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백수 남편의 일기 (16)
[유정호 님! 대출금 만기일은 10월 06일입니다. 담당 직원과 상담 바랍니다]
올 것이 왔다. 대출 만기를 일주일 앞둔 어느 날 핸드폰이 울렸다. 간단명료한 메시지 속 느낌표 하나가 눈에 콕 박혀온다. 담당 직원이 누구더라? 아니, 어차피 한 번은 가서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좋겠지. 바람도 졸 쐴 겸.
“대출을 받으셨던 지점에서 상담을 진행하시는 게 좋습니다. 결국 대출 연장 서류를 처리하시려면 그 지점의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누셔야 합니다.”
요즘같이 인터넷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시기에 이렇게 불편한 시스템이라니.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전보를 치고 있는 기분이다. 시간과 에너지 모두 아깝기 짝이 없다. 아니 , 애초에 회사 앞 지점에서 대출을 받은 것이 화근이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백수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집 근처 은행에 들렀던 발길을 돌려 회사 앞 지점으로 향한다.
명동역. 넘쳐나는 인파를 헤치며 익숙한 길을 걷는다. 이 곳은 여전하다. 어딘가를 향해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휴가를 맞아 한국에 놀러 온 수많은 여행객. 수 천 번을 오고 갔던 이 길이 이렇게 낯설어질 줄이야. 하늘 높이 솟은 빌딩 숲 사이로 빼꼼, 회사 건물이 머리를 내밀고, 그 건너편에 은행이 보인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진다.
“유대리! 정호 씨 맞지?”
역시, 회사 근처에서 대출을 받은 것이 화근이다.
“이야, 정말 오랜만이네. 여긴 웬일이야? 어떻게 지내?”
“과장님, 오랜만입니다. 어디 가는 길이신가 봐요.”
홍보팀에서 말 많기로 유명한 홍 과장님. 배테랑 기자들을 상대로 지지 않는 입담의 주인이다. 서글서글 웃는 눈동자 너머의 날카로운 눈빛도 여전하다.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가 저 두 눈 뒤에 있다.
“미팅 있어서 나왔지. 이야, 정말 오랜만이네. 퇴사하고 연락 한 번 안 하고. 서운하네. 내가 결혼식도 갔었잖아. 요즘 뭐하고 지내? 일 하지?”
웃으며 던지는 질문 속에
날카롭게 벼린 덫이 있다.
하하, 하고 웃으며 던지는 질문 속에 날카롭게 벼린 덫이 있다. 아니, 가시 인지도 모른다. 잘 지내? 회사는 다니지? 우리 회사 그만두고 얼마나 잘 나가고 있는 거야?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성공했어? 이 시간에 여기 이런 차림으로 있다니 설마 백수로 사는 거야?라고.
“근처에 볼 일이 있어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조금 늦어서, 서둘러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어, 그래. 저기, 오늘 특별한 일 없으면 저녁이나 같이 하자. 오늘 홍보팀 회식 있거든. 늘 가는 회식장소 알지? 을지로 쪽 막걸릿집. 다들 반가워할 거야.”
빅마우스로 가득한 홍보팀 회식이라니, 검찰 취조가 오히려 마음 편하겠다.
“네, 과장님. 죄송합니다. 연락드릴게요.”
그래, 꼭 연락해, 라는 말을 뒤로하고 자리를 떠난다. 점점 빨라지는 걸음과 다르게 두 어깨가 무겁다.
“마이너스통장과 전세대출이 있으시네요. 둘 다 같은 날 만기고요. 재직증명서, 임대차계약서 사본, 그리고 원천징수 영수증만 가져오시면 됩니다. 직접 오기 힘드시면 팩스로 보내주시고 제게 전화 주셔도 되고요.”
지금 회사를 그만둔 상태입니다, 라는 말에 은행 직원의 밝은 미소가 사라진다. 가늘어진 두 눈이 이것 참 난감하군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모니터를 바라보며 키보드를 두드린다. 한참을 모니터와 눈싸움을 벌이던 직원이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어쩌죠, 전세자금 대출은 정부 지원 대출이라 괜찮은데, 마이너스 통장은 유지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괜찮다고 답한다. 사실 괜찮지 않다. 그저 어떻게든 해결해 나갈 수 있을 뿐이다. 마이너스통장의 금액 정도면 그래도 퇴직금으로 메꿀 수 있겠지. IRP계좌로 입금되었다는 인사팀 후배의 문자만 남아있는, 내 손으로 만져보지도 못한 그 퇴직금이 사라질 뿐이다.
은행 직원은 다시 필요서류를 안내한다. 이사한 집의 임대차계약서 사본만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임대인에게 확인 전화가 갈 겁니다,라고. 만기일 전까지는 마이너스 통장의 대출 금액을 채워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마이너스통장 연장이 안된대요. 퇴직금으로 마이너스 부분을 메울 거예요.”
수화기 너머로 아내의 침묵이 이어진다.
“어차피 갚아야 할 돈이었으니까. 그리고 생각해보면 일찌감치 털어냈어야 하는 걸 계속 안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틀린 말은 아니다. 일찌감치 해결했어야 할 부분이었다. 아내가 답한다.
“응, 알았어요. 멀리까지 나가느라 힘들었죠. 얼른 집에 들어가요. 나도 오늘은 일찍 들어갈게요”
은행을 나서자 도로 건너편에 회사 입구가 보인다. 정체된 차 사이로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숨바꼭질하듯 모습을 드러낸다. 왠지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띌까, 고개를 돌려 걸음을 재촉한다.
