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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e Lee Aug 23. 2018

운명은 대물림된다

내가 선택하는 자화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 서정주 [자화상] 中



서정주는 [자화상]에서 자신의 뿌리를 말한다. 이 시를 나는 조심스럽게 오마주해 본다. 


'외할아버지는 의사였다. 밤이 깊어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밥상에 놓인 한 잔의 정종만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리고 추가되는 또 하나의 오마주.


'할아버지는 건축업자였다. 해가 지나도 오지 않았다. 깊은 밤을 마음 졸이며 보내는 할머니와 아버지의 정에 굶주린 유년시절의 내 아버지가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덧붙인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


어렸을 때부터 나의 뿌리가 되는 두 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이 이야기는 완전히 상반되는 두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엄격한 외할아버지의 스토아적 삶


외할아버지는 의사였다. 대한민국이 아직 일본의 점령하에 있던 시절. 의대라고는 경성제대와 평양의전밖에 없던 그 시절에, 그는 일본인들을 모두 제치고 평양의전의 수석 자리를 차지하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 학위 수여식]


사람을 살리는 일이 천직이라 하셨던 외할아버지는 6.25 때 군의관으로 시작해 초대 적십자병원 원장을 맡으시고, 아직 라이온스클럽이 의사들만 가입할 수 있는 봉사단체였던 시절에 통영에서 초대 회장을 지내셨다.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외과의. 그게 외할아버지를 수식하는 단어였다. 


그런 외할아버지는 적십자병원 원장이 되기 전, 두 번의 개원과 두 번의 폐업 기록을 세우셨다고 한다. 


"매번 공짜로 수술을 해주니 남는 게 있나. 병원비 없다 그러면 옥수수로 받고, 배추로 받고, 무로 받고... 그래도 덕분에 병원이 망해도 배를 곯지는 않았지."


금전적으로 많이 여유로울 수도 있었을 텐데, 외할아버지의 선택은 늘 돈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법도 하건만, 어머니는 묘하게 자랑스러운 눈치다. 


[외할아버지, 일본 오사카]


적십자 병원 원장직에서 내려오신 후, 학창 시절 함께 수학하던 일본인 의사 친구가 외할아버지를 일본으로 불러들였다. 조선시대의 혜민원(무료진료소)과 같은 병원을 일본에서 운영하던 친구는 외할아버지에게 함께 할 것을 권했고, 외할아버지는 두 말 않고 이를 받아들여 훌쩍 일본으로 건너가버리셨다. 이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일본에서 의료활동에 전념하셨다고.


내가 어렸을 적 기억하는 외할아버지는 늘 말이 없었다. 식사를 하실 때 청주 한 잔을 꼭 드시고는,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방으로 들어가셨다. 어린 손자의 특권으로 덜컥 덜컥 방으로 들어가면, 컴컴한 방 한 구석 책상에 스탠드만 켜놓은 채로 책을 읽으시던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그분의 목소리가 어땠는지도, 어떤 표정을 지으셨는지도 모두 잊힌 지금은 오직 책을 쥐고 계시던 두 손만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외할아버지가 한국으로 돌아오셨다. 폐암과 함께 가벼운 치매가 왔다고 한다. 치매가 뭔지 몰랐던 나는 외할아버지에게 감히 장기를 두자고 했다. 차가 포처럼 움직이고, 졸이 마처럼 움직인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본능적인 깨달음이었다. 가슴에 울렁이는 물줄기 하나가 차올랐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죽음이란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생각하게 만든 순간이었다. 아마도 그때가 내 사춘기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외할아버지 명함, 대전 적십자병원]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셨다. 글을 읽을 수 없어 책을 거꾸로 들고 뚫어지게 보고 계셨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록 페이지는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같이 두 손은 책과 신문을 놓지 않았다. 두 눈은 계속해서 활자들을 훑고 지나가지만, 형체를 알 수 없이 부서진 조각들이 그 하얀 머리 속에서 소용돌이쳤을 것이다. 나는 이 장면을 감히 '습관'이라는 가벼운 단어로 이해하려 한다. 그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탓이다.



멋쟁이 할아버지의 에피쿠로스적 삶



할아버지는 외할아버지와 달랐다.


유명한 건축업자였던 할아버지. 제법 잘 알려진 건물들이 할아버지의 손을 거쳐 태어났다. 김일성 대학이라던지, 세운상가라던지, 낙원상가라던지... 용산 땅의 상당 부분이 할머니 소유였다는 말도 있고, 공장도 몇 채 갖고 계셨다고도 들었다. 


할아버지는 돈이 많았다. 하지만 늘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남자 일가친척 모두 나이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탓이다. 당신도 요절할 거라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가진 모든 돈을 인생을 즐기는데 쓰셨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명동을 주름잡던 일본 조폭 하야시와 친구 사이였다는 말도 있고, 평양의 가장 이름난 기생이 할아버지 첩이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작은고모, 영화배우 시절]


할아버지의 사업적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른 혈연과는 달리 할아버지는 상당히 장수하셨기 때문이리라. 하루살이처럼 운영하는 사업이 계속 잘 되기란 어려웠을 터다.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가진 땅과 건물은 모두 거품처럼 사라졌고, 더 이상 바깥일을 하지 않는 할아버지는 집에서 가장 외진 작은 방에 머물렀다. 당시 잘 나가던 영화배우인 작은 고모가 온 집안 식구를 먹여 살렸다고 한다. 지금도 아버지는 가끔 이런 말씀을 하신다.


"나중에 내가 죽거든, 작은 고모도 부모처럼 잘 돌봐야 한다. 고모 아니었으면 아빠도 이렇게 못살았을 거야."


형제와 부모의 뒷바라지를 위해 늦도록 짝을 만날 수 없었던, 동생을 걱정하는 오빠의 마음이다.


자식을 단 한 번도 품에 안아준 적 없는 무뚝뚝한 할아버지건만, 유독 내게는 애정을 보이셨던 할아버지였다. 용돈을 주는 손자도, 자신의 방에 들어오도록 허락한 손자도 내가 유일하다고 했다. 어른들 말로는 내가 손자들 중에서 가장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가끔은 할아버지의 산책길에 함께 나서기도 했다. 하얗게 반사되는 백구두에 푹 눌러쓴 중절모. 고급스럽게 다듬어진 지팡이와 양복.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우아하고 근사한 할아버지의 발걸음은 변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멋쟁이 신사였다. 


초등학교 1학년 무렵이었을 거다. 할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흘러내리는 눈물을 3일 내내 하염없이 쏟아냈다.


운명은 대물림된다


삼십 대 중반이 넘어, 두 분의 유품 중 일부가 내게도 전달되었다. 외할아버지가 쓰시던 카메라와 할아버지가 아끼시던 그림. 나이가 들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두 할아버지 이야기는 어렸을 적 보았던 모습 위로 새로운 색을 덧칠한다. 


[외할아버지의 카메라]


"피는 못 속이지. 씨도둑은 못한다고... 결국은 핏줄을 따라가는 게 보여."


외가에 가면 친척들은 내 풍채가 외할아버지를 닮았다 하고, 친가에서는 생긴 게 꼭 할아버지를 빼닮았다 한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를 통해 바른 인성과 삶의 태도를 가르치셨고,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예술적 감수성과 그 무엇으로도 구속할 수 없는 자유로운 영혼을 물려주셨다. 내 피에는 서로 상반된 두 운명이 공존한다. 


[외할아버지와 나, 일본 오사카]


그리고 생각한다. 내 운명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매 순간 선택하는 나의 결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내 삶은 어떤 습관을 쌓아가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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