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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e Lee Sep 04. 2022

밤이 무서워지는 유부남

01. 안 생기면 전부 다 내 탓이다

“다음 주가 배란일이에요.”


아내가 말한다. 소파에 기대어 드라마를 보던 눈동자가 떨린다. 스크린 속에는 떠난 구 씨의 빈자리에 홀로 남은 염미정이 울고 있다. 맹목적인 추앙의 대상이던 그가 시골의 깊은 산 그림자 너머로 몸을 숨겼다. 


지난 12년 동안 우리 사이에 큰 갈등이라 할 만한 일은 없었다. 결혼이나 이직 같이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문제에서부터 변기커버를 내리거나 양말을 빨래통에 넣을 때 주의해야 할 점과 같은 작은 문제까지, 우리는 이렇다 할 부딪힘 없이 잔잔한 파도를 건너듯 서로에게 맞추며 살아왔다. 적당한 출렁임이 자장가처럼 기분 좋은, 그런 파도다. 우리는 대화가 잘 통했고, 서로를 배려함에 소홀함이 없었다. 누군가가 그랬다. 우리를 보면 결혼이 하고 싶어 진다고. 그래서 우리를 함께 아는 사람들은 이런 별명으로 우리를 칭했다. 결혼 권장 커플. 우리를 수식하는 이 단어가 조금은 자랑스러웠던 듯싶다. 


난생처음으로 밤이 무서워졌다


은밀한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부부관계도 순조롭기는 마찬가지였다. 12년을 지내오면서도 우리는 서로에게 여전히 끌렸고, 상대가 나와 같은 마음임에 감사했다. 생활 속의 궁합도 흔히 말하는 속궁합도, 우리는 참 좋은 편에 속한다 자부했다. 


“일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꼭 해야 해요. 가능하면 목요일까지도.”


힘내요. 물 한 컵과 알약 한 움큼을 내 손 위에 올려놓으며 아내가 말한다. 엽산과 각종 비타민, 그리고 단백질 셰이크. 지금까지는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대체 뭘까, 이 기분은. 이 찜찜하고 찝찝한 기분은.


스물다섯에 나와 결혼한 아내는 이제 서른둘이 되었고, 지금의 아내 나이에 결혼했던 나는 앞자리 숫자가 바뀌었다. 여전히 아내는 젊고 건강하지만, 그에 비해 나는 기세가 꺾여가기 시작하는 중년의 나이에 들어섰다. 오죽하면 나이 마흔을 불혹이라 칭했을까. 마음과 정신의 성장 때문에? 글쎄. 그냥 기운이 달리기 시작해서 그런 건 아니냐고 묻고 싶어 진다. 


나이 마흔 쯤 되고 보니 내가 쓸 수 있는 에너지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무리 격정적인 밤을 보내고 난 다음 날이라도 멀쩡히 일어나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감당할 수 있었던 이, 삼십 대 때와는 달리, 밤에 무리를 한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무게감이 달라졌다. 바닷물에 푹 절인 전신 타이즈를 입고 움직이는 것 같은 아침 기상 시간을 지나, 눈 밑에 퀭한 다크서클을 달고 하루를 꼬박 채우면, 그다음 날이 되어서야 겨우 제 컨디션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체력과 기력이 떨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샌가 내 머릿속에는 밤일과 일상생활 사이에 조율해야 할 저울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단순히 체력만의 문제라면 운동과 식단 조절로 어떻게든 해볼 법도 한데, 문제는 회사였다. 회사를 옮긴 지 이제 겨우 한 달.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기력을 소진해 집에 돌아오면 바로 뻗어 잠이 들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런 내게 찾아온 일생일대의 위기. 설마 그 위기가, 아내와의 잠자리가 될 줄이야. 다시 한번, 내 나이 앞자리가 바뀌었음을 실감한다. 나는 더 이상 혈기 왕성했던 이십 대가 아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멍한 표정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나를 뒤에서 포근히 안으며 아내가 말한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요즘 많이 힘들어서 그래요. 새 회사에 적응하느라 스트레스 많이 받아서.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신경 쓰면 오히려 더 힘들어질지도 몰라. 괜찮으니까 그냥 털어버리고 푹 자요.”


고생했어요. 내가 재워줄게. 이리 와요. 아내가 나의 손을 이끌며 말한다. 난생처음 있는 일. 드라마나 유머 짤에서나 나올법한 그 상황이 내 삶에 닥칠 줄이야. 얼이 빠진 얼굴로 아내의 품에 안겨 눈만 껌벅거리던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누군가 우리를 본다면, 어쩌면 나는 아프리카 사자의 양팔에 안긴 축 늘어진 가젤 같아 보일지도 모르겠다고. 


이제 안 생기면 전부 다 내 탓이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산전 검사를 받기 위해 산부인과를 다녀온 아내가 흥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 좋대요. 어디 하나 문제 되는 게 없대.”


한 1년 정도는 무슨 조치할 것 없이 시도해보다가, 그래도 안 생기면 그때 다시 오라고 했어요. 당당하게 말하는 아내의 목소리에 짙은 자부심이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아내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그럼 이제, 나만 괜찮으면 되는 거구나. 그래서 결국, 안 생기면 전부 다 내 탓이 되는 거구나 라고. 


나의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았다. 20년 넘게 피우던 담배도 생각나고, 상사한테 잘 보이기 위해 억지로 마셔댔던 술에 절여져 생긴 지방간도 떠올랐다. 스트레스와 폭식으로 한 때 20킬로 가까이 더 붙었던 몸무게와, 지난밤 고개 숙였던 나의 그 처참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에게 문제가 없어야 할 텐데. 그런데 왜, 나는 꼭 씨 뿌리는 기계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일까. 이게 정말 맞는 건가? 다들, 이렇게 하나? 


다들, 이렇게 하나?


부부관계도 일이 될 수 있구나. 어쩌면 우리도, 언젠가 우리가 그토록 코웃음 쳤던 그 의무방어전이라는 걸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우리가 변해가는 것 같다는 느낌이, 아이를 갖겠다는 결심 하나로 바뀌게 되는 너무 많은 변화가 낯설었다. 


연애 4년, 결혼 8년. 도합 12년.


난생처음으로 밤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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