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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토끼 Oct 22. 2023

Self-Disrespect

극장 스케쥴은 유동적이었다. 우선 공연이 없는 기간에는 연습실, 극장 대관 사업을 했다. 대관팀이 극장에 들어올 때 우리는 옆에서 극장 이용 방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또 대관팀이 그날 하루를 마무리하고 나갈 때는 극장에 문제가 없는지 장비와 시설을 확인해 봐야 했다. 대관팀이 극장을 사용하다가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극장 근처에 상주하고 있어야 했다. 코로나가 심하던 시기에는 마무리를 하며 극장 방역을 위해 청소를 하고, 소독을 했다.     


연습실도 마찬가지였다. 연습실을 빌린 팀이 연습실에 올 때 문을 열고 맞이를 해 주어야 했다. 코로나가 심하던 시절에는 QR 코드로 인증을 받고, 인원마다 열을 재고는 했다. 열이 나는 사람은 죄송하지만 집으로 돌아가 달라고 하기도 했다. 연습실 하루 스케쥴이 마무리 되거나 –보통 밤 10시 쯤- 한 팀에서 다른 팀으로 넘어가는 시간대가 되면 연습실로 가야 했다. 다음 팀이 연습을 하기 전에 연습실 청소를 하고, 연습실에 있는 화장실 청소를 했다. 또 코로나 때문에 방역기로 소독액을 뿌려야 했다.     


방역기는 극장에 한 대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극장, 연습실을 오가며 방역기를 들고 다녀야 했다. 방역기에 소독액이 들어가면 꽤 무거웠다. 자세한 무게는 모르지만 소독액을 가득 채우면 6-7Kg은 되었던 것 같다. 그걸 들고 극장-연습실, 한 7분 정도의 거리를 걸어다니는 것은 꽤 힘들었다. 어쩔 때는 서울시에서 나눠준 소독액을 옮겨야 할 때도 있었다. 소독액은 한 통에 15Kg정도 된 것 같았다.      


공연을 하기로 결정되면 하루종일 연습을 했다. 공연은 주로 극장 대관이 되지 않을 때, 극장을 그대로 놀릴 수는 없으니 하게 되었다. 물론 3-4달 전부터 하루 종일 연습을 한 것은 아니다. 3-4달 전에는 하루에 4시간 정도 연습을 했다. 그리고 공연이 임박했을 때는 제한 시간을 두지 않고 연습을 해야 했다. 10시, 11시가 넘어가는 것은 일상이었다. 물론 그러다가도 장면이 잘 나와서, 연습이 마무리되면 뿌듯하기는 했다. 또 1달 전 정도부터는 무대를 세팅해야 한다. 극장 벽면에 타공기로 여기저기 구멍을 뚫고, 칼블럭을 박은 다음 피스로 여러 물건을 고정시켜 놓았다. 유리로 된 자동문을 무대에 만든 적도 있다. 바닥과 벽 모두를 나무 바닥으로 덮은 적도 있고, 세 면에 큰 칠판을 달아 놓기도 했다. 이 작업은 보통 새벽까지 진행된다.    

 

무대가 모두 완성되면 이제 조명을 달아야 한다. 조명을 위치에 맞게 달고, 전원을 연결한다. 그리고 하나하나 켜 보며 연출의 의도에 맞게 조명 포커싱을 했다. 각 조명이 어디를 비추고, 어느 위치에 어떤 조명을 쓰는지 정한다. 조명을 다는 것이 끝나면 무대에서 장면을 진행하며 어떤 조명들을 어느 정도의 밝기로 비추면 좋을지 정한다. 우리는 이걸 통틀어 조명작업이라 불렀다. 때로는 대관팀이 돈을 조금 더 지불하면 우리가 대관팀 연극의 조명을 세팅해 주기도 했다. 조명작업은 정말 끝 나는 시간이 미지수다. 한 번은 새벽 5시에 집에 들어 가기도 했다. 그것도 나는 다음 날 일이 있어서 먼저 퇴근한 거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른 사람들은 아침 11시 까지 조명을 잡았다고 한다.     


