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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나 Mar 07. 2023

삶을 아름답게 연주하는 사람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Albert Bandura, 1925~2021)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관찰함으로써 학습하는가에 관한 연구를 통해 ‘모델링(modelling)’의 개념과 과정을 소개하였다. 누군가를 보고 배우는 것은 인간의 선천적 경향성이다. 어린 시절에는 주변 환경의 자극에 무의식적으로 영향받지만, 인지가 발달할수록 의식적이고 자발적으로 모델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이때 모델의 사고와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기억한 정보를 삶에 적용하고자 시도하는 과정이 관찰학습의 핵심이다.      


내가 닮고 싶은 모델이 생길 때마다, 그는 내 인생을 비춰주는 거울이 된다. 다행스러운 것은 내가 직접 알고 지내는 사람만 모델로 초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나 현재에 잘 알려진 명사들이나 책이나 영화의 주인공 등 마음먹기만 하면 누구나 내 삶의 모델이 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다양한 문학적 경험을 통해 편협한 관점을 벗고, 삶의 지평이 넓어지는 경험과 흡사하다.      


내게 모든 음악가의 연주는 수업의 모델이 되곤 했다. 학교에 있을 때 해마다 동일한 전공 교과를 맡아 수없이 많은 수업을 했지만, 한 번도 똑같은 수업을 한 적이 없다. 수업내용이 비슷했을지 모르나 그때 그 순간 학생들과 힘을 합해 만들었던 수업은 그날의 분위기, 감정, 경험 등 여러 가지 변인이 가세되어 빚어진 독특한 예술작품과도 같았다. 학교 현장을 떠나고 보니 이제 나의 눈에 음악가의 연주뿐 아니라 그의 삶에 관심이 간다.      


한국을 빛낸 젊은 피아니스트 조성진, 임윤찬, 손열음 등의 연주를 보고 들을 때면 어떻게 인간의 열 손가락으로 저렇게 다채로운 선율을 표현할 수 있나 기가 막힌다. 약하게 강하게, 빠르게 느리게, 가볍게 웅장하게, 부드럽게 끊어지듯, 몰아치듯 안기듯 그야말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음악에 빠져드는 순간이다.    

  

위대한 연주를 접할 때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통해 음악과 하나 되는 경지에 올랐는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경이롭다. 더 좋은 연주를 위한 그들의 노력에 마음이 뭉클해지면서 나의 삶도 좀 더 아름답게 연주하고 싶은 내적 동기가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시모어 번스타인과 백혜선은 닮고 싶은 점이 많은 피아노 연주자이자 매력 넘치는 나의 롤모델이다.       

  

#1. 시모어 번스타인      


관심 가는 것을 꼭 붙들고 열매 맺을 때까지 매달리기     

  

90대의 현역 피아니스트 시모어 번스타인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영화배우 에단 호크가 감독을 맡은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타 >다. 그는 여섯 살에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아흔 살이 넘도록 평생 피아노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한때는 촉망받는 피아니스트로, 지금은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그러면서도 여전히 피아노 연주자로서도 활동하고 있다. 90 넘은 현역 피아니스트를 간접적으로 접하는 것만으로도 놀라움인데, 누구보다 맑고 또렷하게 자유와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이 위대해 보였다. 비결은 관심 가는 것을 꼭 붙잡고 열매 맺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매달리는 삶의 태도였다.  


다큐멘터리 영화 <Seymour: An Introduction> 중에서


나는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재능을 결코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독주자 경력을 접고 나서도 연주에 대한 욕망은 항상 있었어요. 연주의 욕망은 연습을 통해 이어지고 있죠. 그리고 나는 최고의 연주자들과 세계 최고의 공연장에서 실내악 연주는 계속합니다. 나는 연주를 그만두면 훌륭한 교사와 멀어진다고 생각해요. 시모어 번스타인, 앤드루 하비,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      


90 넘은 노인이 아직도 현역이며, 지팡이 없이 계단을 오르내리고, 또렷하게 생각을 전달하는 모습만으로도 대단해 보이지 않냐며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은 볼 빨간 ‘소년’ 그 자체였다. 그의 얼굴빛은 온화하고, 눈은 빛이 났으며, 온몸에 풍기는 삶과 음악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는 쇠하지 않았다. 음악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제자들에 대한 애정 어린 가르침 또한 진심이 느껴진다.      


