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연착의 굴레! 보고 싶다! 혜진아
체코 공항에서 중앙역으로 가는 길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프레임처럼 엮여서 보이는 듯했다.
마치 이어져 있는 필름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 하나 눈에 들어올 때마다
9년 전, 내가 갔던 체코의 거리, 풍경들
그리고 친구와 싸우고 화해했던 그날까지…
순간의 모습들이 새록새록 기억이 났다.
그때의 체코도 아름다웠지만
지금 멀리서 보는 체코도 참 예뻤다.
과거, 체코 거리에서 찍었던 풍경이 너무 예뻐서
지금도 내 아이패드 배경화면은
체코 거리의 모습으로 되어있다.
사진을 볼 때마다
그 날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해서
괜히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오후 4시 55분
우여곡절 끝에 체코 중앙역에 도착했다.
체코 중앙역은 프라하에서 제일 큰 역으로
국내, 국외로 연결되는 기차를 탈 수 있는 곳이다.
오늘 나는 여기서 베를린으로 이동한다.
장시간 이동해야 해서 미리 티켓을 끊어놨었다.
입석으로 가게 될 경우,
자리를 앉는 게 쉽지 않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탈 기차는 RJ256
오후 5시 28분 출발이었고
22번 칸의 85번 좌석이었다.
유럽 기차는 연착되는 경우가 많다고 듣긴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플로 연착 정보가 떴다.
10분 정도 지연...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숨도 돌리고 물도 좀 사야겠다 싶었다.
공항버스에서 신용카드가 안 됐던 게 불안해서
혹시 내 카드가 문제면 어쩌나 걱정됐다.
확인을 하기 위해서도
빨리 카드를 사용해보고 싶었다.
다행히, 중앙역 편의점에서는 카드가 긁혔고
카드 문제가 아니었구나 싶었다.
하나가 해결되니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메인홀이 나왔다.
중앙역 메인홀에는
기차 정보를 알 수 있는 전광판이 있어서
여기서 내가 탈 기차를 확인하면 되는데,
전광판에 익숙하지 않은 체코어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보니
글을 읽어도 읽는 게 아닌 것 같다.
까막눈이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체코 기차 전광판 보는 방법>
체코 기차역 전광판 보는 방법을 먼저 정리하면,
맨 위에 DEPARTURE - 출발이라고 적혀 있고
그 옆에 적혀 있는 Odjezd (오데즈드) 가
체코어로 출발이라는 뜻이다.
도착을 뜻하는 체코어는 Příjezd (쁘르이지예드즈)
전광판의 맨 처음부터 살펴보면
Vlak = '기차' / '기차의 종류'
Číslo = '숫자' / '기차의 번호'
Jméno = '이름' / '기차명'
Doprav. = '회사명'
(ČD는 체코 국영 철도 회사인 České 드라히(České dráhy)의 약자)
ČÍLOVÁ STANICE = '최종 목적지'
Směr jízdy = '경유지' / 기차가 거쳐가는 중간 기착지 표시로 수시로 변경
Pravidelný odjezd = '출발 시간'
Nást. = '플랫폼'의 약자
Zpoždění min = '분 단위의 기차 지연 시간'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정보 하나 더!
Nást.
표시에 나와있는 S와 J를 집중해야 한다!
S = 체코어로 북쪽 (severní)을 의미
J = 체코어로 남쪽(jižní)을 의미
이 표시에 따라서 가는 방향이 달라진다.
플랫폼을 기준으로 좌측, 우측 방향 표시가 있는데
처음에 나는 좌우를 모르고 그냥 J로 갔었다.
왠지 S든 J든 어디로 가든
철로가 연결이 될 것 같긴 한데,
여기는 한국이 아니니까 왠지 불안하다.
구분하지 않고 갔다가
출발, 도착 방향이 갈릴 수도 있는 거니까
알려준 방향대로 가야지 싶었다.
처음에는 Ex5라고 적힌 게 플랫폼인 줄 알고
무작정 S와 J 따져보지 않고 복도로 향했고
J5번 플랫폼을 찾아갔었다.
