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이 어둡다. 아직 퇴근 시간도 아니건만 어둡고 비가 당장이라도 내릴 분위기다. 부서장이 며칠 전부터 입찰 수주 성공 기념 회식날이라고 비우라며 말하던데 그냥 집에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든다. 비오는 날은 막걸리지 하면서 머리가 아프도록 마셔라 하지나 않으면 좋으련만.
얼마나 마시려고 그러는지 퇴근시간 1시간전에 회식도 근무니까 다 같이 먼저 가서 마시자고 한다. 근무니까 1시간만 하고 가시죠 하고 싶지만 분위기가 영 그렇지 않다. 특히 역시 부서장님 이러면서 맞장구 치는 걸 보면 먹고 살려니 그러지 싶으면서도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었기에 저러는지 싶기도 하다. 하긴 저러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
불길한 예감이 맞았는지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회사 근처 막걸리에 전이 나오는 집에 들어갔다. 입구에서부터 기름 냄새가 가득 퍼지는데 옷에 냄새 밸까봐 걱정하는 건 나뿐인거 같음. 각자 앉아서 먹고 싶은 걸 고르라는데 엉겁결에 모듬전을 말해버렸다. 그 순간 역시 우리 에이스는 다양한걸 추구하는 군이라는 말이 돌아온다. 에이스면 매달 스쳐 지나가시는 페이님도 에이스 같이 보내주시면 안되나 싶은데.
내가 회식을 싫어하는 건 사실 술이 싫어서도 먹는게 싫어서도 아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지만 말이 안통하니 싫은건데 이런걸 말하면 부적응자라고 낙인 찍히기 딱 좋다. 막걸리가 좀 들어가고 나니 남자직원들은 본인들끼리 게임이니 주식 얘기 하고 있고 여직원들은 모여서 드라마 얘기, 주말에 놀러간 얘기, 아이가 있는 엄마는 우리집 애가 얼마나 똑똑한지 얘기를 늘어놓으며 웃는다. 본인이 드라마 주인공도 아니고 본인이 똑똑한 것도 아니면서 그런 얘기 하면 기분 좋나 싶은데 그걸 듣고 다같이 까르르 웃는 걸 보노라니 끼어들면 왠지 안 될 분위기다.
뜬금없이 AI이야기가 나왔다. 팀장이 뭐가 좋고 아까 물어보니 어떻고 하면서 활용하라는데 걱정이라길래 무심결에 A는 일반용으로 C는 전문용으로 분류해서 쓰면 편하다고 말해버렸다.
평소 업무가 달라 서로 아는 척도 안하던 오과장이 아 그러면 과장님이 이거 다 해주시면 좋겠다며 웃는데 순간 뭐 잘못 들었나 했다. 무심결에 한 말이지만 나름 도와주려고 말한건데 그걸 저따위로 말해야 하나, 제정신인가.
순간적으로 그러면 본인 페이 내가 다 받아도 되냐고 하려다가 내일도 얼굴봐야 하는데 싶어서 참으려는데 내가 표정 싸해진걸 본 팀장이 서로 좋자고 하는 말인데 뭐 그리 민감하냐고 에이스가 참으라며 오히려 나를 나무란다. 아, 어이가 없네. 다시 아무일 없다는 듯이 드라마 얘기를 하는 이들을 보며 사람을 지능만으로 우열을 가르는 건 잘못이지만 이 순간 가장 객관적으로 상대를 평가 가능한 지표는 지능밖에 없을 거 같은데 싶다.
다행히 7시 좀 넘어서 2차 갈 사람들 2차 가고 나는 바로 퇴근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1시간 야근이다. 그것도 돈쓰고 시간 쓰면서 기분은 더 안 좋게 되는 진짜 비효율적인 야근. 오과장이 노래 부르며 풀자고 했지만 나는 대중가요 안 들어서 아는 노래가 없다고 하고 퇴근했다.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켠다. 그래 비오고 기분도 별로인데 오늘은 말러 교향곡 6번이나 들으며 이어폰 속 세상이라도 재구성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