공연 기간에는 공연에 매진했다. 공연은 보통 저녁 7시쯤 시작했다. 그러면 1~2시 쯤 모여서 몸을 풀고, 리허설을 한다. 리허설은 일종의 준비운동이다. 실제로 리허설을 하고 공연에 들어가는 날과, 리허설을 생략하고 공연에 들어가는 날의 컨디션은 매우 달랐다. 리허설에서 실수가 나올 수도 있다. 만약 리허설이 없었다면 그 실수는 그날 공연에서 나왔을 것이다. 리허설을 통해 공연을 예습하고, 실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 셈이다.      

나름 빡빡한 스케쥴 속에서 돌아갔지만, 슬프게도 이 일이 생계를 보장해 줄 수는 없었다. 즐겁고 뿌듯한 순간들이 집 월세, 가스 요금을 내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 극단 단원들은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공연 기간에는 1~2시에 모여야 하다 보니 오전에 하는 일을 찾아야 했다. 아니면 밤에 하는 일을 찾거나. 보통 사람들은 식당 오전 아르바이트를 했다. 피시방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쉬는 날에도 나갈 수 있는 쿠팡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나는 극장에 들어온 초기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했던 신문 기사 쓰는 일을 했다. 월요일은 출근, 나머지는 재택 근무다 보니 시간에 구애받지는 않았다. 그래서 보통 연습이 있거나 대관 스케쥴이 있는 날에는 극장 일을 마치고 새벽에 일을 하곤 했다. 피곤하긴 했지만 괜찮았다. 나보다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니까.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내가 일하던 회사는 결국 신문 컨텐츠에서 손을 뗐다. 어느정도 예상이 가능한 일이었다. 중간에 시간제에서 하루 할당량(일주일에 기사 12개)으로 일하게 되고 월급이 줄어들었을 때부터 나는 새로운 일을 찾았다. 아마 그때 했던 일이 밤에 극장 근처 카페 청소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카페 청소는 주 4일, 카페가 마감하면 아무 시간에나 나가면 됐다. 그러니까 11시부터 오픈하기 전까지인 아침 8시 사이 아무 때나 2시간만 일하면 되는 아르바이트였다. 극장 스케쥴이 있는 나로서는 굉장히 좋은 조건의 일이었다. 일도 간단했다. 그냥 카페 구석구석을 쓸고, 닦으면 됐다. 귀찮은 설거지 같은 일도 없었다. 

     

카페 청소와 인터넷 신문 일을 병행하다가 신문 일을 안 하게 된 뒤, 월세를 내기가 빠듯해 졌다. 월세를 내면 생활비로 쓸 돈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주일에 한 두 번 씩 쿠팡 물류센터에 나가 일을 했다. 새벽에 갔다가 아침에 돌아오는 스케쥴을 주로 신청헀다.     


쿠팡 일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가자마자 바로 앞에 보이는 트럭에 물류를 싣거나 물류를 빼는 이른바 ‘상하차’가 아닌 이상 몸이 힘들 일은 거의 없다. 나는 물건을 사물함 같은 곳에 실어 나르며 등록하는 일이나, 작은 수레 같은 걸 끌며 등록할 물건을 나르는 일을 주로 했다. 이런 일은 어렵지 않다. 또 하다보면 재밌기도 하다. 하지만 8시간이나 일을 해야 하니, 시간과의 싸움이 관건이다. 쉬는 시간에는 밥을 주는데 그 시간이 아까워서 밥을 안 먹고 의자에 늘어져서 앉아 있던 적도 있다.    

  

그렇게 8시간을 일하고 집에 가면 대략 8만원 정도를 받는다. 새벽에 하는 일은 9만원, 주간에 하는 일은 7만원 정도 받은 것 같다. 그렇게 돈을 받으면 어찌어찌 생활은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정 안되면 엄마 아빠에게 손을 벌리기도 했다. 28살이 되어서도 용돈을 받아야 할 줄이야. 자괴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밥은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선인들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겪어본 바로는 춥고 배고픈 것은 상당히 참기 힘들다. 그래서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이루기 어려운 목표라고 하는 거겠지만.     


좋아하는 랩퍼의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알바 뛰는 신세. 그건 예술가에게 있어선 Self-Disrespect.’ 본인의 예술적인 컨텐츠를 이용해 자기 밥벌이를 못한다면 스스로에게 망신살이라는 의미다. 맞는 말이다. 내가 예술가로서 재능이 뛰어나고 그만큼 고민을 많이 했다면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런 미래는 내겐 너무 멀어 보였고, 당장 월세를 낼 돈이 수중에 없어지니 아르바이트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꿈을 좇아서 그렇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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