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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e Lee Sep 07. 2022

눈앞에 선명한 두 줄

02. 아내는 내가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고 말한다

“남편이 나이가 많다더니, 능력자였네?”


산부인과 접수처에 앉아있던 나이 지긋한 간호사가 아내에게 말하며 웃는다. 오호호호호. 산전검사를 한 지 한 달 만에 두 줄이 새겨진 임신테스트기를 들고 찾아온 아내를 반기는 인사 같은 농담이었겠지.


세 번의 시도만에 얻은 임테기 두 줄. 아무 문제없이 건강한 아내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히, 아마 내게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나 보다.


남편이 능력 자였나 보네?


밤을 두려워하던 나의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종마가 되어 합사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우리의 둘째 달 시도 때, 나는 아내에게 솔직한 나의 마음을 이야기했다. 이건 우리가 지금까지 가져왔던 관계와 너무 다른 것 같다고. 아이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지만, 너무 목적을 이루기 위한 건조한 행위 같아서 적응이 되지 않는다고.


아이를 간절히 바라는 아내는 이런 이야기가 불편할 법도 할 텐데, 그럼에도 그녀는 나의 이런 투정 같은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함께 해결책을 의논해주었다. 그 어떤 무시나 왜곡 없이, 아내는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의 두려운 밤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우리의 밤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단 한 가지, 반드시 횟수를 채워야 하는 날이 생긴 것만 뺀다면.


오랜 기간 준비했던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이를 갖는 것에 부정적이던 나와 아이 넷은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내의 줄다리기가 끝났던 4년 전, 그러니까 아내가 나의 고집을 꺾고 아이를 갖기로(하지만 넷은 아닌 걸로…) 합의가 되었던 그때부터 우리는 아이를 언제 가져도 될 수 있도록 준비를 시작했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당장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언제 생기더라도 후회나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건강만은 챙기자는 생각에서였다. 아내는 술을 완전히 끊고 철분과 엽산을 챙겨 먹으며 일주일에 3일 이상 꾸준히 운동을 지속했고, 나 또한 20년 넘게 펴오던 담배를 끊고 술도 월 1회 이하로 줄였다. 또 매일같이 엽산을 챙기고 꾸준히 운동을 하며 10kg 이상을 감량했다. 장장 4년에 걸친 준비 덕분에, 우리는 비교적 손쉽게 임신에 성공할 수 있었다.


아내는 내가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고 말한다


“이번 주 화요일이 생리 예정일인데 아직 기미가 안 보여요.”


목요일까지 소식이 없으면 테스트 한 번 해보려고요. 아내가 말했다. 나는 아내에게, 어쩌면 이번에 아이가 생긴 것 같지 않느냐고 물었다. 감기에 걸린 것도 아닌데 요 며칠간 체온이 오른 것이 느껴졌다. 평소에 몸이 냉골처럼 찬 사람이, 곁에 누우면 후끈할 정도의 체온이 느껴졌다. 생리 기간이 되면 간혹 이런 경우가 있었지만, 생리를 하기 전 꼭 피부 트러블 한 두 개씩 얼굴에 붙이던 아내의 얼굴이 이번엔 너무도 깨끗하고 뽀송하다. 어쩌면 정말 아이가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하자 아내가 말한다.


“지난달에도 생긴 줄 알았었는데 아니었잖아요.”


일단 목요일 아침에 확인해봐요. 그때까지 생리 시작 안 하면. 아내는 덤덤하게 이야기했고,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리고 목요일 새벽, 한참 출근 준비를 하며 옷을 갈아입고 있던 내게 다가와 아내는 눈앞에 두 줄이 선명하게 새겨진 임신테스트기를 들이밀었다. 짠! 하고 아내가 말한다.


아내는 내가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고 말한다. 정작 나는 그 순간의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어렴풋이 내가 웃었던 것 같기는 한데 어떤 감정이었는지, 왜 웃었는지 조차 모르겠다. 기쁨이었을까? 아니면 으레 그래야 한다는 무의식의 발현일까? 뭔가를 느낀 것 같은데, 그 감정의 실체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그런 신비로운 감각.


이런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이런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언젠가 아내가 임신 소식을 알리면, 내 가슴 한구석에서 부푼 풍선처럼 감정이 차올라 라스베이거스의 벨라지오 분수처럼 기쁨이 폭발하는 그런 상상. 그 정도쯤 되어야 아내가 실망하거나 속상하지 않고, 아내가 그토록 원하던 아이가 환영받는 존재임을 느낄 수 있지는 않을까 하고.


하지만 현실의 나는 여전히 그 묘한 떨림의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지 못한다. 이 감정이 기쁨인지, 아니면 두려움인지, 혹은 기대인지.


테스트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니 내일 한 번 더 테스트해본 후 병원에 가보겠다는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를 회사 앞에 내려주고, 나도 사무실로 향하며 멍하니 운전대를 잡았다. 아침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의 한적한 도로 위를 흐르듯이 달리자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답답함. 진짜 임신이라면 여러모로 배려를 받아야 할 시기인데 그럴 수 없다는 불안감. 그리고 누구보다 떨리고 답답하고 흥분과 기대에 차있을, 내가 사랑하는 아내.


아침 7시가 되기 조금 전 사무실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복도를 지나 방에 들어와 의자에 털썩 몸을 던지듯 앉았다. 불도 켜지 않고 멍하니 불 꺼진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흐릿하게 나의 얼굴이 비친다.


아내는 이제 엄마가 된다.
그리고 나는...


아이 넷은 있어야죠. 아내가 말한다. 엄마가 되고 싶었던 아내는, 결혼 후 4년 동안 나와의 기나긴 줄다리기를 거치고도, 다시 나의 터무니없는 스타트업 직장생활을 이유로 4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나중에, 우리 아이가 태어나면…”


아내는 습관처럼 말했다. 만약에, 나중에 우리 아이가 태어나면, 하고. 이미 그녀의 세상엔 우리 두 사람을 닮은 작고 소중한 아이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 마음의 세계가 현실로 성큼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이 한 걸음을 옮기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너무 오래 걸려 미안하고, 하지만 함께 걸을 수 있게 됨에 감사하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져왔다. 아내는, 그토록 바라던 엄마가 된다. 그리고 나는, 이제, 한 아이의 아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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