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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ul 11. 2019

일격의 할(喝)

Pros and Cons of Being a Parisien_07

이국땅에서 맞이한 추석과 평등함에 대한 소고


할(喝)은 선가에서 어리석은 자가 미몽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깨달음을 주는 방편이다. 깨달음을 주고자 하는 것이니 할에 자비가 전제되어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추석이다. 이역만리 떨어진 파리에 있으니 명절에 대한 감정의 파도가 그만큼 낮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북쪽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쪽도 가부장제로 인한 폐해가 만만치 않다고 들었다.) 겪을 수밖에 없는 불균형과 비합리의 세월이 누적되어 잉태한 억눌린 감정이 대화 사이사이 도사리고 있다가 발화하는데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시작은 그저 평범하다. 명절이 되었으니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전화를 먼저 하는 것이 도리겠다. 장조카 장가들고 첫번째 추석이니 우선 조카며느리가 궁금하여 지난겨울 장가든 장조카에서 전화를 하였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페이스톡'을 하였다. 이리저리 안부가 오가고 조카며느리 애쓰는 모습이 전화기 넘어 어렴풋이 비친다. 요즘 화면을 보고 통화하는 게 보편이라 표정을 살피는 게 대화를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경우가 종종 있다. 두 번째 전화는 작은 형님에게 하였다. 근황을 서로 묻고 음식 준비하던 작은 형수님도 전화를 바꿔 얼굴 보고 인사하니 지구 반대쪽에 있다는 것도 잠시 잊게 된다. 외국에 나와 있지 않았다면 우리 식구도 저 자리 어디엔가 있었을 것이다.


산책 겸 해서 주말이면 늘 함께 오는 카페에 나와 앉아 명절에 대해 이야기하다 부인의 일격에 즉시 침몰하였다. “균형과 논리를 그렇게 중시하는 사람이 어찌 이리 불합리한 명절 문화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소?” 잠시 멍한 상태가 되었다가 어떻게든 생존해 보려고 주절주절 주워 섬겼다. 설과 추석을 나누어 처가와 시가를 번갈아 가는 게 옳겠지.. 생각해 보면 한날한시에 다들 움직이는 것도 제정신이면 할 짓이 아닌 것 같고.. 명절 한주 전에 처가를 가고 추석 연휴 때는 가족들과 여행 가고 그다음 주엔 시가를 가고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저런 변명은 그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일격에 침몰하니 주말 내내 의기소침하다.


아.. 머리만 정의로운 자여, 이성만으로 페미하는 자여, 그대는 부인이 할(喝)하는 일격에 순간 침몰하여 심연을 모르고 추락하는구나… 오늘 밤 한가위 밝은 달을 어찌 머리를 들고 볼 수 있으랴!

에펠탑 옆으로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다.

사족: 사안이 사안인지라 나름 자기검열하여 정제한다고 쓴 글이나 워낙 쌓인 감정의 골들은 깊고 아들로 태어나 무심하게 살아왔기에 댓글에 할과 방이 난무할 수도 있으나 그래도 글을 쓴다... 왠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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