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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나 Apr 28. 2023

존엄하게 죽을 권리

돌아보면 지나온 시간은 체감상 참 빠르게 느껴진다. 앞으로도 느리게 나이들 수는 없겠지만 언젠가 세월의 끝자락에서 기다리고 있을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상식적으로 노화는 평생에 걸쳐 조금씩 진행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최근 과학학술지 <네이처 메디슨>에 발표된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진의 논문에 따르면 살면서 34세, 60세, 78세, 총 세 차례 급속히 노화될 때가 있다고 한다. 특히 가공식품과 스마트폰에 일찍 노출된 30~40대는 이전의 부모 세대보다 더 빠른 속도로 노화될 거라는 경고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앞으로 기대수명이 연장될 거라고 하지만 한 번만 깊게 생각해 보면 좋아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길어지는 노년기를 대비한 개인적 노력과 사회적 시스템이 미비한 한국 사회에서는 늙어가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 없다. 특히 누구나 존엄하게 살다가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대부분 사람이 노년의 말기를 병원이나 요양기관에 의존해서 살다가, 가족과 고립되어 외롭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다 잘된 거야>(2021)는 인간의 자발적으로 죽을 권리에 대해 구체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잘 나가는 사업가로 누구보다 멋지게 살아가던 80대 중반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남의 도움 없이는 배변 처리도, 목욕도, 이동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매일 매 순간 생전 경험하지 못했던 모멸감에 치를 떨던 아버지는 딸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끝내고 싶으니 도와줘”


모두 나아질 거다, 괜찮아질 거라 말은 하지만 진료하는 의사도, 돌보는 딸들도 아버지 본인도 다시는 이전의 자유롭고 활기찬 상태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두 가지 질문 앞에 서게 한다. 인간은 원하든 원치 않든 세상에 태어나지만, 죽음만큼은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어야 하지 않은가? 사랑하는 부모가 간절히 죽음을 원한다고 해서 그가 죽도록 도울 수 있는가?


영화 <다 잘된 거야> 포스터


건강이 전제되지 않은 채 늘어나는 수명은 신인류의 재앙이다. 이전 세대보다 길어지는 노년의 시간을 품위 있게 보낼 수는 없는가? 혼자서 몸을 움직여 이동하는 일에 제동이 걸리면 일상적으로 해오던 사소한 일들이 엄청 크고 어려운 해결 과제가 된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다. 집안에서는 독립된 어른으로 기능할 수 없고,  본인뿐 아니라 그를 돌보는 가족 구성원 모두의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 삶의 질은 하락된다. 시간이 갈수록 가족의 돌봄에도 한계가 오고, 병이 깊어지면서 병원이나 요양기관에 사회적 돌봄을 의뢰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진행된다.



90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지난겨울부터 아예 거동을 못하게 되면서 예상치 못했던 삶의 고통을 겪고 있다. 처음에는 "이번 겨울만 지나면 곧 훌훌 털고 일어나시겠지" 하며 봄을 기다렸지만,  시간이 지나도 상태는 나아지기는커녕 나빠지기만 한다. 아직은 엄마가 아버지의 손발이 되어주고 계시지만, 길게 보았을 때 언제까지 교대 없는 돌봄을 이어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저 하루하루 버티어내고 있을 뿐이다.


누워도 불편하고 앉아 있어도 불편한 아버지를 위해 ‘모션 베드(motion bed)’라는 걸 선물했다. 병원 침대의 가정 판이라고 보면 된다. 눕고 앉기가 용이한 병원 침대가 고급스럽게 가정용으로 업그레이드된 ‘모션 베드’는 아버지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했다. 침대 위에서 리모컨을 톡톡 누르면 원하는 각도로 기울기를 조정할 수 있다. 이동용 간이 테이블을 놓고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는다. 손님을 맞이하던 거실은 이제 아버지가 기거하는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침대와 마주하고 있는 창문을 활짝  열면 4계절의 변화가 눈에 그대로 들어온다. 침대 위에 편안히 누워서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를 듣고, 비 오는 풍경도 하염없이 감상할 수 있다.


침대가 설치되던 날, 배고픈 것보다 대화가 고팠던 아버지는 연신 기침하시면서도 옛이야기를 쉬지 않고 하셨다.  엄마는 벌써 그 얘기는 수백 번도 더 했다면서 손사래를 치지만, 나는 엄마에게 앞으로 아버지가 똑같은 이야기를 해도 천 번 만 번 더 들어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평생 말하는 것으로 밥벌이했던 아버지가 벗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한 자리에서 고립무원 상태로 거의 입을 닫고 지내는 것이 얼마나 괴로울까! 아직은 무용담과도 같은 아버지의 이야기가 지겹기보다 살아계신 것이 다행스럽고 기뻐서인지 더 신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맞장구를 치고 있는 내 모습을 본다.


아버지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두 손 모아 기도한다.


더 늙어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언젠가 죽음이 찾아올 때,
죽음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잘 만날 수 있기를,
생의 마지막 날까지 인간의 존엄이 지켜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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