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서야 보이는 것이 있다
생애 첫 유럽 배낭여행을 하던 때의 일이다.
독일 뮌헨에서 새벽 열차를 타고 허름한 퓌센에 내려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향했다.
다그닥 거리는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바라보며 묵묵히 경사진 도로를 오르던 중, 무릎 정도의 작은 몸을 뒤뚱이며 한 아이가 내 앞을 가로질러 숨바꼭질 숫자를 세는 것처럼 벽에 달라붙었다.
아이는 모기소리처럼 가늘게 울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내 곁에는 한 남자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이가 울고 있네요."
"잠투정이에요. 기차에서 내리느라 억지로 깨웠더니 심통이 났어요."
제 딸입니다. 이제 3살 조금 넘었어요,라고 남자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이가 어린데 함께 여행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말에 남자는 함박웃음을 짓는다.
"이게 다 추억이죠. 봐요.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딸에게 디즈니의 모티브가 된 성을 꼭 보여주고 싶어 미국에서 날아왔다는 남자는, 아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묵묵히 아이의 곁을 지켜주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였다.
나는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특별히 아버지가 내게 나쁘게 대했던 것도 아닌데, 아버지는 늘 어렵고 불편한 존재였다. 아버지가 곁에 있는 것이 불편했고, 아버지가 뭔가를 묻거나 요구하는 것도 싫었다.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은 늘 부담스러웠고 짐스러웠으며, 자꾸만 철부지 어린애로 취급받는 느낌도 좋지 않았다.
왜일까.
아버지가 특별히 나를 괴롭힌 것도 아니었는데.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정말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이 너무도 적었던 탓이다. 아버지가 나를 잘 모른다고 느꼈던 것 이상으로, 나는 아버지의 삶을 모르고 있었다.
거의 무일푼으로 어머니와 살림을 꾸리신 아버지는 생활을 위해 늘 일에 매달려 있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면 집을 나서고, 일이 끝나 집에 돌아오면 저녁 10시가 넘는 그런 생활을 아버지는 30년이 넘도록 한결같이 지켜오셨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주말이면 아버지가 집에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부업을 위해서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 외에 남는 시간에 아버지는 늘 잠에 빠져 계셨다.
당연하다. 나라면 한 달도 버티지 못할 것 같은 그런 생활을, 아버지는 30년 넘게 계속하셨음이 신기할 따름이다.
대학교 3학년을 마친 겨울, 어머니에게 등을 떠밀려 아버지와 함께 약 3주간 내 생애 두 번째 유럽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마주한 아버지는 늘 피로에 지쳐있는, 평소 내가 알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장난기가 넘쳤고, 느끼한 스파게티를 즐겼고, 독한 에스프레소를 음미할 줄 아는 발랄한 스물다섯 청년 같은 남자였다.
숙소로 돌아온 밤이면 참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내게 "졸업하면 뭐 할 거야?", "만나는 여자 친구는 없어?"와 같은 질문을 던졌고, 나는 아버지에게 "아빠 어렸을 때는 어땠어요?", "엄마랑 연애할 때 주로 뭘 했어요?"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이야기가 돌고 돌면서, 우연히 듣게 된 아버지의 고백.
"아빠도 할아버지랑 안 친했었어."
아빠도 할아버지랑 안 친했었어
생전 단 한 번도 안아준 적이 없었다는 무뚝뚝한 할아버지. 그래서 누구보다 다정하고 따듯한 아빠가 되고 싶었다는 아버지. 하지만 다정한 아버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우리 아버지.
그 겨울의 여행 이후로 나는 아버지와 함께 앉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저 녀석이 어느새 다 컸어."라고 말씀하셨다.
가끔 퓌센의 우는 딸을 바라보는 주름 가득한 남자의 행복 가득한 웃음을 떠올릴 때면, 그 얼굴 위로 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겹쳐 보이곤 한다.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그 시절에 아버지는 새벽잠을 덜어 내며 어머니와 함께, 눈가 촉촉이 젖은 나의 얼굴을 닦아주며 그렇게 웃고 계셨으리라는 그런 생각에.
설경이 멋졌던 스위스에 언젠가 다시 한번 꼭 가보고 싶다는 아버지.
그 여행에, 꼭 아들과 동행하고 싶으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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