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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e Lee Nov 06. 2022

누군가 그랬다. 최고의 효도는 손주라고.

13. 처음으로 어머니가 다섯 줄짜리 카톡을 보내셨다.

오랜만에 전 직장 사수를 만났다. 지난 몇 년간 스타트업을 통해 모험의 길을 나섰던 나는 롤러코스터를 타듯 제법 부침이 많은 시간을 거쳐왔다고 생각하지만, 이 사람은 나와 차원이 다른 길을 지나왔다. 일반 회사원에서 정치권과 금융계를 거쳐 지금은 알짜배기 법인 몇 개를 경영하는 대표가 된 사수. 나의 처음이나 다름없는 직장에서 업무 기초를 닦아준 스승 같은 사람이고, 메마른 사막 같은 회사생활에서도 인간적인 정을 느낄 수 있었던 사람. 


다행히 이 분도 나와 함께했던 시간이 싫지는 않았던지, 퇴사 이후에도 꾸준히 연락하며 가끔 술잔을 기울이는 형 동생 사이로 만남을 유지했다. 해가 거듭될수록 관계는 더 가까워져서, 이제는 아내와 함께 만나도 어색하지 않을 사이가 되었다. 


“이제 다 컸어. 우리 아들.”


술잔을 채워주며 형이 말한다. 처음 회사에 들어갔던 해의 여름 막바지에 형은 그토록 바라던 아빠가 되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회사가 끝나고 형이 있는 산부인과에 들러 축하인사를 전하며 급하게 형이 필요로 하던 물건 몇 가지를 전달해주었다. 신생아실에 있던 아이도 유리 너머로 만나볼 수 있었다. 어찌나 조그맣던지. 


그런 형에게 저녁 약속을 잡으며 내가 말했다. 좋은 소식이 있다고. 어, 그래. 시큰둥하게 답했던 형은 아내와 함께 사무실로 찾아간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하단 듯이 첫인사를 건넸다. 축하해. 몇 주야?


뻔하지 뭐.


“축하해. 몇 주야?”


“이제 9주 되었어요. 아직 많이 초기라서 주변에 말하기 조심스러운데, 형 만난 김에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묻자 형이 미소를 띠며 답한다.


“뻔하지 뭐.”


그리고 형은 봉투 하나를 아내에게 내밀며 말한다. 


“먹고 싶은 거 잘 챙겨 먹어. 먹고 싶은 거 생겼을 때 누구한테 부탁하고 그러면 시간 걸리고 눈치 보이고 불편하잖아. 그럴 땐 그냥 조용히 배달시키면 돼.”


너희 아이 생기면 내가 백만 원 쏠게. 언젠가 술기운이 올라 빨갛게 볼이 상기된 형이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나도 아내도 기억도 못하고 있던 것을 이렇게 지키는 게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최고의 효도는 손주다.


자리를 옮겨 저녁식사를 하러 간 곳에서 형이 말했다. 최고의 효도는 손주라고.


“부모님이 많이 좋아하시지 않아? 너희 결혼한 지 벌써 8년 넘었지? 많이 기다리셨을 텐데. 최고의 효도는 손주라고, 자식 볼 때랑은 또 많이 다른 모양이더라고.”


이제는 자기는 안중에 없고 손주만 찾는 어머니 이야기를 하며, 형은 웃고 있었다. 


“아이가 주는 행복감은 차원이 달라.”


이제는 너도 알게 될 거야. 빈 잔에 소주를 채워드린다. 무엇이 그토록 형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걸까. 궁금해졌다. 


“어떤 게 그렇게 행복하세요?”


형이 답한다.


“지난 주말에, 피곤해서 와이프도 나도 늦잠을 자고 있었어. 그런데 눈을 떠보니까 애가 옆에 와있는 거야. 얼굴에 불만이 가득해서는. 그리고 첫마디가 이래. 배고파. 밥 줘. 아주 그냥 얼굴에 짜증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다시 묻는다. 그게, 형이 느낀 차원이 다른 행복했던 순간이냐고. 이 이야기의 어디가 아이가 주는 행복감과 연결이 되는 걸까 싶었다. 엄마 아빠가 밥 주는 기계가 되는 슬픈 이야기 같은데. 하지만 형은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그리고 행복해 보였다. 


꼬물이는 이제 2.8센티가 되었다.


9주가 되어 아내는 병원을 다녀왔고, 우리 아이가 2.8센티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심박수 180에 머리와 몸통이 일대 일 비율로 젤리 곰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며 아내는 경이로운 기적을 본 것처럼 흥분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쏟아낸다. 


“꼬물이가 꿈틀거리는 모습도 보이고 팔도 선명하게 보였어요. 다리도 있긴 한데, 아직 완전히 만들어지지 않았어. 아마 다음 주 정도에 완성될 것 같다고 해요. 그리고 그거 알아요?”


이번 주에는 우리 꼬물이 손가락에 지문도 생길 거예요. 달뜬 목소리로 아내가 말한다. 아내의 두 눈에 반짝, 별빛이 담긴다. 


초음파 영상을 양가 부모님께 보내드렸다. 스마트폰을 어려워하시는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다섯 단어 이상의 메시지를 보내신 적이 없었다. 그러던 분이, 장장 다섯 줄이 넘는 카톡을 보내신다. 우리 때는 이런 거 없었는데. 신기하네. 얼굴도 보이는 것 같아. 어머 얘, 움직이는 것 좀 봐. 돋보기안경을 쓰고 게슴츠레 뜬 눈으로 손가락으로 한 자 한 자 톡톡 누르셨을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 입가에 진 은은한 미소와 곁에서 성악가 특유의 굵직한 울림으로 껄껄 웃으실 아버지의 모습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는 일


뱃속의 아이가 점점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그 크기가 조금씩 커져가는 모습이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부모님이 이렇게 순수하게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도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형이 아이의 짜증 섞인 표정을 보며 느꼈을 행복을 왠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형의 가슴에 벅차올랐을 그 순간의 큰 행복이 어떤 것이었을지. 아주 조금은, 나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지금 그 길 위에 올라와 있음을.


형에게 물었다. 대체 아이의 그 배고픈 짜증의 어디가 그토록 행복했었느냐고. 


형이 대답했다. 어느새, 이렇게 컸어. 다 컸어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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