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위 Jul 23. 2019

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_12

적응, 오기나 할까?

어제 오전 그동안 같이 다니던 일행과 헤어지고 다시 혼자가 되어 걷는다. 끝없이 펼쳐진 밀밭과 보리밭이 지나고 오늘 오후는 숲 길이다. 그런데 도로를 내려고 사전 작업을 했는지 폭이 상당히 넓어 좀처럼 그늘을 만날 수 없다. 숲이기에 기대했던 청량함을 배반하고 내리 땡볕 아래에서 걷자니 고역이다. 기대가 없으면 마음이 적응할 텐데 오히려 기대 때문에 몸이 힘든 상황이다. 희망고문 같은 거다.


어제 혼자 방 쓰며 소리에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잘 잘 수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밤새 세 번이나 깨어 시간을 확인하며 뒤척였다. 몸이 너무 뜨거운 것이 원인이 아닌가 한다. 특히 허벅지와 종아리의 열기가 내려가지 않아 더워서 자꾸 깬다. 오늘은 샤워 후에 찬물을 틀어 놓고 다리를 식혀야겠다. 상체는 배낭도 매고 있고 해서 열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비록 UV 프로텍션 바지를 입었다고 하나 다리는 홑겹 바지를 사이에 두고 아침부터 하루 종일 햇살에 노출되어 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다. 그러고 오늘 걸으며 순례자들을 살펴보니 긴바지 긴팔 입고 다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 같다. 다들 이 따가운 햇살 아래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그 열기를 받으며 걷고 밤잠을 잘 잔다는 것이 신기하다. 젊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오늘도 동행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들이 머문 알베르게를 알려 왔으나 한 마을 전에 머물기로 하다. 시간도 가장 뜨거운 4시가 가까워 왔고 오늘 하루 30킬로미터를 걸어와서 더 이상 걷기가 버겁다. 왼쪽 발이 계속 신경 쓰인다. 열흘 걸었으니 몸이 적응할 줄 알았다. 아마 순례가 끝나는 날까지 적응이라는 걸 경험하지 못하고 끝날 것 같다.



찬물에 씻고 나가서 차가운 맥주 한 잔 마시고 들어와 잠시 눈을 붙였다. 소란스러워 눈을 뜨니 네덜란드 친구가 45킬로를 걸어왔다고 한다.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몸이 단단하다.
2019.7.20.


오늘의 사족 1. 삶의 적응, 오기나 할까?

작가의 이전글 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_1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