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세상을 그리다.
흔히들 농사는 잡초와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봄에 파종 후 가을 수확까지 농민들은 제초작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작물 사이의 잡초는 뽑아버리지만, 밭두둑이나 골 사이의 잡초는 제초제를 써서 없앨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원하는 작물의 수확이 제대로 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밭에서 재배하는 작물 이외의 것을 잡초라고 하며, 밭 이외에서 자라는 것은 산야초라고 한다. 내가 심은 작물 외의 모든 야생초가 잡초이고 제거 대상이다. 생존본능인지 재배작물보다 생육이 빠르고 번식력이 강한 잡초는 작물이 차지할 땅과 공간을 빠르게 점령하고 양분과 수분을 빼앗는다. 그리고 작물보다 빨리 자라 작물의 일광을 차단해서 광합성 작용을 방해함으로써 작물의 생장을 방해한다. 거기다가 잡초가 우거진 곳은 습해서 병균과 벌레의 서식처가 되고 작물의 품질을 저하해 생산을 방해한다. 그래서 농민들은 ‘잡초와의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
농원을 하면서 나도 잡초와의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처음 텃밭 농사 때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작물 사이의 풀들이 농원의 규모에 따라 나의 노동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규모로 공격해 왔다. 조금만 방심하면 어느새 작물보다 커져 버리고 재배작물들의 자리를 빼앗는다. 적대적으로 뽑고 또 뽑아도 도저히 이들을 제거할 방법이 없었다. 보다 못한 마을 분들이 제초제를 써야 한다고 혀를 쯧쯧 찬다. 고집스럽게 제초제를 쓰지 않고 잡초를 제거하는 방법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일 보 후퇴하여 상생의 방법을 선택했다. 밭의 두둑 사이의 골의 면적을 조금 넓히고 작물을 심은 초기에는 잡초를 뽑아서 제거했고 그다음 작물보다 크기가 작은 풀들은 그냥 놔두었다. 가끔 특별히 크게 자라는 잡초도 뽑아주기도 웃자라면 잘라주기도 했다. 아예 잡초를 잔디 관리하듯 했다. 잔디 같은 잡초들이 자리 잡으니 큰 잡초들이 아예 씨를 내리지 못했다. 잡초를 적으로 돌리지 않고 우군이 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요즘의 관행농법은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 비닐 멀칭을 한다. 밭을 갈아 골을 탄 다음에 작물을 심을 두둑에 검은 비닐을 덮는다. 씨를 아예 내릴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닐 사이의 골에는 제초제를 뿌린다. 그렇게 잡초가 보이지 않는 깨끗한 밭을 만든다. 그 결과는 수시로 뿌려대는 제초제의 독성이 토양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또 비닐은 잡초가 뿌리내릴 수 없게 하는 대신 땅의 호흡을 방해한다. 게다가 한여름에는 비닐 안 흙의 온도를 높여 주기 때문에 가끔 여름에 가물 때는 작물들의 뿌리가 타 죽기도 한다. 거기다가 골 사이에 잡초가 없어서 전염병이 오면 몰살을 하는 폐해도 있다.
잡초와 공생을 선택한 우리 밭은 전염병의 폐해를 한 번도 입지 않았다. 작물 사이의 잡초가 마치 방어막처럼 전염병의 확산을 막은 덕이다. 거기다가 장마 때나 가물 때는 땅의 수분조절까지 해 준다. 또 잡초와 경쟁을 하며 건강하게 자란 작물은 맛과 품질이 뛰어났다. 뜻하지 않게 잡초들은 훌륭히 자기의 역할을 했다. 물리적인 수확량은 많지 않아도 우리같이 유기농으로 직거래를 하는 생산방식에 잡초는 쓰기에 따라 유용한 자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잡초와 공생을 하면서 자연스레 잡초의 고마움을 느낀다. 내가 원하거나 계획하지 않았다고 붙인 ‘잡초’라는 말은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온 이기적인 단어이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잡초의 종류가 다르고 잡초라고 불리는 많은 식물도 쓰이는 방법에 따라 다양한 용도가 있다.
감기나 신경 안정용으로 널리 쓰이는 갈근이라는 칡과 새콤달콤한 맛과 씨가 씹히는 맛이 일품인 과일 산딸기가 여기 정선에서는 밭농사에 가장 해로운 잡초다. 이들의 생명력과 번식력은 감당을 못할 정도로 강하다. 주로 산비탈에 밭을 일구어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농민들에게 칡과 산딸기 등은 제거 대상 1호다. 그 외 한방에서 해열, 발한제로 쓰이고 민간에서는 간이나 야맹증의 치료 약으로 이용되며 변비에도 효과가 있다는 민들레나 항균 소염(抗菌消炎), 항바이러스, 면역증강 등의 작용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쇠비름 등의 약용식물들도 재배하는 작물이 아니어서 잡초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을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자연의 생태계에 속하는 모든 생명체는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와 가치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모든 생명체에는 저마다 의미와 가치가 있다. 사람의 기준에서 그 쓰임새와 활용방안을 모를 뿐이다. 세상에 잡초는 없는 것이다. 장애도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가 원하지 않았고 우리가 잘 모른다고 잡초처럼 적대적으로 격리 대상이 되어 버린 게 아닐까?