하지만 복도는 생각보다 길었고,
플랫폼이 상당히 많았고,
J5번 플랫폼으로 가는 길 앞에 섰을 때
계단으로 되어 있어서 낙담했었다.
저 계단에 캐리어를 끌고 올라갔고
플랫폼 전광판에 내가 탈 기차 정보가 아니다 보니
낑낑 거리며 다시 내려왔다.
사람이 아는 게 없으면 몸이 고생한다는 게
이 상황과 딱 들어맞지 않는가?
다시 메인홀로 돌아와 전광판을 봤을 때,
그제야 '플랫폼'의 영어가 보였고
전광판 보는 법을 다시 찾아봤다.
아... 내가 탈 기차의 플랫폼 정보는 아직 뜨지 않았구나
하지만 10분이 지나도
기차 플랫폼의 정보는 뜨지 않았고,
대신 20분이 지연된다는 정보가 업데이트 되었다.
유럽은 기차가 지연되는 일이 빈번하다는데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출장이 있거나 업무 미팅이 있을 땐
기차 연착을 감안해서 하루 전에 출발을 한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예전에 유럽 여행 왔을 때
기차 지연이 없이 탈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었구나 느꼈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에서 특유의 '빨리 빨리' 성향이
한국의 발전과 기차 운행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였으면 이럴 때 사람들이 난리났을 텐데...
여기는 익숙해져서 그런지
나만 불안하고 긴장하는 거 같았다.
하지만 전광판에는 연착 정보만 있을 뿐
여전히 플랫폼 정보는 없다.
초행길인데 내가 플랫폼을 찾다가
기차를 못 타면 어떡하지?
아까처럼 또 계단인데
정보가 늦게 떠서 낑낑 거리다가 못 타면 어떡하지?
불안했다...
전광판에만 업데이트가 안 되고
혹시 다른 사람들은 플랫폼 정보를 알고 찾아갔나?
인포를 찾아가야 하나 싶었는데
그때, 우리 기차가 연착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정보가 안 뜬 게 아니라 못 뜬 거였구나...
드디어 플랫폼 정보가 떴다!
8분 남기고 플랫폼 정보를 알려주다니...
심장 쫄린다...
나는 초스피드로 플랫폼을 향해 갔다.
사람들은 여전히 느긋했고
뛰는 사람도 한 명도 없었다.
나는 뛰고 싶어도 캐리어가 무거워서
종종 걸음으로 최대한 속도를 내서 걸어갔다.
다행히 플랫폼은 멀지 않았고,
S5번 플랫폼에 올라가는 길에 미니 전광판이 있었는데
기차 타기 직전에도 플랫폼이 바뀔 수 있다고 들었기에
올라가기 전에 한 번 더 확인을 했다.
S5 플랫폼
맞다! 안 바뀌었다! 나는 제대로 왔다!
이제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가는 길이 계단이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다른 플랫폼은 에스컬레이터도 있던데...
제발, 올라가기 쉬운 길이어라~ 했는데
예쓰!! 평탄한 오르막길!!
이 정도라도 감사하다~!
계단이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게 플랫폼에 도착했지만
기차가 아직 안 왔기에 안심할 수 없었다.
플랫폼에 있는 전광판에
아무것도 뜨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 올라왔는데 또 바뀌나?
1분 남기고 막 바뀌면 어쩌지?
울고 싶었다…
기차 출발은 5시 48분
메인홀에 플랫폼 정보가 뜬 시각은 5시 40분
메인홀 전광판 정보 확인 후 플랫폼 도착은 5시 43분
플랫폼 내 전광판에 정보가 뜬 건 5시 45분
와... 출발 3분 전에 뜨다니...
해외라서 심장 쫄리는 건가?
한국이라면 심장이 안 쫄렸을까?
그런데 웬 걸...
전광판에 불이 켜진 건 반가웠지만
5분 더 늦는단다...
기차 정보가 사람을 들었다 놨다~
아주 미치고 팔딱 뛸 지경이었다!
그렇게 기차가 도착했고
5시 28분 출발 예정이었던 기차는
6시가 다 되어서야 출발했다.
아... 그래도 오늘 베를린에 가긴 가는구나…
어플을 확인하니
역마다 출발 / 도착 시각이 나왔는데
미묘하게 실시간은 아니었다.
