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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집 이야기 May 26. 2017

구버전의 나에게

-오래된 습관에 반응하기-

오래된 습관들이 있다.

책상에 앉으면 커피를 마셔야 한다. 방금 커피를 마시고 들어왔더라도 책상에 앉는다는 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커피 한잔이 꼭 필요하다. 서점에서 구입한 책은 끝까지 읽지 않게 된다.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다 읽고 마음에 드는 책만 구입한다. 너무 좋은 물건을 사면 아까워 편히 쓰지를 못한다. 적당한 가격의 물건을 사서 쓰는데 오히려 잊어버리지도 않고 잘 망가지지도 않아 오래도록 두고 쓴다.


정리 정돈을 잘 못한다. 책상 위에서 항상 가위를 찾는다. 가위를 쓰고 제자리에 두는 것보다 빨리 내려놓고 다음 걸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라고 변명해 본다. 누군가 새로운 곳을 안내하지 않는 이상 식당도 카페도 가던 곳만 간다.


첫 회사를 다니던 시절 버스를 타고 와서 횡단보도를 건너 지하철을 타고 퇴근했다. 횡단보도를 건너야만 아침에 내가 나온 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회사 앞에 찾아온 친구가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아도 입구가 있다는 걸 알려 주었다. 그 뒤 새로 발견한 출구를 이용했는데 이 출구가 기존과는 반대 방향인걸 생각 못해 몇 번이나 지하철을 반대 방향으로 탔었다. 결국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기존의 방법을 다시 택했다.


이런 것들은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일부분 이다. 정리 정돈을 잘 못하고 방향치에 늘 익숙한 것만 고집한다. 정돈에 대한 강박이 없으니 마음은 편하고 늘 익숙한 동선이라 에측이 쉽다고도 할 수 있다. 누군가는 나를 ‘아 맨날 책상에서 가위 찾는 얘’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불편한 것이든 편리한 것이든 일단 내 안에 굳어져 버리면 바꾸기가 쉽지 않다.


새로운 걸 익혀야 한다면 더욱 그렇다. 포토샵은 대학 때부터 쓰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단순하게 사진을 보정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작업물에 대한 피드백을 받기 위해 스캔을 하고 출판사에 보낼 때 쓴다. 최근에는 포토샵만으로도 작업을 하기도 한다. 포토샵은 내게 아주 유용한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10년도 전 대학 때 사용하던 버전을 사용하고 있다.


너무나 익숙하고 필요한 몇몇 가능만 사용해도 크게 불편함은 없지만 최근 버전의 편리한 기능을 접할 때는 놀라기도 한다. 그런데 편리한 기능들을 둘째 치더라도 너무 구버전이라 호환이 잘 안될 때도 있다. 이런 구버전을 나는 꿈에서도 설치하고 있었다.

2017년 4월 3일 월요일의 꿈
포토샵을 설치하는데 시리얼 넘버를 옆 사람에게 묻는다. 요즘은 시리얼 넘버를 입력하게 나오지 않아 그런 건 없다고 한다. 포토샵을 설치해야 하는데 어쩌지 하고 생각한다.


꿈속의 나는 포토샵을 설치하려고 한다. 언제나처럼 구버전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현실적으로 새 버전을 사용하기 위해 치러야 할 물질적인 대가에 대한 어려움도 있지만 새 버전을 설치할 생각이나 의욕 조차 없었다. 딱 맞게 익숙한 것들이 있는데 왜 굳이 바꿔야 할까?


옆 사람은 요즘은 시리얼 넘버가 없다고 한다. 고집스럽게 설치했던 것들을 이제는 더 이상 할 수 없다. 시리얼 넘버는 무단 복사를 막기 위한 키로 사용자를 제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이제 그런 것은 없다고 꿈속의 인물은 말하고 있다. 더 이상 이 버전을 설치할 수도 사용할 수도 없다.


시리얼 넘버가 없는 포토샵은 어떨까? 다른 새로운 보안 체계가 있을 수도 있고, 이제는 무료로 풀려버린 일부 버전들처럼 꽁꽁 싸매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구 버전은 사용할 수 없다. 내 안의 있던 많은 것들을 외부로 끌어내던 프로그램은 이제 새로운 업데이트가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버전의 프로그램을 구입해야 한다.


오래된 것은 익숙하고 친근하고 때로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그렇지만 때론 변해야 할 부분이 있고 벗어나야만 할 때가 있다. 오랫동안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나는 구버전이다. 새로운 것은 낭비에 불과하며 아등바등 살아봤자 변하는 건 없고 하고 싶은 거 하려다 배곯아 죽기 딱 좋다며 닥치는 대로 들어오는 일을 하며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지도 몰랐던 시절의 나다.

이 꿈으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동안 나의 슬로건은 반응하기였다. 무조건 새로운 것에 반응해보기. 해보고 싶었지만 꺼렸던 모임에 신청을 하고, 궁금해도 그러려니 했던 것들에 대해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이야기를 들었다. 새로운 카페를 데려간 친구에게 카페 이름도 묻고 다녀온 곳을 기억해 주위에 말해보기도 했다. 싸구려 모나미 볼펜 대신 조금 더 가격이 나가는 필기도구를 샀다.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는 메모장도 샀다. SNS도 가입했다. 페메가 페이스북 메시지라는 것도 알았다! (2017년에 살고 있습니다.ㅎㅎ)


변화는 아주 작은 것부터다. 나는 매일매일 아주 조금씩 걸어가기로 했다. 조금은 이전의 나와는 다른 버전의 내가 업데이트 되기를 바라며! 여기서의 업데이트는 흔히 말하는 자기 관리와는 다르다. 어제의 나보다 나를 알고 나와 자연스레 연결되기 위해 필요한 업데이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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