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24-26 14화

저수지의 개들

by 김토끼

학교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데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형이 신청한 사물함이 문제가 있어서 과방으로 다시 오셔야 할 것 같아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저번 주에 신청한 사물함인데 이제 와서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도 화가 나고, 보던 영화를 중간에 끊고 나와야 한다는 것도 화가 났다. 하지만 학기 중에는 사물함이 꼭 필요했다. 별수 없이 도서관을 빠져나와 과방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나는 대학생이다. 3월 첫 주에 개강하여 학교에 다니고 있다. 꽤 고학번이라 아는 선배, 동기, 후배는 대부분이 졸업한 상태여서 아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수업과 수업 사이에 시간이 많이 남으면 혼자 있을 곳이 마땅치가 않은데, 이때 나는 주로 학교 도서관에서 영화를 본다. 학교에서는 도서관에서 DVD를 대여해서 볼 수 있는 공간을 14년도부터 만들어두었다. 내 등록금으로 한 일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리도 소파라 편하고, 다들 바쁜지 자리가 모자랄 일도 없어서 난 이곳을 좋아한다. 오늘도 다음 수업이 2시간이 넘게 남은지라, 말로만 듣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저수지의 개들’이라는 영화를 보기 위해서 도서관에 갔었다. 하지만 30분 정도 보았을까. 그때 후배에게 전화가 온 것이다. 영화는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한 명을 제외하고는) 음식점에서 대화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서로의 본명은 부르지 않는지 호칭은 미스터 오렌지, 미스터 블론드 등등의 별칭이다. 마돈나의 노래에 대해서 시시콜콜 따지던 그들은 ‘오션스 11’의 주인공들처럼 보석 강도들이다. 보석을 터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보석을 터는 과정에서 한 명은 총에 맞고, 두 명은 죽는다. 총에 맞은 사람을 둘러업고 미스터 화이트는 약속된 장소로 간다. 뒤이어 미스터 핑크가 들어오고, 의문을 제기한다. 경보기를 울리고, 경찰이 오려면 4분 정도가 걸린다. 하지만 경보가 울리기도 전에, 가게의 밖에는 경찰들이 무장을 한 채로 대기 중이었다. 무리 중 경찰의 첩자가 있다는 것이다. 미스터 화이트는 그 생각에 동의하며 있던 일을 다시 떠올려 본다. 여기까지가 내가 본 내용이었다. 영화는 이제 막 흥미진진해지려던 참이었다. 다음에 이 영화를 언제 볼 수 있을까. 개강한 첫 번째 주에는 동아리에서 연극을 올려야 해서 바빴다. 나는 후배들이 도와달라고 해서 중간에 짧은 역할로 출연하기로 했다. 분량은 아주 짧았지만 공연이 1주일도 남지 않아서 연습은 같이했다. 공연장에 조명과 암막도 설치해야 해서 수업시간을 제외하고는, 심지어 공연 당일에는 수업시간에도 빠져가며 공연장에 있었다. 그래서 첫 번째 주에는 영화를 볼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난 두 번째 주부터 도서관에 영화를 보러 갔던 것이다. 하지만 월요일엔 영화를 볼만한 시간이 없었다. 오늘은 시간이 그래도 많은 편이지만 학생회 후배가 사물함 신청을 잘못 처리하는 바람에 시간을 버리는 중이었다. 수요일에는 학교 수업이 없고, 축구를 하러 가는 날이기 때문에 학교에 가지 않는다. 목요일은 학교가 끝나고 보려면 볼 수 있지만, 맥도날드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가기로 했기 때문에 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야 한다. 금요일에는 여자 친구와 약속이 있다. 앞으로 있을 일정들을 생각하니 학교에 다시 다니고 있구나 하는 게 실감이 났다. 게다가 앞으로 있을 과제와 시험, 그리고 면접에서 붙는다면(사실 떨어져도 다른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한다.) 아르바이트까지. 내가 한 달 동안 해야 할 일을 A4용지에 옮겨 적으면 아마 글자로 가득 차서, 멀리서 보면 검은 종이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일을 다 하진 않겠지만 갑자기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과방에 도착했다. 우리 과는 한 학기 혹은 1년 동안 사물함을 대여해준다. 5천 원을 내면, 우리 과 소유의 빈 사물함을 1년 동안 내가 쓸 수 있다. 책을 많이 들고 다니면 힘들 같은 과 사람들을 배려해주는 것 같다. 하지만 돈을 내라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도 같고. 그런 사물함을 내가 신청했던 것인데, 학생회 후배의 설명을 들어보니 내가 쓰겠다고 했던 사물함의 번호가 예전에 누가 먼저 신청해놨던 번호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 사물함에 신청자 두 명을 받은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 처리와 내가 보던 영화가 생각나서 화가 났지만, 사람이 바글바글한 과방에서 따질 수는 없었다. 나이 많은 사람이 따지는 순간, 요즘은 바로 ‘꼰대’가 되어 버린다. 심지어 이 사람들이 잘못한 것인데도 말이다. 마음속으로 심호흡을 하고 푸른 나무를 상상했다. “그럼 내가 다른 사물함을 쓸게.” 최대한 웃으며 말하려 노력했지만, 내 표정은 어땠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71번 사물함을 1년간 쓰게 되었다. 뭐 사실 번호야 어떻든 상관없었다. 그냥 무거운 책들을 학교에 놓고 다닐 사물함이 필요했었으니까. 학생회의 허접한 일 처리는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하지만 내가 보던 영화는 아직도 아쉬웠다. 앞으로 내가 영화를 보러 갈 기회가 적다는 것에 더더욱 그랬다. 이번 학기가 끝나기 전에 영화를 몇 편이나 볼 수 있을까. 아니, 내가 보던 저수지의 개들이나 다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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