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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e Lee Oct 22. 2019

아내가 쓰러지다

어느 백수 남편의 일기 (13)


“나 속이 안 좋아요.”

 

한 달에 한 번, 월급날의 남부럽지 않은 외식을 마치고 돌아와 아내가 말한다. 초밥이 좋지 못했던 걸까. 그러고 보니 여름에는 회를 먹는 게 아니라고 하던데. 아내의 낯빛이 회색이 되어간다.

 

“미안해요. 나 좀 먼저 누울게요.”

 

눈을 감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아내의 손발이 차다. 소화제를 먹이고 손을 주무르고 배를 쓰다듬는다. 오빠 손은 약손, 아기 배는 또옹배. 

 

아픈 아내에게 농담 따위를 섞은 것이 잘못인지도 모르겠다. 한 시간이 지나도록 별 차도가 없자, 뜨거운 물을 대야에 받아 침대 맡에 두고 아내를 일으킨다.

 

“발 좀 담그자. 일어나 봐요. 얼른.”

 

조금 뜨겁겠다 싶게 온도를 맞춘 물에 아내의 두 발을 담근다. 아내의 발을 만져주는 것은 신혼여행 이후 처음이다. 발가락마다 전에 없던 굳은살이 눈에 띈다.

 

“오빠.”

 

“응.”

 

아내가 갈라져가는 목소리를 힘겹게 끌어모으며 말한다.

 

“나 못 앉아있겠어요.”

 

쓰러지듯 몸을 누이고는 말이 없다. 에이, 일어나요. 침대에 물이 다 묻잖아. 조금만 참아봐. 응? 아니면 병원에 갈까? 여보. 여보?

 



새벽 1시가 다되어 도착한 응급실은 만원이었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내를 휠체어에 앉히고 간호사에게 넘긴다. 

 

“속이 좋지 않다고 해서 소화제를 먹이고 손발을 주물러줬는데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었습니다. 곧 깨어나긴 했는데, 계속 메스껍고 어지럽다고 합니다. 피를 보면 기절하거나 공황이 와서 손을 따지는 않았습니다.”

 

간호사는 어물쩡 고개를 끄덕이고는, “순서 되면 부를 테니 저기 안쪽에서 기다리세요. 보호자분은 접수부터 하시고”라는 말과 함께 차트를 뒤적이며 멀어져 간다. 내 말을 듣기는 들은 걸까. 

 

“여기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요. 일단 접수하고 올게요.”

 

뭔가 순서가 엉망진창이다. 응급실이 처음은 아닌데.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 만난 의사는 아내의 배를 여기저기 눌러보고, 체온과 혈압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혈액검사를 한 번 해봅시다.”

 

우리는 다시 검사실 앞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아내는 다 타고 난 잿더미 같은 얼굴을 하고는 거북이처럼 눈을 꿈벅이다, 문득 생각난 듯이 말한다.

 

“미안해요.”

 

울컥,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누군가 속에 불을 지른 건지, 눈으로 불길이 비집고 나올 것만 같다.

 

“나 커피 한 잔만 뽑아올게요. 잠시만 기다려요.”

 

여름의 뜨거운 공기는 새벽바람도 잠재우지 못하는지, 피부에 끈적하게 들러붙는다. 반쯤은 액체 같은 공기를 폐 속 깊숙이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며 커피 한 모금을 넘긴다. 커피 향이 묻어있는 설탕물에 가까운 자판기 커피. 대학생 때 즐겨먹던 맛이다. 아내와 결혼하고 단 한 번도 마시지 못했던 자판기 표 커피. 

 

“커피는 원래 물에 녹지 않아요. 그걸 억지로 녹이기 위해서 유화제를 엄청 쓸 텐데, 몸에 해롭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믿어. 기왕이면 제대로 된 커피를 마셔요.”

 

10분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는데, 아까까지 대기장소에 있던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반쯤 열려있는 검사실 문틈으로 아내가 보인다. 피를 뽑고 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것 같은 낯빛을 하고 있는 사람인데, 저렇게 피를 뽑아도 괜찮을까, 하고 생각한다. 대기실의 TV에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예인들이 활짝 웃으며 수다를 떨고 있다. 참 해맑기도 하지. 남의 속도 모르고.

 

“보호자분!”

 

망치로 얻어맞은 무릎처럼 벌떡 일어난다. 검사실 안에 고개를 늘어트린 아내가 보인다. 팔뚝을 타고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아내분 옮기는 것 좀 도와주세요!”

 

불행은 겹쳐온다고 했던가. 능숙하지 못한 신참 간호사의 실수가 아내의 트라우마를 건드렸다. 흘러내리는 피를 보고 아내가 기절한 것이다. 검사실 한편에 놓인 이동형 침대에 누워 한참을 있다 아내가 깨어난다. 이걸로 오늘 두 번째 기절이다.

 

휠체어로 옮겨 앉아 밖으로 나가는 우리에게 간호사가 이야기한다. 

 

“앞으로는 피검사하기 전에 이런 증상이 있다고 꼭 말씀해주셔야 해요.”

 

그러게 처음에 오자마자 말했는데, 아까 얘기할 땐 대체 뭘 들은 거야.


새벽 5시가 다 되어서야 병원을 나설 수 있었다. 결국 응급실에서 한 것이라고는 갖가지 검사와 영양제 한 통을 맞은 것이 전부였다. 손에는 약봉지와 30만 원이 넘게 찍힌 영수증이 들려있었다. 

 



의사의 몇 가지 가능성이 있는 병명 진단과 추가로 진행해야 할 정밀검사 목록들이 적힌 종이도 수확이라면 수확이랄까. 이석증? 전정신경염? 메니에르? 평생 들어보지 못했던 희한한 이름들이 낯설기 짝이 없다. 병명이 뭐가 되었든, 그저 무조건 푹 쉬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 한단다. 의사의 말에 기운 하나 남지 않은 아내가 피식 웃는다. 당장 다음 주에 잡힌 출장을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집에 도착해서야 아내는 겨우 편안히 잠이 들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아내의 핸드폰에 저장된 직장 상사의 이름을 찾아 메시지를 보낸다. 안녕하세요. 오늘 아내가 많이 아파 응급실을…

 

거실로 나와 커튼을 걷자 산등성 너머로 붉게 하늘이 물들어간다. 밤이 길었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커피 포트의 전원을 켠다. 쪼르르, 뜨거운 김과 함께 향긋한 커피 향이 거실을 가득 채운다. 

 

“이제는 자판기 커피 못 마시겠어.”

 

침실 문 너머로 곤히 잠든 아내에게 나직이 말을 건넨다.

 

“당신 때문이야.”

 

아내의 표정이 한결 편안하다. 침실 문을 닫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잘 자요. 좋은 꿈 꾸고.”

 

닫힌 문을 돌아서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말한다. 미안해요.


오늘은 하루가 길어질 것 같다. 이제 해는 완전히 고개를 내밀어, 거실을 서서히 오렌지 빛으로 물들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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