집에 돌아가자 아내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시계는 오후 5시와 6시의 중간 어디쯤을 흐르고 있다.
“뭐야, 어떻게 이 시간에 집에 왔어요?”
반차 내고 나왔어요,라고 말하며 김치찌개를 식탁 위로 옮긴다. 빨갛게 우러난 김칫국물 사이로 돼지고기가 뚝배기에 가득 담겨 합창이라도 하듯 보글거린다.
“요즘 독서실은 어때요? 공부하기 괜찮아요?”
“응, 조용하고 좋아요. 오픈형이라 남들 눈 때문에라도 집중하게 돼요.”
거짓말이다. 독서실은 지난달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나가지 않는다. 기름값과 주차비, 독서실 비용을 모두 합치면 한 달 치 대출금 이자를 넘는다.
“회사 근처까지 갔으면 아는 사람 마주쳤을 수도 있겠다. 누구 만났어요?”
“아니, 낮이라 다들 회사 안에 있으니까. 관광객만 바글대죠.”
김치찌개를 숟가락 가득 퍼서 입에 넣는다. 만났어요. 회식에 오라길래, 그러겠다 하고는 그냥 왔어요,라고 말하면 아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기왕 거기까지 간 거, 사람들 좀 만나보지.”
우물우물, 고기를 씹는다. 입이 빌 세라, 삼키기 무섭게 다음 숟가락을 뜬다.
“뜨거워요. 입 데겠다. 천천히. 안 뺏어먹어요.”
아내가 물을 따라주며 말한다. 그리고는 수저를 들다 말고 허리를 곧추세운다.
“오빠.”
우물우물. 고개를 들어 아내를 본다. 고기를 가득 문 입은 열리지 못한다. 아내가 입을 열려는 찰나, 핸드폰이 울린다. 장모님이다.
“여보세요. 응. 아니에요. 저녁 먹고 있었어요.”
안방으로 들어가는 아내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진다.
“응… 아니에요… 걱정 말아요… 이제 괜찮아… 다 나았어요… 아냐, 반찬 많아… 응… 알아서 할게요…”
리모컨을 들어 뉴스를 튼다. 앵커의 또렷한 목소리가 말한다.
[다음 뉴스입니다. 늘어난 가계대출이 위험 수준에...]
아내가 장모님과 통화하는 동안, 갖가지 사건 사고 소식이 흘러나온다. 명동 거리를 걷고 있을 때도, 집으로 향하는 중에도, 아니, 집에 머물던 그 고요한 시간에도 세상은 이런저런 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태양계 건너편의 이야기, 소설 속 인물들의 이야기인 것만 같은데.
안방 문이 열리고 아내가 식탁으로 다가온다. TV 볼륨을 줄이며 아내에게 묻는다.
“장모님?”
“응.”
“뭐라셔요?”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들. 반찬은 안 떨어졌냐, 건강은 괜찮아졌냐, 뭐 그런 이야기요.”
내려놓았던 숟가락을 다시 든다. 밥을 뜨자 그 위로 아내가 고기를 올려주며 말한다.
“엄마가, 처음으로 애 갖지 말라고 하네.”
엄마가, 아이를 갖지 말라고 하네.
처음이다. 늘 아이 가질 준비를 재촉하던 장모님인데.
“건강 때문에. 지금 상황에서 애 낳았다가는 손주 보기 전에 딸이 먼저 가겠다나. 건강 되찾을 때까지 애 생각하지 말래요. 오빠한테도 기분 안 나쁘게 잘 이야기 하라시던데.”
이번 추석에는 스트레스 덜 받겠네,라고 아내가 웃으며 말한다. 그러게. 이번에는 조금쯤 가벼운 마음으로 처갓집을 향할 수 있겠네. 정말, 그렇겠네. 부담이 줄었다며 웃는 아내.
소파에 앉아 초점 잃은 눈으로 TV를 본다. 뉴스에 이어 계속되는 뉴스. 앵커의 음성이 통나무처럼 텅 비어버린 몸을 타고 들어와 그대로 흘러나간다.
지금쯤이면 홍보팀 회식도 절정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목에 확성기를 달아놓은 것 같은 홍 과장의 건배사가 울려 퍼지면, 말 많은 팀원들도 지방방송을 끄고 잔을 부딪칠 것이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나도 그곳에 있었다. 그들과 함께 웃고, 그들과 함께 화내고, 그들과 함께 비틀거리며 잔을 부딪혔다.
잠이 몰려온다. 오랜만의 서울 외출은 거대한 모래주머니가 되어 온몸을 짓누른다.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감겨오는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리며 중얼거린다.
‘내가, 왜 그만뒀더라. 맞아. 월급에 독이 묻어있었지.’
독이 묻어있었다. 묻은 독을 뽑아내려고 했었지. 홍 과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묻는다. 그래, 그래서 독은 잘 뽑아냈어?
“글쎄, 잘 모르겠어요.”
은행 직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한다.
“어쩌죠, 어려울 것 같습니다.”
네, 어쩔 수 없죠,라고 대답한다. 어쩔 수 없다. 아내가 듬뿍 뜬 밥 위로 고기를 올려주며 말한다.
“기억하죠? 날, 간장종지에서 살게 만들지 말아요.”
아내가 웃는다. 미소로 화답하며 말한다.
“응, 그럴게요.”
미안해요,라고도 말한다. 그런데 아직, 태평양이 어디인지 잘 모르겠어요.
밤이 깊어간다. 부엉이 울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넘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