귀농이라는 삶 방식의 전환은 나에게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그동안 살아왔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미래에 관한 생각을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나름, 성공의 길을 걸어갔고 남들보다 잘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삶 속에는 내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 뭔가가 되고 싶었고, 잘 살고 싶었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삶의 질에 대한 문제라기보다 그냥 물질적인 충족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였고 경쟁 심리의 발로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목적도 계획도 의지도 없었던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회라는 무대 위에서 나는 방관자였고, 기회주의자였으며 기타 무리 중의 1인이었다. 이렇게 자신에 대한 실체가 보이면서 내가 살아왔던 세상도 유체 이탈을 하듯 벗어나서 보이기 시작했다. 후회스러웠다. 그런 나의,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치는 인정하기가 싫었다. 그동안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며 추종해 왔던 삶의 방식과 철학들이 기둥을 빼버린 탑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변화의 시작은 장애를 대하는 사회의 편견과 그에 대해 억울함을 느끼면서부터였다. 구체적으로는 아들의 교육을 접하면서 왜 이 아이들의 교육 결과는 이럴까? 애초 교육의 목표를 이렇게 설정한 것일까? 장애인에 대한 특수교육의 최종 목표가 시설이었나? 기존의 사회질서나 관습 시스템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당연하게 여기던 것에 대한 의문이 시작되었다. 뭔가 답을 찾아야 했다. 고민 끝에 결과가 뻔해 보였던 아들의 교육을 학교의 특수교육보다는 실생활 적응에 중심을 두고 시작해 보았다. 학교보다는 집에서의 교육에 시간을 할애하면서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교육의 효과에 나는 고무되었다. 결국, 피교육자의 장애 문제라기보다 무책임한 현 교육시스템의 문제라는 걸 막연하게나 알게 되었다. 교육시스템 또한 이 아이들의 사회적 설정이 ‘보호 관리대상자’로 잘못 맞춰져 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생산적인 역할에 이들의 자리는 처음부터 없었다. 조물주가 맡긴 역할을 인간이 모른다고 잡초로 규정해 제거하듯이 이들도 ‘장애’라는 주홍글씨를 씌워 이 사회에서의 자리를 제거해 버린 것이다. 마치 음모처럼 이들을 위한 교육이라는 것이 이들의 정신과 가족의 희망을 말살해버리는 과정으로 둔갑해 버렸다. 교육의 과정이 끝나면 몇 년의 방황을 거쳐 자연스럽게 격리시설로 가는 것을 원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 뻔한 과정에 이들의 부모들은 이 아이들의 ‘장애’ 판정과 동시에 지옥 같은 절망감을 느끼게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본능적인 사랑의 힘마저 길고 고통스러운 교육의 과정을 보내는 시간 동안 탕진해 버리고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유사한 억울함이 사회 곳곳에 숨어 있었다.
“우리 아들은 막노동을 시키더라도 여기서는 살게 하지 않을 거야. 무조건 서울 보내서 살게 해야 해.”
귀농 후에 가까워진 동네 노부부의 이야기다. 농촌이라는 이유로 이곳은 교육, 정보, 의료 등의 혜택에서 소외되어 있다. 인구의 부족으로 소비시장이 위축된 것이 원인이겠지만 그 근본에는 정부 정책의 문제도 있다. 그래서 이곳 농민들은 질병과 장애에 힘겨우면서도 악착같이 농사를 지어 도시로 자식들을 보내려 한다. 시골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자식들만큼은 억울하게 살지 않기를 소원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양한 기회에서 멀어져 있었다. 특히 이런 지역적인 장애는 대물림이 된다는 것이다. 정말 불공평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문제가 자기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고 생각되면 무시하고 동조하고 있다. 내가 상대적인 혜택을 누리는 것에 만족하며 남의 불행을 방관해 버리는 것이다. 침묵과 방관이 악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것도 이때 알게 되었다.
물질에 대한 욕구가 마치 팩맨처럼 무차별 인성을 먹어버리는 세상이었다. 물질 만능주의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사람을 인간성보다는 능력 위주로 구분하게 되었고 세계의 위인도 능력자들이 자리하게 되었다. 우생학이라는 학문까지 등장해 인간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만물을 총괄하는 돈이 자리하게 되면서 이제 사람들은 능력과 돈의 유무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갔다. 이제 착함이 무능력으로 희화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하게 사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런 잘못된 것이 모범이 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냥 모르고 살다 죽을 걸 하는 후회가 밀려든다.
뭔가를 해야만 했다. 그냥 억울하게만 살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먼저 사람들을 만나 보았다. 비슷한 억울함을 공유할 만한 사람, 같이 문제 해결을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으로 장애 아이들의 부모와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 그리고 특수교사 등. 그들을 만나면서 또 하나 알게 된 건 장애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이 장애와 가까이 있을수록 더 심하다는 사실이었다. 부모나 가족이기에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사랑과 의무감, 종교적인 헌신, 그리고 직업적인 사명감으로 무장한 이들의 편견은 무서울 정도로 확고했다.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에 있는 사람이기에, 비장애인으로서 장애인의 사랑하는 가족이기에 편견과 피해의식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변화는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