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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ul 23. 2019

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_13

으아아 힘들다.

중간에 마을이 없어 35킬로를 걸어서 알베르게 왔는데 순례자용 베드가 만석이란다. 다른 알베르게까지는 다시 1km..
오늘도 어쩔 수 없이 홀로 방 쓴다. 넓은 침대를 독차지하는 것이 이렇게 미안한 줄 내 일찍이 몰랐었네..
출발은 좋았다. 구름 속으로 걸어 들어간듯한 시원하고 얕은 오르막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까미노 시작하는 날 동기들이 달리기 모임을 만들어 밴드에 초대를 했다. 시동은 단 한마디 ‘아님 걷고’ 때문이었다. 달리기를 좋아해서 트랙만 보면 가슴이 뛰지만 어김없이 뛰고 나면 허리가 아파서 골골거린다.. 그래서 늘 그림에 떡마냥 달리는 자들을 쳐다보는 신세였다. 달리기 동호회에 그렇게 가입했고 리더가 요청하는 데로 스트라바라는 앱을 깔고 매일 까미노 출발할 때 시작해서 알베르게 입구에 도착하면 기록을 마친다. 오늘 헥헥거리며 35킬로를 걷고 오니 그 친구가 까미노 중에 42.2 구간 없냐고 물어본다. 언감생심 내 체력에 이 기온에 어림없는 일이다.



지난 며칠 동안 동행했던 브레멘 출신 마티아스와 아르헨티나에서 출발해 동남아시아와 인도 네팔을 거쳐 까미노에 이른 마우로를 오늘 부르고스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점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



오늘 11일 차인데 이제까지 길 중에서 가장 까미노 답지 않은 구간이다. 부르고스라는 도시 외곽에 위치한 산업지대를 지나오는데 브리지스톤 공장 담벼락을 따라 걷는 길이 족히 2-3킬로는 되어 보인다. 핸드폰 지도에 코 박고 걷다 가로등에 꽝하고 머리를 받다. 선방에서 가부좌 틀고 참선하는 척하다가 죽비에 어깨를 세차게 맞고 정신이 번쩍 드는듯하다.


나도 꽤 여러 도시를 돌아본 축에 속할 텐데 부르고스 성당의 외양은 이제까지 본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마침 주일 미사 시간이라 잠시 내부를 들여다 보기도 했는데 외양만큼 화려하다. 여러 복잡한 생각이 들었으나 순례자답게 단순하기로 하다.



부르고스를 떠나 다음 마을까지 10킬로이다. 가장 뜨거운 2시부터 4시 사이에 걸었다. 오늘 31도인데 이 기온에도 견디기 힘들 정도이니 다음 주 월요일부터 나흘간 예고된 37-8도에는 어쩔 수 없이 일찍 시작해서 점심시간 이전에 마쳐야 하겠다. 이 뙤약볕 아래 집을 이고 가는 달팽이나 나나 그저 신세가 비슷하다. 마티아스는 길가다 달팽이를 만나면 길옆 풀숲에 옮겨다 준다.
인생 뭐 별거 있겠나. 여건이 주어졌으면 맞춰 살아야지.



2019. 7. 21.



오늘의 사족 1. 마티아스는 오늘 부르고스에서 까미노를 마친다. 그는 오티즘 아이를 돌보는 곳에서 일한다.
2. 마우로는 다리에 통증이 와서 오늘 천천히 걸어서 알베르게에 늦게 도착했다 한다. 그는 통증으로 까미노를 중단한다. 그의 배낭 무게는 내 것에 두배는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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