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오답노트 10화

어느 날 연예기획사 임원이 되었다

10. 보이는 것이 중요한 세상에 들어섰다.

by Kyle Lee

“오늘 업체 미팅 있는데 같이 가시죠.”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성큼성큼 내 자리로 걸어온 그가 말한다. 김이사. 그는 늘 이런 식이다. 타인의 일정을 임의로 옮기고 자르고 붙이는데 거리낌이 없다. 이 특이한 성격에 적응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어이없다는 듯한 나의 표정도 아랑곳 않고 그는 덧붙여 이렇게 말한다. 날씨도 좋은데 걸어서 갈까요? 산책 겸 운동 겸. 2시간 있다가 출발해요.


연예기획사를 하던 때의 일이다.


연예기획사의 임원이었던 때의 일이다. 몸 담고 있던 스타트업 팀에서 어느 날 갑자기 연예기획사 설립을 결정했다. 대체 왜…?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윗단에서 결정된 일에 토를 달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일이 되도록 하는 것. 연예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연예기획사가 설립되기까지 소요되었던 시간은 대략 3개월 정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듬성듬성 구멍이 뚫린 스펀지 같은 상태로 법인을 설립했다. 연예기획사를 하려면 대중문화예술 등록증이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법인 설립 이후에 알게 되었을 정도로. 우여곡절 끝에 대중문화예술기획업 등록증을 손에 넣기까지의 이야기는 또 다른 한 편의 작품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아무튼.


연예기획사가 설립되고, 남자 아이돌 팀을 꾸려 데뷔시키는 것이 확정되었을 때, 나 또한 이 연예기획사가 회사의 모습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나의 원래 전문 분야는 인사, 총무, 행정이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R&R이란 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당장 눈앞에 일이 있으면 해야 하고, 잠깐이라도 외면하는 순간 문제가 터진다. 큰 회사라면 보유한 인력과 자본으로 어떻게든 하겠지만, 이런 작은 회사는 잔파도 하나도 거대한 해일이 되어서 회사를 덮친다. 아이돌 멤버 오디션, 연예부 기자 접대는 기본이었고 홍보 기사문 작성이나 인력이 부족할 때는 스타일리스트 픽업이나 로드매니저, 그리고 방송 팬매니저와 팬사인회 진행요원이 되기도 했다. 노동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아서 오히려 편안했다. 그냥, 가서, 몸으로, 때우면, 되니까. 그렇게 해결되는 문제는 차라리 감사했던 시절이었다.


음. 아무튼.


미니앨범 활동을 끝내고 짧은 휴식기에 접어든 어느 날, 김이사가 내게 다가와 내게 말했다. 업체 미팅에 같이 나가자고. 당시 회사는 크게 두 파트로 나눠 볼 수 있었다. A&R과 앨범 기획 및 제작과 매니저팀을 담당하는 김이사. 각종 행정처리와 재무 정리, 그리고 인사, 총무, 법무 관련 업무를 처리하던 나. 연예기획사에서 돌아가는 모든 일은 이 두 사람을 거쳤고, 그렇기에 우리 두 사람은 서로의 영역을 조금씩 침범하며 어떻게든 부족한 인력과 예산으로 머리를 맞대고 고군분투하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아주 가끔, 깊은 빡침이 올라올 때면 짝짓기 짝을 두고 대립하는 발정기의 염소가 되어 맞댄 머리를 사정없이 들이받았다. 바로 오늘 같은 날. 김이사가 제멋대로 남의 스케줄을 한 마디 상의 없이 이리 자르고 저리 붙이며 휘두르는 그런 날.


하지만 역시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염소가 열을 내봤자 결국 풀이나 뜯는 초식동물이다. 그에 반해 김이사는 나보다 한 수 위였다. 외부 업무 활동이 메인이었던 그는 제법 육식동물 티가 났다.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 머리를 들이받은 들, 그는 능글능글한 웃음으로 넘겨버릴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 (얄미운 자식)


안녕? 어서 와.
잘 나가는 샵은 처음이지?


한차례 푸닥거리를 한 후, 기분이 풀린 나는 얌전한 양이 되어 업체 미팅을 따라나섰다. 상대는 업계에서 꽤나 이름을 날리는 헤어 메이크업 샵의 원장이었다. (웃기는 게, 업체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미팅 상대자가 누군지도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는 그냥 같이 산책할 친구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청담동의 한적하고 굽이진 어느 골목 끝에 자리한 샵의 외관은 마치 단독주택을 개조한 프라이빗 카페 같은 느낌이었다. 이게 대체 문으로서의 의미가 있나 싶은 무릎 높이의 목장 펜스 같은 문과 정원을 지나 건물 안에 들어서자 벽에 걸린 BTS와 트와이스 화보가 밝게 인사한다. 안녕? 어서 와. 잘 나가는 샵은 처음이지?


