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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e Lee Aug 09. 2018

현명한 어머니의 사고뭉치 아들 다루는 법

아이는 쏘아놓은 화살이다

아이들을 그대들과 같이 만들려고 애쓰지는 말라.
왜냐하면 삶이란 결코 뒤로 돌아가지 않으며,
어제에 머물러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
아이들은 마치 살아있는 화살과 같아서
그대들로부터 언제나
앞을 향해 쏘아져 나간다.

- [예언자] 아이들에 대하여 中, 칼릴 지브란


[하늘공원, 대한민국 서울]


"나중에 우리 아이가 태어나면, 누구 성격을 더 닮을까요?"


찻잔을 놓고 마주한 자리에서 아내가 내게 묻는다. 잠깐의 고민 후, 나는 부디 내 성격을 닮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부모님 속을 썩였던 과거를 떠올리면 제발 나 같은 아이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이를 가진다면 딸을 갖고 싶다는 생각도, 나보다는 무던하고 성숙한 아내를 닮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분명한 건, 우리 애는 밥을 안 먹어서 우리 속을 엄청 썩일 거라는 거예요."


아내도 나도, 어린 시절 밥을 잘 먹지 않았다. 어머니는 한 끼를 먹이는데 적어도 두세 시간은 걸리며 고생했던 때를 생각하며 아직도 내게 핀잔을 주시고, 장모님은 아내가 너무 밥을 먹지 않아 의자에 억지로 묶어놓다시피 해서 아내에게 밥을 먹였다고 하신다. 우리 부부의 새벽 먹방 근황을 보시면, 아마도 두 분 모두 혀를 내두르시겠지. 이렇게 맛있는걸, 그때는 왜 그렇게 먹기 싫다며 도망 다녔던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릴 적, 대한민국 서울]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게 된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어찌나 부모님 속을 썩였던지. 무엇하나 부모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속도 많이 썩이고, 사고도 많이 쳤다. 


부모님의 속도 많이 썩이고,
사고도 많이 쳤다.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스스로 공부해본 적이 없다. 남들 다 해본다는 초등학교 반장 부반장은커녕, 전교에서 뒤로 1, 2등을 했다. 전국 경시대회에서 1등을 하고 돌아오는 세 살 터울 누나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대학에 갈 생각도 전혀 없었다. 어려서부터 내 꿈은 작가였다. 글을 쓰는데 대학이 무슨 소용이냐며, 나는 공부하기를 거부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는 꾀병을 부리며 학교를 조퇴하고, 동네 도서관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소설책을 하루 종일 읽기도 했다. 속이 까맣게 탄 고3 담임선생님은 어디든 점수되는 곳에 맞춰가거나, 안 가도 상관없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내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성적으로 대학을 갈 수 있으면 내가 선생질을 그만두겠다, 이놈아. 이 점수로는 대학 절대 못가! 공부해서 점수부터 따고 그런 소릴 해!"


어떻게든 나를 대학에 보내고 싶었던 담임선생님의 반쯤은 원망 섞인 꾸지람이었다.


[청담동 인근의 커피숍, 대한민국 서울]


고3이 지나고, 졸업을 한 달 앞둔 1월 무렵. 당연히 나는 어느 대학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진심으로 대학에 대한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대로면 군대를 가야 하는데...라고. 족쇄 같던 학교를 떠나 이제야 내 눈 앞에 무한한 자유가 펼쳐졌는데, 이 자유로운 영혼을 펼쳐보기도 전에 군대를 바로 가야 한다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다, 아버지를 붙잡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학에 가겠습니다. 1년만 도와주세요."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쉬셨지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는 다음 날 학원을 등록해주셨다. 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를 생각하면 부끄러움과 죄송함이 버무려져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기억이다.


대학에 가겠습니다.
1년만 도와주세요, 아버지.


재수를 하는 기간 동안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내게는 당장 군대에 끌려갈 수 없다는, 공부를 해야만 하는 중대한 동기가 있었다. 이렇게 감옥 같은 그곳으로 끌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내게 자유의 시간이 얼마간 필요하다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달라는 마음으로 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하루하루를 문제집에 파묻혀 보냈다.


결과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서울 소재의 중위권 정도 되는 대학에 입학 장학금을 받고 들어갔다. SKY 대학의 수석 출신이셨던 두 부모님의 눈높이에는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게는 생애 처음으로 맛보는 성공의 기쁨이었다. 대학 입학의 기쁨이 아니다. 군대를 미룰 수 있다는 행복이었다. 내게는 이제 열여섯 번의 계절만큼 시간이 생긴 것이다.


[양재천, 대한민국 서울]


자유분방한 영혼은
대학에 가서도 여전히 날뛰고 있었다.


