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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e Lee Oct 22. 2019

수험생이 되다

어느 백수 남편의 일기 (10)


“노무사 시험 준비를 할까 해요.”

 

퇴직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내는 퇴직 선언을 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은 생각했다.
더 이상 회사에 기대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


아내 또한 앞으로 남편이 할 만한 일을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선택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뼛속까지 인문학의 세례를 받은, 특별한 기술이나 실용 전문지식이 없는 남편. 그나마 기댈 것은 몇 년의 대기업 인사팀 경력뿐인 남편. 하지만 남편은 생각했다. 더 이상 회사에 기대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

 

“직장인의 삶은 단순해. 새벽에 별을 보며 출근해서 저녁 별을 보며 퇴근하지. 정해진 룰에 맞춰 사무업무를 처리하고, 이따금 발생하는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거야. 시스템에 허점이 보이거나 상황이 바뀌면 그에 맞게 룰을 수정하고 1년 주기를 따라 기승전결을 그리듯이 사이클을 돌고 나면, 다시 비슷한 한 해가 시작될 거야. 가끔 회사 실적이 파도를 타도, 안정적인 대기업 직장인의 피부에는 별로 와 닿지 않아. 부진한 실적의 책임이 내게 있는 것만 아니면 그만이지. 그렇게 하루하루를 쌓아가면서 나이를 먹고 직급이 올라, 40대가 되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하겠지. 100세 시대인데. 벌써부터 명예퇴직을 하는 동기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나 또한 그 대상에서 예외는 아닐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발동하는 거야.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고민하지만, 대기업의 고루한 프로세스에 익숙해진 사고방식은 예전처럼 유연하지 못해. 말랑말랑했던 20대의 두뇌는 사라지고 술과 야근에 절은 장아찌 같은 머리만 남은 기분이 들어. 남은 인생 60년을 위해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하는데, 안개 낀 도로처럼 불확실한 앞날과 아이들의 학비, 은행 대출이 눈에 밟혀. 결국 젖은 낙엽처럼 하루라도 더 회사에 붙어있는 것이 이득이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게 되지. 말 그대로 버텨내는 거야. 고요 속의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운이 좋아 성공적으로 50대 중반쯤에 퇴직을 하게 되면, 평생 만져보지 못했던 억대의 돈이 든 빛나는 퇴직금 통장을 손에 쥐게 되지. 아홉 자리 숫자가 찍힌 통장은 잠시 만족감과 보람, 그리고 자신감을 주지만 그마저도 한 달 정도 후에는 사정이 달라질 거야. 20년 넘게 숨 죽이며 일궈냈던 그 몇 억 가지고는 할 수 있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거든.”

 

나보다 1년 먼저 입사하고, 또 정확히 나보다 1년 먼저 퇴사한 선배는 눈을 반짝이며 소곤거리듯 말했다. 

 

“정년이 없는 전문직이 되어야 해. 아니면 커리어를 이원화해야 하지. 앞으로는 퇴직 이후의 삶에 대비해야 해. 회사는 퇴사 이후의 내 삶을 책임져 주지 않거든.”

 

선배는 회사를 다니며 모은 돈으로 로스쿨에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선배와 달리 나는 아내가 있고, 쓸 수 있는 시간과 돈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 현실을 고려해보았을 때 노무사는 상당히 좋은 선택지였다. 인사팀 실무에서 습득한 법 지식과 경험이 있었고, 게다가 1차 시험은 객관식 절대평가가 아닌가!

 

다음 날 아침, 핸드폰 수신함에는 아내의 문자가 와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200만 원의 입금 안내 메시지.

 

“교재도 필요할 테고, 동영상 강의 같은 것도 들어야 할 테니 필요한데 써요. 학원도 필요하면 등록해요. 모자라면 이야기하고.”

 

퇴직하겠다 이야기했을 때와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 생각한 것에 대해 따져 묻지 않는다. 실패할 때를 대비한 플랜 같은 것도 묻지 않는다. 이런 과분한 신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단순히 남편을 믿기에 취할 수 있는 자세라면, 아내의 믿음은 십자군 전쟁 시절 성당기사단의 신앙에 가깝다.

