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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ul 29. 2019

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_20

N-120 유감

오늘 22킬로미터 밖에 걷지 않았다. 말이 순례길이지 직선으로 뻗은 스페인 북부 국도 N-120 노선을 따라 차량 소음과 속도에 노출된 채 무성의한 길을 걸었을 따름이다. 초반 약간의 어긋남은 자의적으로 우회해 보려다가 표식 없는 길을 가다 어느 삼천포로 빠질지 몰라 다시 루트로 복귀하는 과정이다.



2001년이었던가 치앙마이 밀림 트레킹을 갔다 그들의 루트 설계에 감탄한 적이 있다. 사람이 바글거리는 관광지 투어도 가이드에게 의존하게 되는데 밀림에 오지 마을에서 숙식을 하며 코끼리 타고 험지를 지나고 계곡에선 대나무 뗏목으로 이동해 가니 가이드와 일행 놓치면 바로 베어 그릴스 되는구나 싶었다. 물론 그때는 베어 그릴스 시리즈가 나오기 전이니 지금 이 표현이 꼭 맞는 건 아니다. 허나 실제로 이동 중에 일행 한 명이 사라져 가이드가 조리 신은채 번개같이 뛰어가 찾아오는 신공을 발휘하기도 했다.



N-120을 따라 내 키보다도 더 큰 옥수수밭을 쳐다보며 지루하게 걷다가 멀리 종탑에 새집을 이고 있는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리 다섯 시간을 걷고 아침상도 부실한 탓에 요기를 할 요량이었다.



오르비가 강에서 플라이 낚시를 하는 모습을 보고 혹했다.



돌다리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길 위에선 잠시 숨을 멈춰야 했다.



그러다 미루나무 줄지어 심어 어여쁜 공원 벤치에서 대낮에 애정질 하는 중년 커플을 보고 여기가 로도스다 하고 결론 내렸다.



그리하여 플라이 피싱하던 그 강물에 발을 담그고 차가운 맥주를 마신다.


스마트폰 없던 시절이라 밀림 투어가 얼마나 오지로 들어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마지막 날, 밀림(이라고 믿었던) 사이로 익숙한 소음이 들려와 잘 살펴보니 언뜻 잘 닦여진 아스팔트 도로가 살짝 보인다. 아뿔싸 우리는 그동안 밀림 속 깊이 들어와 문명과 단절된 채 지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차도와 겨우 수십 미터 사이를 두고 뱅뱅 돌고 있었구나! 어찌 이들 관광청 루트 설계자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있으리오.


2019. 7. 28.


오늘의 사족 1. 밭주인과 협조하여 도로와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옥수수 담장길을 만들면 어떨까 싶었다.


2. 미루나무 공원에 시민을 위한 BBQ 장이 있다. 가우디 선생의 작품이 현존하는 나라에 그의 수많은 걸작 굴뚝을 공공미술로 재현하지 못함이 못내 아쉽다. 남의 나라 말고 우리 걱정부터 해야 하나.. 흐휴, 한숨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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