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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e Lee Oct 12. 2022

12년간 쓰던 애칭을 바꾼 부부의 사정

09. 아이는 모든 익숙한 것을 처음으로 되돌린다.

“아무래도 우리 호칭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에게 넌지시 말했다. 12년간 서로를 부르던 우리의 호칭은 애기. 아가. 애기 아가. 


대학 캠퍼스에서 아내를 만났다.


대학 캠퍼스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다. 화석 같은 복학생의 4학년 마지막 학기가 막 시작되었던 때였다. 마지막으로 딱 하나 남은 교양 학점을 채우기 위해 들어갔던 강의에서, 막 1학년 2학기를 시작한 아내를 만났다. 200명이 넘는 대규모 수업에서 유일하게 같은 과 후배였던 아내. 강의명은 여성학. 


여성학 교수님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난감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고학번 남학생을 타깃으로 여러 돌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고정좌석이 될 줄 모르고 가장 앞 줄에 앉았던 나는 종종 교수님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다행히 밴드 사이드 보컬을 하면서 무대에 대한 공포증은 별로 없었던 탓에, 나는 교수님의 짓궂은 돌발 질문들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교수님과 케미가 좀 잘 맞았던 건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 앞에 서서 난감한 질문에 능청스럽게 답하는 나를 아내는 눈여겨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오랜만에 들렀던 과방에서 나를 마주친 아내는 내가 같은 과 선배인 것을 알게 되었고, 바로 그날 아내는 내게 밥을 사달라고 조른 후 번호를 따갔더랬다. 


그 후 1년 반 동안 우리는 가까운 선후배 사이로 지냈다. 그리고 속에 있는 고민을 서로 털어놓을 정도로 신뢰가 쌓였던 우리는 어떤 일을 계기로 연인이 되었다. 


가장 먼저 바뀐 것은 언어습관이었다.


연인이 되고 가장 먼저 바뀐 것은 우리의 언어습관이었다. 한참 어린 친한 후배에게 편하게 말을 놓던 습관을 버리고 존칭을 쓰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영향이었다. 7:3 정도의 비율로 존댓말을 더 많이 사용하는 부모님의 대화 나누는 모습을 좋아했다. 상대에게 건네는 존댓말에는 상대에 대한 애정과 존중이 담겼고, 대부분의 문제는 차분한 대화로 해결되는 모습을 보곤 했다. 덕분에 내게도 작은 원칙 하나가 생겼고,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연애를 하게 되면 상대에게 존댓말을 쓰게 되었다. 설령 그 상대가 여덟 살 어린 여자 친구라고 하더라도. 


하지만 애칭은 달랐다. 귀엽고 아기자기한 느낌이 좋았다. 다른 곳에서는 보여주지 않는 어리광을 보이는 아내를 ‘애기’라 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도 나를 따라 ‘애기’또는 ‘아가’라 부르기 시작했다. 선배일 때는 보여주지 않던 각종 막내 기질의 애교가 우리의 일상 속에 더해진 탓일 것이다. 


그렇게 익숙해진 우리의 애칭은 진짜 아이가 아내의 뱃속에 자리를 잡으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짜 아기가 생긴 마당에, 아기 앞에서 서로를 아가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나 싶었다. 어른들 계신 자리에서 혹여나 실수로라도 습관처럼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분명 잔소리 세례가 쏟아질 것이 뻔했다. 


“뭐가 좋을까요?”


한참을 침묵하는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는 선뜻 좋은 답을 찾아내지 못했고, 나도 도무지 그럴싸한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우리는 한참을 머리를 맞대고 후보군을 추려냈다. 


결국 흔하디 흔한 '여보'일까?


우리 머릿속에서 끄집어낸 후보들은 하나같이 형편없었다. 남들이 다 쓰는 그런 호칭은 피하고 싶었던 유별난 성격의 우리는 애초에 ‘자기’나 ‘여보’같은 단어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며 머리를 쥐어 짜냈고, 그러다 보니 떠올리는 것들은 모두 어감상 너무 특이하거나 저게 뭐야 싶은 괴상한 것들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낭군님’이나 ‘서방님’ 같은 것이 있었고, 우리는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진절머리를 쳤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 내가 말했다.


“결국 그냥 여보라고 불러야 하나?”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정말 더는 다른 후보를 찾기 어려울 것 같다는 좌절감에 뱉은 말이었다. 아내는 병적으로 이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는 나의 특이한 취향을 이해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잠시 동안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


어릴 적, 천주교 집안에서 자란 나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세례명으로 부르는 것이 익숙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외가 친척들도 모두 어머니를 세례명으로 불렀다. 어머니의 이름 석 자보다 어머니의 세례명이 더 익숙했고, 그래서 내겐 세례명도 하나의 이름처럼 작용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다. 나는 루가, 아내는 이자벨. 


아내는 나를 루가의 영어식 발음인 ‘루크’라고, 그리고 나는 아내의 한국 이름을 부르기로 정했다. 당분간, 더 좋은 대안이 나올 때까지. 


영어가 한국어만큼이나 편한 아내는 꽤 자주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섞었고, 다행히 나도 간단한 대답 정도는 영어로 할 수 있었던 덕에 우리 일상에는 영어가 꽤 친근했다. 자연스럽게 아내가 나를 루크라고 부르는 것도 크게 어색하지 않았고, 뭔가 우리만의 특별한 호칭이 되어줄 것 같았다. 적어도 당분간은. 


반대로 나는 아내를 영어 이름이나 세례명으로 부르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내만큼 영어식 표현이나 발음이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냥 원래 아내의 이름을 부르기로 정했다.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아내의 이름을 부르기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우리 아이가 나이를 먹고 자라서 우리가 누군가와 아이를 매개로 마주하게 된다면, 그들에게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아닌 ‘누구누구 엄마, 아빠’로 인식될 것이라고. 아이가 커가면 커갈수록 우리의 존재감은 점점 더 아이에게 예속되기 쉬워질 것 같다고. 


임시라고는 하지만, 수많은 후보 중 이름을 호칭으로 고른 것에는 그런 생각이 깔려있었다. 아무리 우리 아이가 소중하고, 태어난 후에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우리의 인생에서 거대한 존재로 바뀌어간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서로를 누구 엄마, 누구 아빠로 여기지 말았으면 해서. 있는 그대로 서로를 바라보며 조건 없이 사랑하고 아끼던 우리 둘만의 순간들을 소중하게 지켜가고 싶어서. 


그래서, 한동안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오롯이 마주하기로 했다. 나는 아내의 이름을, 아내는 나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상대를 담을 수 있는 더 좋은 표현이 떠오를 때까지, 우리는 처음으로 돌아가 상대의 이름을 부른다.


익숙했던 것을 버리고 다시 처음처럼 시작하는 것.


이제는 익숙했던 것들을 버려야 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12년간 애정을 담아 서로를 부르던 말이 한순간에 바뀌듯,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을 잘라내고 버려야 하며, 어떤 것은 바뀌고 난 후 한참 동안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길 위에 들어섰고, 이전보다 더 많이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아이는 익숙한 것을 버리고 처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이 있는가 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큰 불편을 느끼면서도, 조금은 우리에게 찾아온 새로운 환경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변화의 끝에는 지금보다 더 좋은, 기분 좋은 익숙함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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