기차는 그렇게 출발했고,
잘 가나 싶었지만
한 정거장 가자마자
그곳에서 한참을 서있다가 운행했다.
아... 이제 늦어지는 건 조금 익숙해진 듯 싶었다.
내가 타고 있으니 기차가 정차했다가 가는 거에 대해
좀 더 여유있게 생각이 됐던 것 같다.
긴장이 풀리니 배가 고팠고
왜 물만 샀을까...
그렇게 식당이 많고 먹을 게 있었는데…
살짝 후회가 됐다.
그때, 동생이 챙겨준 간식이 생각났다.
다행히 캐리어가 아니라 보조 가방에 넣어둔 덕분에
기차에서 야금야금 까먹으면서 허기를 달랬다.
안정을 찾고 나니
기차 안의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는데,
우리나라처럼 여행의 설렘에 들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옆 자리에 있는 사람과 같은 독일 사람이라고
대화를 하다가 신이 난 사람들도 있었다.
대중교통을 타고 잘만 자는 나였지만
4시간을 넘게 가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여기는 내가 지나치든 전에 내리든 골치 아파진다.
티켓 끊는 것도 쉽지 않고,
연착이 빈번한 기차를 또 기다리고 싶지 않다.
눈 동그랗게 뜨고 풍경만 봤고,
시간이 흐르고 밖이 캄캄해졌을 때도
볼 거 하나 없는 창밖이었지만
멍하니 바라보게 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중간에 역무원이 아니라
경찰이 돌아다니면서 티켓을 확인하기도 했는데
모두의 티켓을 보는 게 아니라 랜덤으로 체크를 했다.
특히, 외국인은 집중적으로 하는 거 같았다.
나도 그 대상에 포함됐다.
티켓을 보여달라는 말에
자신있게 티켓을 내밀었는데 여권도 달라고 한다.
외국인이라서 여권도 확인하나 싶었는데
여권은 안 돌려주고 자꾸 뭐라고 말을 한다.
나는 그때부터 그들의 말이 안 들렸다...
긴장을 하니까 단어 하나도 안 들렸다.
표도 샀고, 잘못한 것도 없고, 왜 안 가는 건가 싶었다.
체코어로 말하고 있는 건가?
그랬더니 경찰관 왈...
자기 품에서 펜을 꺼내더니
"마이 펜슬, 유어 펜슬, 싸인"이란다.
아하! 여권에 싸인을 하라는 얘기였다.
여권에 싸인이 없다고...
나는 잽싸게 여권에 내 이름을 적었고,
경찰관들은 펜을 받아서 갔다.
그 말을 왜 이렇게 무표정으로 한 거예요...
타지에서 말도 잘 안 통하는데
괜히 더 긴장하게...
외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나...
이럴 땐 진심으로 반성하게 된다.
베를린 중앙역에 도착해 내릴 때가 되니
사람들도 많이 내려서 한적했다.
5월 8일 새벽 3시 40분에 집에서 출발해서
5월 9일 밤 11시에 베를린 중앙역에 도착했다.
내가 눈을 뜬 건 5월 7일 오후 1시 즈음...
몇 시간 째 눈을 뜨고 있는 거고,
몇 시간 동안 이동만 했는지 녹초가 되었다.
아... 그래도 드디어 왔구나!!
베를린 중앙역에 도착하는 플랫폼은
기차표를 끊었을 때부터 13번이라고 명확해서
후배가 시간 맞춰서 나온다고 했다.
후배가 역에 마중을 나온다는 말이
정말 어찌나 반갑고 감동이었는지 모른다.
우정의 무대에서 '어머니~' 불렀을 때
엄마가 등장할 때처럼 울컥했고,
'언니~'하고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중앙역의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귀에 정확하고 또렷하게 꽂히게 잘 들렸다.
보고 싶었다! 혜진아~~~~
후배를 만나면 세상 반갑게 이름을 부르며
촐싹거리며 환영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중앙역에서 막춤이라도 추며
세상 호들갑을 떨고 싶었는데…
역에서 내릴 때부터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그저 널 만나서 행복하다!
그걸로 만족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