는 싸움을 벌이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겉도는 도로는 텅 비어있었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윤상철 주임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멀리 어둠을 뚫고 허연 불빛이 보였고 학인이 간신히 손을 흔들자 신호를 무시한 차가 즉각 달려와 세 사람의 앞에 멈춰 섰다.
윤상철 주임을 태운 택시가 떠나고 학인은 다시 뒤를 돌았다.
“근데 창희 씨 내가 예전에 그랬다는 얘기는 누가 해줬어요?“ 또다시 뜸을 들이던 박창희 주임의 대답은 학인을 충격에 빠트렸다.
“작은 아빠가요. 박석기 부장이 저희 아빠 동생이시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