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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e Lee Oct 22. 2019

왜 퇴직을 했더라?

어느 백수 남편의 일기 (12)


“다음 주부터 비상이니까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회의 끝나면 다들 바로 퇴근하도록 해. 그리고 월요일에 출근할 때까지 핸드폰 다 꺼놔. 외부 연락 다 끊고. 우리 팀원들 믿고 미리 이야기하는 거니, 행여라도 이야기 새어 나가면 우리 다 같이 손잡고 퇴직서 쓰는 거야. 자, 다들 들어갑시다. 좋은 주말 보내고. 이상. 아, 그리고 천차장은 잠깐 남고.”

 

월요일 출근할 때까지 핸드폰 다 꺼놔.


한 주를 마무리하는 금요일 저녁의 인사팀 회의에서, 팀장은 덤덤하게 메가톤급 폭탄을 던져놓았다. 그것도 아직 터지지 않은 시한폭탄을. 이번 주말이 지나 월요일이 오면, 우리 회사는 그룹 내의 다른 계열사에 흡수 합병된다. 하루아침에 내 명함의 회사 마크가 다른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번 주 내내 인사팀장과 재무팀장이 대표이사와 세트로 지주사에 불려 다녔던 이유가 이거였던가 싶자 알 수 없는 배신감이 차오른다.

 

“아직 임원들한테도 통보 안 갔어. 아마 일요일 저녁에나 윗급에서 연락을 주겠지. 주말에 괜히 핸드폰 켜면 골치만 아플 거야. 조용히 마음 가라앉히고 편안하게 주말 보내. 앞으로 한 동안 맘고생 많이 해야 할 거야.”

 

퇴근길이 겹쳐 늘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는 차장님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무게감을 더한다.

 

“지난주부터 팀장님이랑 명단 작업하느라 죽을 맛이었어. CDP 대상자 선정하느라.”

 

우리 팀에서 말하는 CDP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보통의 경우에는 Career Development Program, 즉 직무 순환을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차장님이 말하는 CDP는 다르다. C Player Departure Program. 다른 말로 저성과자 퇴출. 위장막처럼 만들어진 은어다.

 

“합병사가 고객 서비스 인력 다 흡수 못하겠대. 반으로 줄여 놓으라더라. 임원도 반 이상 짐 쌀 거야. 정호 씨 아직 피바람 부는 회사 겪어본 적 없지? 이번 주말엔 무조건 아무 생각 말고 푹 쉬어. 혹여라도 말 새지 않게 조심하고.”

 

그 날은 어떻게 집에 돌아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온몸의 혈액이 모두 알코올 분자로 변한 것처럼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그런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저녁도 거른 채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더랬다. 

 



고요한 주말을 보내고 온 회사는 전쟁터에 가까웠다. 핸드폰을 켜자 부재중 전화 메시지가 30건이 넘게 찍힌다. 메시지 또한 얼마나 왔는지, 카톡이며 문자며 그 숫자를 명확히 파악할 수 없다. 유선 전화는 쉴 새 없이 울리고, 포털사이트 뉴스 페이지 1면에는 우리 회사의 합병 뉴스가 떠있다. 오전 7시 38분 업로드. 기사 내용은 현실성이 거세된 채 이미지와 문자만 둥둥 떠다녀, 마치 연예인 열애 뉴스 같은 느낌이다. 

 

아니, 이건 드라마가 아니다. 우리가 헐떡이며 헤엄치고 있는 현실이다.

 

그 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업무가 일상을 덮쳤다. 합병 회사의 대표는 임원진과의 면담에서, “우리가 점령군이 될 생각은 없다. 대규모 실직 사태는 없을 테니 본업에 충실해주기 바란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임원 중 일부는 이미 출근을 하지 않았고, 나의 이메일 함에는 빨간 느낌표가 찍힌 ‘인비’ 문서가 도착해 있었다. 첨부파일에는 나에게 할당된 퇴사권고 직원의 명단이 빼곡히 적혀있다. 대부분이 콜센터의 계약직이었고, 간간히 정규직 직원의 이름이 섞여있었다.




“형님, 오랜만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얼굴을 보내요.”

 

잘 지내셨나요. 얼굴이 많이 수척해지셨어요, 라는 말에도 답 없이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나, 오늘 좀 비싼 거 먹어도 되지?”