 

교재를 주문하고 동영상 강의를 등록했다. 6개월 동안 1차 시험에 필요한 모든 강의를 2번까지 들을 수 있는 코스와 교재비로 100만 원 남짓의 돈을 요구한다. 그나마도 일괄등록 20% 할인을 받은 것이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아내가 준 돈에 감사해야 할까. 몇 번의 클릭을 마치자 통장 잔고의 절반이 뿅, 하고 사라진다. 손가락 몇 번 까딱 거렸을 뿐인데.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한 번 무너진 생활 패턴은
그렇게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노무사 시험을 보겠다고 결심했을 때 고려하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한 번 무너진 생활 패턴은 그렇게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교재가 온 후에도, 나는 오후가 다 되어서야 하루를 시작했다. 회사에 다닐 때처럼, 근무하듯 공부를 한다면 수월하게 딸 수 있을 거라던 생각은 다섯 살 아이가 “나 엄마랑 결혼할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한 달간 집에서 생활하며 몸에 밴 습관도 골칫거리였다. 무료한 일상 속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했던 모든 것이 관성이라는 이름의 악마가 되어 내 몸을 조종했다. 집에 머무르며 공부를 하겠다니, 내가 잠시 미쳤던 게 틀림없다. 그 정도 정신력이 있는 그릇이었다면, 옛 저녁에 학벌부터 달라져 있었을 텐데.

 

시간이 갈수록 집을 벗어나야겠다는 믿음이 굳어져갔다. 외지로 이사를 온 덕분에 학원을 등록해서 다닐 여건도 되지 않는다. 집 근처에 버스나 지하철이 없는 탓에 서울로 출퇴근하듯 학원을 다니려면 왕복 3시간의 이동시간과 기름값, 그리고 주차비를 추가로 소비해야 한다. 그 돈이면 은행 대출 이자와 관리비를 내고도 남을 액수다.

 

그래서 찾은 대안은 독서실이었다. 인터넷을 뒤져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독서실을 찾는다. 기왕이면 노트북을 펼쳐놓고, 책상도 넓게 쓸 수 있는 독서실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눈에 들어오는 광고 문구. 

 

[최신 시설의 오픈형 독서실] 

 

집에서 10km 정도 떨어진 커피숍 인테리어를 닮은 독서실. 바로 옆에는 공영주차장이 있고 커피와 다과가 무료 제공된다. 이 정도면 커피값도 굳고, 이동 시간과 주차비도 크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 바로 전화를 걸어 월 정기등록을 마친다. 내일부터는 독서실을 나간다. 시험을 보겠다 결심하고 이 독서실을 찾게 되기까지 무려 석 달의 시간이 흘렀다. 갓 봄기운이 묻어나던 계절은 어느새 반팔을 찾게 되는 초여름으로 변해있었다.

 

햇살이 깔린 오전의 한적해진 국도를 따라 드라이브하듯 느긋한 마음으로 독서실을 향했다. 오늘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제대로, 확실하게 공부를 시작하리라 마음먹는다. 늘상 하는 그런 결심이 아니라, 오늘은 정말 뭔가 다르다. 게다가 오늘은 아내보다 더 일찍 일어나지 않았던가.

 

70평 규모의 오픈형 독서실은 한적했다. 오전 9시 오픈 시간에 맞춰 도착했는데도 이미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입구에 위치한 안내데스크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사장님이 코끝에 안경을 걸친 채 입구를 들어서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지정좌석은 지금 다 차고 없어요. 오픈공간만 사용하실 수 있는데, 개인 사물함도 드립니다. 지금 이벤트 중이라 10% 할인해 드립니다. 그리고 카페테리아에 있는 음료와 다과는 공짜지만 학습 공간에서는 과자 같은 소리 나는 음식을 드시면 안 됩니다. 아, 그리고 노트북은 미디어룸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친절한 건지 무뚝뚝한 건지 분간이 잘 가지 않는 사장님은 기계적으로 독서실 투어를 마치고 다시 입구 자리로 돌아간다. 묘하게 전 회사의 상무님의 실루엣이 사장님 걸음걸이 위로 겹쳐 보인다. 

 

사물함에 비밀번호를 설정하고 노트북과 교재, 노트를 챙겨 미디어룸 안에 자리를 잡는다. 커다란 창이 난 미디어 룸 안에도 운동복 차림의 학생 두 명이 먼저 자리를 잡고 동영상 강의를 듣고 있다. 노트북을 켜는 동안 슬쩍 눈을 돌려 그들의 자리를 본다. 9급 공무원 시험 교재와 회계사 시험 기출문제집이 눈에 띈다.

