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옳다고 믿던 것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결혼은 성인이 되어 독립을 하는 것인데, 경제적으로도 독립할 수 있어야 진정한 독립이지.”
지금으로부터 9년 전,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갔던 자리에서 장인어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는 건데, 우리는 너희를 도울 생각이 없다. 너희가 결정하고 그 결정에 책임을 져야지. 스스로 할 수 있어야 진정한 독립이고 결혼도 의미가 있는 거다.”
장인어른의 신념은 확고했다.
아직은 철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걱정되셨던 것일까. 장인어른은 결혼을 조금 늦추고 목돈을 먼저 모을 것을 권하셨다. 아직 스물네 살 밖에 되지 않은 딸이 결혼을 하겠다는 것도 그렇지만, 결혼을 하겠다는 두 사람 모두 취업에 성공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모은 돈이 없다는 것도 큰 걱정거리였을 것이다. 이에 나는 아버님께 이렇게 답했다.
“아버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깊이 새기고 고민해보겠습니다.”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어야 진정한 독립이고, 결혼식은 그 첫걸음이다.
“어떻게 할까?”
장인어른과 헤어지고 둘이 남게 되었을 때 아내가 물었다. 나는 큰 고민 없이 이렇게 답했다.
"뭐가 걱정이에요. 결혼하면 되지."
나의 생각은 단순했다. 장인어른이 말씀하신 대로라면 우리는 성인으로서 우리의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어차피 우리 힘으로 해야 하는 결혼이고, 그 뒷감당도 우리 몫이다. 연애를 하면서 드는 돈을 생각하면, 차라리 결혼 후에 알뜰하게 같이 모으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물론 결혼하고 나니 생각처럼 되지는 않았지만).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결혼을 반대하시는 게 아닌 경제적인 독립의 문제라면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선택한 방법이 아버님의 생각과 조금 다를 뿐.
결혼식의 주인공이 아내와 나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얼마 후 양가 부모님께 결혼을 진행할 것을 말씀드렸고, 약 1년에 걸쳐 결혼식을 준비했으며, 알뜰하고 소박하지만 무난하고 예쁜 모습으로 결혼식을 치렀다. 양가 부모님 모두 우리의 선택을 존중해주셨고, 우리 또한 경제적 독립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였을까. 우리는 결혼식의 주인공이 당사자인 아내와 나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결혼식은 철저하게 우리의 의도대로 준비했고, 모든 결정도 우리가 내렸다. 양가 부모님의 조언을 듣기는 했지만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명령은 없었다. 정말 철저한 ‘우리의’ 결혼식이었고 그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우리가 정말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손을 벌리는 일 없이 우리가 내린 결정대로 행동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일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도 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원칙을 무너뜨리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결혼식에 같이 가줄 수 있어요?
“이번 주 주말에 결혼식 같이 가줄 수 있어요?”
나랑 친하게 지내는 직장 동료가 결혼을 하는데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아내가 말했다. 평소에도 아내가 퇴근 후에 종종 이야기해주던 익숙한 이름의 주인공이었다. 사람에 대한 편식이 심하고 기준이 남다르게 높은 아내가 이 정도로 애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런 자리에는 잔말 말고 함께 가야 한다. 더더군다나 임신한 아내를 혼자 보내기도 마음에 걸리고.
그런 생각으로 아내의 직장 동료 결혼식에 갔다. 환하고 밝게 웃는 신부와 잔뜩 긴장한 얼굴에도 안에서부터 스며 나오는 미소를 주체하지 못하는 귀여운 신랑이 있는 결혼식. 누가 보아도 참 예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곧, 결혼식을 시작한다는 안내와 함께 양가 어머니가 화촉점화를 위한 행진을 시작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양가 어머니의 화촉 점화가 있겠습니다.”
순간,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신랑 신부 입장이나 행진과 달리, 내게 화촉 점화는 부수적인 의례일 뿐이었는데. 이 날은 신기하게도 너무나 뚜렷하게 두 어머니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슬로 모션처럼 두 눈에 각인되었다. 손에 꼭 쥔 라이터. 불을 붙이기 위해 쭉 뻗은 두 팔의 어색한 포즈. 그 떨리는 손 끝과 긴장으로 하얗게 질린 얼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두 어머니는 지금의 우리처럼 젊은 나이에,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새로운 생명을 신기하고 막막한 기분으로 마주했을 것이라고. 길고 긴 시간을 건너 세월이 주름이 되어 얼굴에 자리 잡은 지금, 두 어머니의 젊음을 먹고 자란 두 아이가 새로운 삶으로 향하는 길을 마주하고 있다고.
저 두 분은 이 자리에 서서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저 두 분의 눈에 담긴 예쁜 새 부부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우리가 주인공이라 생각했던 8년 전의 그 결혼식에서 나의 부모님은, 그리고 아내의 부모님은 어떤 생각을 하며 우리 두 사람을 마음에 담으셨을까.
천천히 나의 성장과정을 돌이켜보았다. 나의 관점이 아닌, 부모님의 관점으로 나의 어린 시절을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듯 더듬어본다. 학원에 가기 싫어 거짓말을 했다 들켰던 기억. 과자가 먹고 싶어 어머니 바지 주머니에 들어있는 동전을 훔쳤던 기억. 작은 고모 집에서 자겠다고 때 써놓고, 새벽에 울면서 데리러 오라고 또 때를 썼던 기억.
생각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이, 아이를 갖는다는 것이, 아이를 키워 한 사람의 성인으로 온전히 홀로 설 수 있도록 키워낸다는 것이 얼마나 거대하고 숨 막히는 일인지. 그 모든 것을 뚫고 이겨낸 저 결혼식 혼주 자리에 앉은 분들이 겪었을 무게가 어떠했을지. 그리고 과연 나는, 몇 달 뒤 태어나게 될 나의 아이를 저렇게 좋은 어른으로 키울 수 있을 것인지를. 과연 나는 내 부모님처럼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는지.
이제 내가 알던 세상이 크게 변할 것이다.
이제 내가 알던 세상이 크게 변할 것이다. 누군가 내 귀에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이는 모든 것이 평소와 달랐다. 우리 두 사람에게 쏟아지던 스포트라이트가 서서히 희미해져 감을 느낀다. 이제 나의 마음속 결혼식 커버 사진은, 아내와 나 단 둘이 아닌 양가 부모님과 함께 찍었던 사진이 될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우리의 결혼식은, 우리가 사랑하는 두 부모님께 감사하는 자리로서 더 의미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내 삶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삶에서 내가 지워지고, 소중한 다른 누군가가 내 삶의 주인공이 되는 삶. 적어도 나는 부모님께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삶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는 것인지도.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 나의 세상을 거대하게 울리고 흔들어 깨트릴, 그런 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