 

눈 한 번 맞추지 않고 바로 메뉴판을 든다. 메뉴판 너머로 들리는 음성. 

 

“예, 형님, 드시고 싶은 걸로 편하게 드세요.”

 

차마 ‘오늘은 법인카드로 긁을 겁니다.’라는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상관없다. 오늘은 법인카드로 실컷 긁어줄 것이다. 10만 원이고 20만 원이고 시키고 싶은 것은 다 시켜야지. 오늘은 무조건 한우다. 업진살도 먹고, 육회도 먹고, 제비추리도 시킬 거다. 재무팀 태클 따위 엿이나 먹으라지.


오늘은 법인카드로 실컷 긁어줄 것이다.
재무팀 태클 따위 엿이나 먹으라지.


나보다 다섯 살 연상인 그는 고객서비스팀에서도 험하기로 유명한 콜 직원들에 대한 통솔력이 높기로 유명했다. 그 명성으로 그는 5년 전, 노사협의체의 근로자 대표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계약직 직원들의 복지와 재계약 건으로 3년간 하루가 멀다 하고 팀장과 부딪혔다. 

 

스스로는 아니라고 했지만, 팀장은 그가 ‘강성’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면, 나는 그를 ‘돈키호테의 말고삐를 쥐고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산초’ 정도라 말했을 것이다. 그냥 마음씨 따듯한, 정이 많아 다른 사람을 위해 나서기를 조금 잘하는 분입니다. 강성이라니 어림도 없어요,라고. 하지만 이 회사처럼 모든 것이 고요하게 흘러가는 곳에서, 그는 팀장에게 충분히 쟌 다르크나 리어왕과 견줄만한 인물로 보였다. 

 

늘 싸워야 할 상대로 마주했던 그를 ‘한 사람’으로 마주하게 된 것은 어느 날씨 좋은 주말의 일이다. 

 

“고객서비스팀 고 과장 애기 돌잔치가 있네. 누가 갈래?”

 

직원 경조사에 모두 다 참여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직원 경조사에 인사팀이 아무도 참석하지 않는 것을 누구도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궁여지책으로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경조사에 참석해왔고, 이번 차례는 나였다. 

 

가서 축의금 봉투나 주고 와야지. 기왕이면 밥이 맛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향했던 돌잔치였다. 그곳에서 나는 티 없이 울고 웃는 아이와 피로에 부은 얼굴을 미소와 화장으로 감춘 엄마, 그리고 이마에 핏대를 세우던 고 과장의 인자하고 수줍은 미소를 보았다. 처음으로 그의 속살을 본 것 같았던 그 날. 자리를 마무리하고 떠나려 하는 차에 그가 말했다.

 

“와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애기가 너무 예뻐요. 그리고 형수님도 예쁘시네요. 좋으시겠어요!라고, 나도 모르게 술술 말이 나왔다. 늘 껄끄러웠던 그에게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하게 될 줄이야. 

 

“아니에요, 정말 고마워요. 설마 인사팀에서 와줄 줄은 몰랐는데. 다음 주에 내가 밥 한번 살게요. 정호 씨 편한 날짜로 한 번 잡아요.”

 

네, 과장님. 연락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라는 말에 그는 다시 수줍게 웃어 보였다. 그다음 주에 함께 했던 저녁식사에서, 반쯤은 술김에 나는 그를 형님이라 부르고 그는 나를 동생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도 별 다를 것 없는 보통사람이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노사협의체 위원 임기 마치시고 뵌 게 처음이네요. 2년 만이라니, 시간 정말 빨라요. 애기는 어떤가요? 이제 어린이집 갈 때가 되었겠네요.”

 

고기가 다 익기도 전에, 그는 연거푸 소주 세 잔을 비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보지만 그는 아무 대꾸가 없다. 나도 더 이상은 꺼낼 말이 없어 조용히 함께 술잔을 부딪히고, 함께 잔을 털어 넣고, 그리고 잔을 채워준다. 영롱한 녹색 소주병에 방울져 내리는 물방울이 내 등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 같다.

 

“고기 식겠어요. 형님, 예전에는 그렇게 잘 드시더니, 왜 이렇게 못 드세요. 혈색도 별로 안 좋으신 것 같은데, 몸 챙기셔야죠.”