햇살이 좋은 날이었다. 스태프의 안내를 받아 정원에 설치된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자니 두 사람이 다가왔다. 헤어를 담당하는 남자 부원장과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여자 실장이었다. 명함을 교환하고 인사치레 겸 몇 마디 덕담을 주고받았다. 대부분의 대화는 나를 끌고 온 김이사가 진행했고, 나는 곁에서 오고 가는 대화의 흐름을 살폈다. 상대가 우리를 얼마나 흥미로워하는지. 우리가 고객으로서 그들에게 매력이 있는지. 혹시 협상을 유리하게 가져올 명분이나 허점은 없는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들을 주시하자 꽤 많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눈이 어디를 주목하는지, 표정은 어떻게 변하는지, 그들의 팔과 다리가 놓인 자세는 어떻게 바뀌는지(대화를 하는 도중 다리, 팔, 손의 위치와 변화 양상만 잘 파악해도 상대의 숨은 감정상태를 엿볼 수 있다. 살면서 터득한 매우 유용한 기술 중 하나라고 자부한다.)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한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입은 옷. 그들이 차고 있는 시계. 그들이 끼고 있는 반지. 그들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지갑. 그리고 그들이 신고 있는 신발.


다 아시면서.
아래 위로 스캔 들어가는 거.


“원래 샵 디자이너들이 그렇게 돈을 많이 버나?”


미팅이 끝난 후, 돌아가는 길에 김이사에게 물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를 보던 그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답한다. 형도 봤어요? 하고. 부원장이 차고 있던 롤렉스. 실장이 끼고 있던 까르티에 반지. 옷, 신발, 지갑 모두 하나 명품이 아닌 게 없었다며 호쾌하게 웃는다. 그리고 덧붙인다. 이 업계는 그런 게 중요하다고.


“연예계가 보이는 것에 상당히 민감해요. 저도 아직도 가끔 놀랄 때가 있어요. 지난번에 만났던 XX엔터 새끼 로드매니저는 지갑이 생 로랑이었다니까요. 뻔히 급여 수준 얼마나 될지 아는데. 무리해서 샀거나, 아니면 짭이거나. 어쨌거나 보이는 게 중요한 곳이더라고요.”


그리고 머뭇거리다, 말을 덧붙인다.


“형도 다 아시면서. 명함 줄 때 눈동자 움직이는 거 보셨잖아요. 순식간에 아래 위로 스캔 들어가는 거. 아마 그 생각했을 거예요. 이름도 없는 햇병아리 업체에서 왔는데, 과연 이 사람들이랑 거래하면 제대로 돈을 정산받을 수 있을까. 원체 외상 깔고 가는 게 많은 업계이고 돈 떼먹는 양아치도 많으니까 경계하는 거죠. 이 업계에서는 우리가 뭘 걸치고 있는지, 뭘 타고 왔는지 같은 것들이 우리 같은 신생 업체한테는 중요할 때가 많아요. 아직 시장에 신뢰가 없으니까요.”


적어도 제가 이 바닥 들어와서 경험한 바로는 그래요. 그가 말했다.


“그럼 오늘 그 사람들이 우리를 봤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이렇게 답했다.


“형은 특유의 말투와 분위기 때문에 뭔가 신비로운 측면이 있어요. 그런데 하고 다니는 차림만 보면 정말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거든요. 혼란스러웠을 거예요. 이 사람은 대체 뭘까.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그리고 나는 그 혼란스러움을 이용하는 거죠. 그가 말했다.


외모 콤플렉스가 심하던 시절이 있었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패션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중학생 때부터 나기 시작한 여드름이 온 얼굴을 곰보처럼 덮었고, 지나치게 예민한 성격은 키 180에 60킬로그램을 간신히 넘길까 말까 한 비쩍 여윈 몸을 만들었다. 그에 반해 세 살 터울의 누나는 지나치게 예뻤다. 당대를 호령했던 여배우인 고모의 전성기 미모를 빼다 박은 것 같은 누나를 본 사람들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내게 말했다. 너는 대체 왜 그 모양이냐고.