 

오후가 되자 허기가 졌다. 열린 공간에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사무실에서 흔하게 느꼈던 그 느낌이 영상과 책에 몰입도를 높여주었다.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보람. 카페테리아에 들어가 집에서 싸온 도시락으로 허기를 채운다. 충만감과 포만감이 동시에 몰려온다.

 

점심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자 노곤함이 눈 밑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카페테리아에서 커피 한 잔을 내린다. 홀짝, 홀짝. 10분 만에 비워버린 커피가 무색하게 눈꺼풀은 계속해서 그 무게를 더해간다. 

 

오랜만에 새벽에 일어나서 그래. 이럴 때는 10분 정도만 자도 다시 말짱해질 거야,라고 생각하며 엎드려 눈을 감는다. 등으로 내리쬐는 햇살이 따갑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조금 전까지 비어있던 맞은편 자리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본다. 분침이 한 바퀴를 돌아있다. 이런, 난감하다. 이게 아닌데.

 

맞은편 자리에는 머리가 M자로 벗어진 눈주름 가득한 중년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의 남자는 6,7년 전에나 유행했을법한 조그만 넷북과 교재 더미를 쌓아놓고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다. 저 나이에도 뭔가를 이루기 위해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한참을 곯아떨어진 모습을 보였다는 민망함에 다시 강의를 틀고 교재를 뒤적여본다. 

 

다시 강의에 집중이 되어가는 찰나, 눈주름 아저씨가 벌떡 자리를 일어나 팔뚝만 한 텀블러를 들고 카페테리아로 향한다. 이어서 들려오는 커피 내리는 소리. 

 

커피를 가득 담아 다시 자리에 앉는다. 자, 나도 다시 집중해야지, 하며 이어폰의 볼륨을 높여 모니터로 시선을 옮긴다. 하지만 쉽지 않다. 화면 너머로 배경처럼 눈주름 아저씨가 졸음 가득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햇살이 반짝, 반사되는 넓은 이마에는 태양열 접지판이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일정하고 규칙적인 고갯짓은 어쩌면 노호혼과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억지로 귓속에 강사의 목소리를 욱여넣는다. 하지만 강의가 중간에 다다랐을 때, 이어폰 너머로 새로운 노이즈가 낀다. 도르릉. 사장님이 방에 들어와 눈주름 아저씨의 어깨를 토닥인다. 아, 답답하다. 바람이라도 좀 쐬어야지.

 

거리는 눈을 뜨기 힘들 만큼 오후의 마지막 햇살에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다.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쉬며, 이제 곧 반팔로도 감당이 안 되는 날씨가 오겠구나 하고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눈주름 아저씨가 다가와 담뱃불을 붙인다. 칙, 쓰으읍. 이어지는 깊은 한숨과 함께 뿜어져 나오는 담배연기. 

 

우리는 말없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거리를 바라보며 담배를 빨아들였고, 이글거리는 해를 향해 연기를 뿜어댔다. 그리고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먼저 건물로 향하면서 꾸벅, 아저씨에게 목례를 한다. 어정쩡한 포즈의 반쯤 하다만 목례가 되돌아온다. 계단을 오르며 시간이 참 무섭다,라고 중얼거린다. 


습관이 너의 인생을 결정하게 될 거야. 


“시간이 습관이 되고, 습관은 관성이 된다. 그 관성이 너의 인생을 결정하게 될 거야.”

 

주말에도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하루를 준비하시던 아버지.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그 말이 불현듯 떠올라 귓가에 울린다.

 

미디어룸의 넓게 난 창 가득 하늘이 담긴다. 소리 없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햇살이 8차선 도로만큼 넓은 책상 위로 한껏 쏟아져내린다. 그 안에서, 나의 아직 새것 같은 노트북과 유행이 지난 아저씨의 넷북이 나란히 앉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5년이 지나면, 내 노트북도 저 구닥다리 넷북과 별 다를 것 없겠지. 

 

흘러가던 구름이 햇살을 가리자 두 자리에는 똑같은 모양의 그림자가 진다. 마치 데칼코마니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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