 

한가득 시킨 고기 더미가 영 줄어들 줄을 모른다. 애꿎은 불판만 갈기를 몇 번. 소주병이 쌓여갈수록 그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가고, 눈동자의 초점이 흐려진다.

 

“정호야.”

 

“예, 형님.”

 

불판 위의 고기가 다 타서 먹기 힘들 정도가 되어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나도 써야 되는 거지?”

 

숨을 고르고 그의 얼굴을 본다. 까맣게 타는 고기 위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라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예… 형님.”

 

다시 비워지는 술잔. 손을 뻗어 그의 잔을 채운다. 술을 따르는 내 손이 떨려온다.

 

“형님… 아시죠. 어차피 못 이겨요.”

 

죄송합니다, 라는 말에 그가 웃는다. 피식, 하고 공기가 빠지는 소리. 그리고 그는 허리를 펴고 자세를 고쳐 앉는다. 듬직한 그의 양 어깨가 활짝 펼쳐진다. 공작새 깃털을 등에 단 장비 같은 모습이다.

 

“그래, 알았다. 미안하다 정호야. 우리 오늘 진짜 배 터지게 먹자. 이모! 여기 소주 2병 더!”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밝은 표정으로 고기를 삼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아이가 어찌나 말을 빨리 배우는지 모른다. 말하는 게 어른 같아서 엄마가 가끔 못 당하기도 한다. 형수님은 아이가 더 클 때까지 곁에 있어주고 싶다며 복직을 포기했다. 요즘은 와이프가 차려주는 아침 식사를 먹고 출근하는데, 맞벌이할 때는 꿈도 못 꾸던 황제 대접이란다. 

 

그리고 묻는다. 너는 어때, 결혼식 때 갔었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했어. 제수씨가 예쁘고 참해 보이더라. 복 많은 녀석. 신혼생활 좋지?라고.

 

몇 년의 공백을 메우는 대화가 이어졌다. 한 건물 안에서 지내며, 층과 팀이 다르다는 이유로 2년을 떨어져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회사에서 정해준 접점이 사라지자 그만큼 우리의 인간적이라 여겼던 관계도 희미해져 갔던 것일까. 그와 대화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시간 속에, 그의 반짝이는 일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문득 그의 아이가 보고 싶어 졌다. 형님은 나를 삼촌이라 소개할 테고, 나는 그 아이를 조카라고 부를 것이다.

 

“어우, 너무 마셨나. 나 잠깐 화장실 좀.”

 

한참을 쏟아내던 이야기가 잦아 들어갈 때쯤, 그는 화장실을 향했다. 그가 떠난 자리 위로 난잡하게 서있는 텅 빈 소주병을 세어본다. 정말이지 많이도 마셨다. 그가 회사를 떠나면, 나는 그의 자리에 이 소주병을 세워두리라. 떠나는 산초를 열병하는 소주병 병사들이다.

 

“야, 화장실에 뭐야?”

취객들의 소음 사이로 아르바이트생의 대화가 귓가를 파고든다.

 

“누가 화장실 안에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네. 누가 들어갔는지 봤어? 아, 진짜 곱게좀 마시지. 꼭 술 마시면 저렇게 골치 썩이는 사람들이 있어.”

 

물끄러미 화장실의 입구를 쳐다본다. 취기 어린 목소리 사이로, 고장 난 라디오의 잡음처럼 목놓아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가방 안에는 클리어 파일에 소중히 모셔 놓은 종이 한 장이 있다. 수줍은 폰트 크기로 ‘사직서’라 쓰인 이 종이는 언제 형님에게 건네야 할까. 티 없이 웃던 그 아이는 나를 만나 삼촌이라 불러줄까. 나는 그 아이를 조카라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수줍은 미소를 가진 이 형님을, 계속 형님이라 부를 수 있을까.  


티 없이 웃던 그 아이는 나를 만나 삼촌이라 불러줄까.
나는 그 아이를 조카라 부를 수 있을까. 


겨울의 밤공기가 찼다. 집으로 향했던 그 길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행여 잃어버릴까 클리어 파일이 든 가방을 소중히 끌어안고 택시를 탔던 기억이 난다.


종이에는 익숙한 형님의 필체로 쓰인 이름 석 자가 있었다. 세 글자, 그 이름이, 혹시 내 것인가 싶어 감기는 눈으로 몇 번이고 들여다보다, 다시 눈을 감는다. 바람을 가르며, 택시는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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