자연스럽게 외모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던 나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단점이 있는 영역 자체를 외면했다.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은 내면이 중요한 거지. 나는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이 될 거야. 그러니, 나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알아주는 이들과 함께 하겠다. 그런 생각으로 용케도 30대까지 버텨왔다. 자연스럽게 패션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나는, 결혼 전에는 누나와 어머니가 골라주는 옷을 입었고 결혼 후에는 아내가 시키는 대로 걸쳐 입고 다녔다. 중학생 때 입던 후드티를 잠옷으로 입고 있는 나를 보던 아내는 꽤 많은 말을 목구멍으로 들이 삼켰음을 이제는 안다. 나의 외모에 대한 무관심은 병적이었다.


Time, Occasion, Place.


T.O.P.라고 하던가. 사람은 세 가지에 맞게 드레스코드를 맞춰야 한다는 말. Time, Occasion, 그리고 Place. 회사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면서 김이사 혼자서는 업체 미팅을 모두 커버하지 못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혹시라도 나의 옷차림 때문에, 나의 이기적인 무관심 때문에 회사 일이 지장을 받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 길로 백화점을 쓸었다. 코트, 상의, 하의, 신발, 거기에 더해 약간의 액세서리. 쇼핑백을 양 손 가득 들고 12개월 할부를 외치는 나를 보며 점원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의 나는 그만큼 절박했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정말 다행히도 업체 미팅과 계약은 순조로웠다. 탑 티어라 할 수 있는 뮤직비디오 제작 업체, 떠오르는 강자로 이름을 알려가고 있는 헤어숍을 섭외했다. 업계에서 인맥으로 유명한 포토그래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시작으로 최고 수준의 스타일리스트도 영입할 수 있었다. 단순히 외적으로 가꾼 것이 대단히 많은 것을 결정짓지는 않았음을 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무엇을 어떻게 입고 있는지가 상대에게 주는 첫인상을 크게 바꿨고, 그로 인해 제법 일이 쉬워졌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10 어느 날 연예기획사 임원이 되었다.jpeg instagram : @maywithmayday


남들의 눈을 피해 살아왔다. 정말 자유롭게. 고고한 한 마리 학처럼.이라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모두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나 혼자 개성을 외쳐봐야 내게 돌아오는 것은 없는데. 나의 옷차림은 어쩌면 나를 만나는 상대에 대한 예의일지도 모르는데.


세상의 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영혼. 스티브 잡스가 맨발로 아타리 사무실을 종횡무진 누볐던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나 자신 그대로 세상에 받아들여지길 원하는 욕망은 여전히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 남아있다. 아주 가끔, 아니, 어쩌면 조금 자주 화장실 거울 너머로 보이는 내 모습에 어릴 적 콤플렉스 덩어리의 내 모습이 겹쳐 보일 때. 그럴 때면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다 집어던지고 싶어지는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어서.


스티브 잡스가 되는 것이 먼저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마음이 이기적인 사치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스티브 잡스의 기행은 그가 스티브 잡스였기에 가능했다. 누군가가 말했다. 당신이 유명해지면, 당신이 길거리에 똥을 눠도 사람들은 열광할 것이라고. 나는 그런 고집을 부리기 전에 스티브 잡스가 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내가 스티브 잡스가 된 것이 아니라면,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한 노력 비슷한 거라도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이전 회사를 나오면서, 이제는 다시 남에게 나를 드러내야 하는 일이 잘 없다. 덕분에 나는 다시 평화로운 작은 섬 같은 존재가 되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나만의 조그만 평화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어떤 자리가 만들어지면 적당한 수준의 차림으로 남에게 나쁘지 않은 인상을 주는 방법을 배웠다. 아니, 적어도 이제는 나의 차림새 때문에 남에게 거부감을 주거나 불편함을 주지 않게 되었다.


나의 소신이, 작은 신념이 깨어진 것일까? 잘 모르겠다. 가끔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뭐. 하고 생각한다. 역시,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내가 이런 나의 바뀐 모습을 썩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비록 내색은 하지 않을지라도.




[작가의 말]
글 : Kyle Lee (https://brunch.co.kr/@kylelee)
“여전히 외모에는 썩 자신이 없습니다만, 그래도 더 망가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이어트라는건 생각보다 정말 많이 어려운거군요...”

그림 : 매이 (instagram : @maywithmayday)
"기사도, 순수도 사라졌다는 시대에 ‘학’을 동경하는 건 허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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