대학에 가서도 나의 자유분방한 영혼은 여전히 날뛰고 있었다. 뒤늦게 타기 시작한 오토바이로 BMW를 박았던 날에는, 정말 하늘이 까맣게 보였다. 부모님은 그런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치지는 않았니? 그러게 뭐랬어. 그런 거 타지 말라고 했잖아. 그래도 안 다쳤으니 다행이다. 보험은 들어놨지?"


그게 끝이었다. 몰매를 맞는다거나, 머리를 박박 밀어버리신다거나, 집에 감금당하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옛 저녁에 부모님이 나를 포기하신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미 망가진 막내보다는, 뭘 시켜도 전국 수준으로 잘하는 첫째를 밀어보자는 마음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 자유가 좋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대학교 2학년 봄의 일이다. 한 문학 월간지를 통해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을 했을 때, 기쁜 마음으로 부모님께 그 소식을 전했다. 아들이 드디어 뭔가를 해냈어요!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부모님을 뵈었을 때, 부모님은 덤덤하게 그 소식을 들으셨다.


"그래, 잘했어. 수고했구나. 그런데 이제부터 시작이야. 너무 자만하면 안 돼."


앞으로도 잘 할 거야, 하고 말씀하시는 어머니. 내 예상과는 다르게 부모님은 크게 놀라지도 않으셨고, 의외라는 반응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놀랄 만큼 밋밋했던 반응은, 내가 그 일을 해낸 것이 부모님께는 '당연한 일'이었음을 느끼게 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부모님은 늘 나를 보고 계셨다는 것을. 단 한 번도 나를 포기하거나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을. 비록 사고뭉치 아들일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의 길을 올곧게 걸어나갈 것이라는 묵묵히 믿음으로 내가 가는 길을 응원해줄 뿐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양재천, 대한민국 서울]


사람마다 가는 길이 모두 다르다. 가고 싶은 곳도, 이루고 싶은 것도 모두 다르다. 부모님은 그걸 일찍부터 알고 계셨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정해주기보다는, 어디로 가더라도 내 두 발로 갈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에 주력하셨다. 지켜봐 주고, 넘어지면 일어설 때까지 웃어주셨다. 아파? 괜찮아. 크게 안 다쳤지? 자, 이제 걸어가야지.


사람마다 가는 길이 모두 다르다.


오토바이로 BMW와 사고를 냈을 때, 부모님은 단 한 푼도 지원해 주시지 않았다. 대학생이 갚기에는 큰 무리가 따르는 액수였다. 그 금액을 갚기 위해, 나는 몇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두 배로 늘려야 했다. 하지만 그 일로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벌인 일이었기에 내가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 사고 이후에도 나는 몇 년 더 오토바이를 탔지만 더 이상 단 한 번도 사고를 내지 않았다. 차를 몰고 있는 지금까지도, 그 사고 이후로 나의 과실로 사고가 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아이는 쏘아놓은 화살이다.


칼릴 지브란은 저서 [예언자]에서 부모는 "구부러진 활"에, 자녀는 "쏳아놓은 화살"에 비유한다. 부모는 온 힘을 다하여 자신을 구부려 화살을 앞으로 향하게 만든다. 어딘가의 과녁에 가 닿았으면 하는 바람은 있겠지만, 화살이 그곳에 정확히 안착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태풍 같은 거센 바람이 불지도 모를 일이고, 중간에 어딘가에서 날아온 돌에 부딪혀 다른 방향으로 튕겨져 나갈지도 모를 일이다. 중요한 것은 날아가는 화살이 가고 싶은 곳을 스스로 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화살이 가 닿은 곳에서 스스로 생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덕수궁 돌담길, 대한민국 서울]


이전 회사의 인사팀에서 채용 업무를 담당하던 시절, 어느 지원자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 어머니는 지원자의 지원서가 잘 접수되었는지, 지원자가 유리한 스펙인지를 물어오셨다. 나는 설명할 수 있는 선에서 어머니의 질문에 답하면서, 마지막까지 너무나 하고 싶었던 단 한 가지 질문을 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어야 했다. 어머님, 그런데 왜 지원자가 직접 전화하지 않고 어머님이 전화를 하신 건가요? 혹시 회사도 어머님이 대신 다녀주실 생각이신지요?


다행히도 아내와 나는 아이를 키우는 방식에 대해 상당 부분 의견이 일치한다. 물론 현실이 되면 지금 생각하는 많은 것들을 현실과 타협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결코 변하지 않는 큰 기둥이 든든하게 뿌리내려 있음을 느낀다.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자고. 자신의 삶의 행복을 찾아갈 수 있는, 정신이 건강한 아이로 키우자고. 살면서 겪게 될 수많은 굴곡을, 나도 아내도 결코 대신 살아줄 수 없기에.


사고가 났을 때, 그리고 그 외에 많은 한심한 짓을 벌였던 때의 내게, 직접 책임을 다하라고 등을 밀어주시며 한없이 깊은 인내와 믿음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셨을 부모님께 깊은 감사를 드릴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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