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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e Lee Oct 22. 2019

데이트를 하다

어느 백수 남편의 일기 (14)


“오늘 점심시간에 병원에 약 타러 가기로 했어요.”

 

예전에 살던 집 근처의 익숙한 병원으로 간다는 아내의 말에, 오랜만에 점심이나 함께 먹을까 하고 묻는다. 시간이 많지 않은데 괜찮겠느냐는 말과는 달리, 목소리에 감출 수 없는 화색이 돈다.

 

“이 시간에 이 동네는 정말 오랜만이다. 혹시 뭐 먹을지 생각해봤어요? 여기가 그래도 은근히 숨은 맛집이 많았는데.”

 

병원에서 받은 처방전을 휘휘 저으며 아이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아내. 골목 구석에 위치한 콩나물국밥의 고소한 수란이 떠오른다. 속이 불편한 아내에게도 적당할 것 같다.

 

아내가 쓰러졌던 그 날 이후, 아내는 신경안정제와 소화제를 먹으며 매일을 버틴다. 

 

“이석증은 아닌 것 같고, 메니에르나 전정신경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밀검사를 받아봐야 정확히 알 수 있겠네요. 의사 소견 써드릴 테니 3차 진료기관으로 가셔서 검사받으세요. 검사는 이틀 정도 걸릴 겁니다. 이 검사를 할 수 있는 병원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지금 예약을 하시면 아마 다음 달에나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의사는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그때까지 드실 수 있게 약 처방해드릴게요,라고.

 

“증상이 어떻길래 신경안정제가 필요한 거예요?"

 

호로록, 수란을 삼키고는 아내가 말한다.

 

“임신하면 입덧이 이렇겠구나 싶은 증상이에요.”

 

가만히 있어도 하늘이 빙글빙글 돌고, 어지럽고, 그러다 보니 늘 메스껍고, 소화가 안되고. 그나마 약을 먹으면 그동안은 괜찮은데, 한 번이라도 약을 거르는 순간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그날 이후 괜찮아 보였던 것은 약의 힘이었던 것인지. 언제까지 약에 의존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내도 나도 답이 없는 질문을 속에 담아둔 채 숟가락 가득 국밥을 퍼 입에 넣는다.

 

“좋다.”

 

“그러게.”

 

든든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거리로 나선다. 밤에는 그토록 시끄럽고 혼잡하던 번화가가, 한낮의 햇살 아래 서자 차분함이 감돈다. 평일 대낮에 함께 이 거리를 걸었던 적이 있었던가. 1년 반을 이 곳에서 지내면서, 과연 그랬던 적이 있었나. 익숙함과 낯섦이 공존하는 거리가 먼 옛날의 추억처럼 느껴진다.

 

“늦지는 않았어요? 점심시간 끝난 것 같은데.”

 

핸드폰의 시계를 확인하자 숫자는 이미 1시를 넘기고 있었다. 


“병원에 사람이 많아서 좀 늦는다고 아까 문자 보내 놨어요. 우리 10분만 이렇게 걷자. 그 정도는 괜찮아요.”

 

거리에는 어느새 가을의 흔적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한없이 짙었던 가로수의 녹색이 희미해져 가고, 듬성듬성 갈변하는 나뭇잎 사이로 하늘이 파랗게 높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인데, 한동안 보지 못했던 코트가 인파 사이로 눈에 띈다. 스쳐가는 쇼윈도에는 이미 롱코트와 얇은 니트가 한껏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내의 소매가 헤진 코트가 눈에 들어온다.

 

“여보.”

 

고개를 돌려 두 눈을 맞추는 아내. 가을 하늘만큼이나 티 없는 미소에 눈이 부시다.

 

“코트, 사야 하지 않을까? 이거 갓 입사했을 때 샀던 거잖아.”

 

아내가 웃으며 말한다.

 

“왜, 나 옷 없을까 봐? 걱정 말아요. 사놓고 한 번도 안 입은 코트가 집에 두 벌이나 더 있어요. 나보단 오히려 오빠 옷을 좀 사야 될 것 같은데. 매번 똑같은 옷만 입잖아요 요즘.”

 

아니야, 옷 많아요,라고 아내에게 말한다. 옷은 충분히 있다. 다만 독서실에 정장을 입고 갈 일이 없기에, 두 벌 뿐인 트레이닝복이 고생을 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알록달록 색상 별로 운동복을 사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그보다는 아내의 헤진 소매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반사적으로 나의 눈은 스쳐 지나가는 옷가게의 코트며 원피스를 훑는다.

 

10분의 산책은 예전에 살던 오피스텔 둘레를 걷기에 충분했고, 가을의 낭만을 느끼기에는 못내 아쉽다. 

 

“이제 들어가 봐야 하죠?”

 

“응.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하도록 노력해볼게요. 저녁 먹고 싶은 것 있나요?”

 

“오늘은 내가 만들어줄게요. 집에 장모님이 주신 고기 넣고 볶음밥 해줄까? 고기가 연한 게 맛있을 거예요.”

 

당신이 만든 된장국이 먹고 싶어요,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한다.

 

“응, 좋아요. 출발할 때 연락할게요. 있다가 집에서 봐요.”

 

아내가 탄 버스가 멀어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뒷유리에 비친 하늘이 높다. 오후 1시 반. 독서실로 가려던 발길을 돌려 아내와 걸었던 오피스텔 둘레를 홀로 다시 걷는다. 

 

상점들의 시즌 할인 문구들이 눈길을 끈다. 저 원피스, 아내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하고 걸음을 멈추다, 쇼윈도 너머 가격표에 시선이 머물다, 다시 재촉하는 발걸음. 오늘은 집으로 바로 돌아가야겠다. 아니,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연어를 조금 사서 갈까. 

 

“당신이 만든 된장국 정말 맛있어요.”

 

운전석에 앉아, 처음 아내의 밥상을 받았을 때를 떠올린다.

 

“내가 하면 절대 이런 맛 안 날 거야. 이거 어떻게 만든 거예요?”

 

된장국이라면 나도 자취생활을 하면서 눈감고도 만들 수 있을 만큼 많이 해본 요리다. 비법이 뭘까. 아내가 웃으며 말한다.

 

“사랑을 담아 만들면 돼요.”

 

안전벨트를 매고, 핸드폰을 손에 쥔다.

 

[조심히 들어가요. 오늘 저녁 정말 맛있게 해 줄게요]

 

사랑해요, 라는 말을 덧붙이다 지우고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내가 만든 볶음밥도 아내의 된장국처럼 맛있을 수 있을까. 늘 고급진 깊이가 느껴지는 아내의 요리와 나의 저렴한 맛이 나는 요리는 어떤 차이에서 오는 것일까. 

 

울컥,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소매를 얼굴에 가져다 대자, 향긋한 섬유유연제의 향기가 눈물에 스며 코 끝을 적신다.

 

하늘이 맑다. 어느새, 정말 어느새 가을이 되었구나,라고 중얼거리며 시동을 건다. 덜덜 떨려오는 엔진의 진동이 손바닥으로 전해져 온다. 부디 마트에 신선한 연어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도 말한다. 


아내에게는 들리지 않을 혼잣말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은행나무에 빛방울이 되어 맺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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