나는 교습을 시작할 때보다 끝내고 난 뒤에 더 생생합니다. 에너지가 넘치고 더 살아 있음을 느끼죠. 춤이라도 추고 싶습니다........ 모든 교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첫째, 여러분은 제자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둘째, 여러분이 제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음악의 모든 것만이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삶의 모든 측면에도 정서적으로 반응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최우선 과제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그 이후의 일입니다. 시모어 번스타인, 앤드루 하비,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      


#2. 백혜선    

  

끊임없는 도전과 실험으로 성장하기  


세바시 강연 <낯선 환승역에서 만나는 새로운 세상>


세바시 강연에서 피아니스트 백혜선을 알게 되었다. 그가 걸어온 삶의 여정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치고, 유학해서 유명한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입상을 한다. 29세에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임용이 되어 10년 만에 사표를 쓴다. 마흔에 다시 연주자의 길을 걷기 위해 달랑 두 아이를 데리고 생면부지 뉴욕으로 간다. 그 후 역경을 딛고 다시 피아니스트로, 교수로 성공을 거두기까지 그의 삶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안정되고 보장된 삶의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쉬웠을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아슬아슬한 출발점에 섰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생계형 피아니스트로서 두 아이를 키우며 살았던 미국 생활이 후회스럽지 않았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강연과 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서울대 교수직을 가진 거를 후회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제가 있는 거 아닐까요? 제가 피아노 연습할 때 습득한 건데요.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삶이란 끊임없이 성장하고, 내 그릇 안에서 내가 더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편안하게 살다가도 이게 정말 내가 원한 내 삶인가? 이런 생각이 찾아올 때가 있잖아요? 편안한 삶을 유지할 것인지, 불안에 몸을 던지게 되더라도 내 삶을 실험하고 도전할 것인지, 어떤 선택이 옳은 건지 아무도 몰라요. 아직 3,40대도 되지 않았고, 40대라면 기꺼이 계획을 가지고 그런 도전을 해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가 좋은 연주자로 거듭나기 위해 가졌던 삶의 태도는 비단 음악뿐 아니라 삶에 큰 영감을 안겨주었다.   

  

-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에 집중하기
- 자신이 택한 길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후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기 
-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일이 이루어질까 의심이 들 때도 매일 꾸준히 자신을 연마하기 
-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시간에 의미를 두고 자기 삶을 긍정하기      


이러한 태도는 그가 좋은 피아노 연주자가 될 수 있었던 비법이자 삶을 아름답게 연주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통하는 마법 레시피가 아닐까 싶다.      

 

분명 그 시절의 나는 음악과 연주에 대한 갈망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교수, 연주자, 엄마로서의 1인 3역이 너무 힘들었고, 그 무엇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만약 하나를 버려서 나머지 둘이라도 제대라도 할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는 명확했다. 백혜선,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인정받지 못한 순간에도 연주자는 자기 연마를 통해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나는 아무런 진전도 거두지 못했지만 이렇게나 열심히 연습했고 그러니 내일은 한 발 나아가게 되리라 하며 헛되어 보이는 시간에 기어코 의미를 부여할 줄 알아야 한다. 그 시간이 행복이고 축복이라는 것을 진실되게 느껴야 한다. 백혜선,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문득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해왔던 학생들과의 수업 장면이 떠오른다. 그 시절 나는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수업을 할 수 있을지 늘 고민했다.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지식을 경험하고 체화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 헤맸다. 마지막 수업 때까지 내 최고의 수업은 다음번 내가 하게 될 수업이 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수업의 매 순간이 소중했기에 진심을 다했기에, 분명 조금씩 학생들에게 더 다가갈 수 있는 수업을 했던 것 같다.      


언젠가 내게 들려주었던 학생들의 고백에 아직도 마음이 설렌다. 


선생님은 매시간 다양한 활동을 통해 나를 알아갈 수 있도록 해주셨어요. 활동에 참여할 때마다 ‘나도 할 수 있네’라는 생각과 함께 자신감을 많이 얻었죠. 원래 발표나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을 어려워했지만, 수업에서 내 생각과 느낌을 무조건 해야 했기 때문에 발표력뿐 아니라 내가 어떤 경험을 하는지 또렷이 알 수 있었습니다. -P-     
대학에 오기 전에는 내가 누군가를 이끌거나 주도적으로 하기보다 누군가를 따르며 도와주는 수동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어요. 조장을 맡아 수업 활동에 참여할 때 조원들을 이끌어 나가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선생님께서 구체적인 피드백과 격려를 해주셔서 내가 잘하고 있구나! 안심되었어요. -Y-     
낯가림이 많았던 저의 모습을 어떻게 아시고 ‘00 이는 자세히 보면 더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피드백해 주신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고 도전할 수 있도록 따뜻하게 이끌어주셔서, 수업이 끝난 후에도 저 자신에게 좋은 향기로 기억되는 교사가 되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어요. -L-     
선생님이 새로운 분야의 공부에 두려움 없이 도전하시는 모습이 좋았어요.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기억나서 지난 방학 때는 ‘자존감 수업’이라는 책을 찾아서 읽어보았어요.  선생님께서도 우리에게 피드백을 주시지만,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다음 수업에 반영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저도 교사가 된다면 선생님처럼 매 수업을 평가하고, 학습자가 요구하거나 필요로 하는 것을 바탕으로 수업을 계획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K-     


나의 삶을 아름답게 연주하기 위해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하고 실험하고 도전해보고 싶다.      


성장한다는 것은 언제나 안전지대 밖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John C. Max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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