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소송: 청각장애인, 어떻게 대표를 하냐고요?
주렁주렁 열렸다. 민사소송의 포도송이가.
당장, 변호사를 써야 해!!
감정을 빼라 했다. 지금 변호사를 써서 뭘 할 건데? TV 속에 등장하는 조사원이 있는 변호사? 실상은 그렇지 않다.
변호사는 스스로 조사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가 선임할 수 있는 변호사들은 그랬다.
경찰조사를 받으면서 느꼈던 점은, 아무리 유능한 조사원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 실체를 모르면 그들은 도와줄 수 없다. 변호사도, 법무사도, 세무사도 마찬가지였다. 천만 원 변호사는 마음의 안정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천만 원도 전략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정보가 부족했다. 우리는 그 정보를 촘촘히 채우기 시작했다. 현재 진행 중인 계약건의 대표님은 이러한 상황을 이해해 주시고,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이전 법인 계약과 관련하 내용을 수소문해봐 주시고 보통의 계약건을 진행하는 우리에게 다양한 의견으로 조언을 주셨다. 물론, 우리는 계약의 당사자였고 우리의 계약을 위한 고군분투 사이사이의 공간에 그분의 한마디 한마디를 담아 우리들의 정보를 채워나갔다.
법인과 개인은 다른 인격체입니다.
법인과 개인 모두를 방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법원에서 날아온 사건들이 다채롭다. 두건은 납품업체로부터 민사 소장이었고 한건은 지급명령 신청서였다. 미수잔액증명서와 함께 제출이 되었다. 한건은 계약금 반환건이었다. 한 곳은 이전 법인과 이후 법인 두 곳에 보냈고, 또 대표가 누군지 몰라 각자 다른 대표로 소송했다가 변경을 한 과정도 있었다. 법인 간의 계약에서 계약금 반환을 청구하였는데 계약금은 이전 법인대표의 개인 통장으로 줬단다. 우리도 우리의 법인과 개인인 동생의 사건 정리도 시급했지만, 내가 보기엔 이들에게도 사건 해결이 시급해 보였다.
하나씩 하나씩 서류를 뜯어본다. 이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법원에서 날아온 사건들의 형식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언제까지’ 사건과 관련하여 답변서를 제출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느냐이다. 한 달의 기간이 있었던 건도 있었고, 2주의 기간인 건도 있었다. 또 담당 조사보에 문의를 해보니 빠른 사건 진행을 위해서는 이달 말 안으로 제출하는 것이 좋을 수 있다는 조언도 받았다. 소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한을 지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민사소송 답변서 제출기간은
소장을 받은 날(송달일)로부터
30일 이내입니다.
급하게 제출할 필요도 없지만, 급하지 않게 제출할 필요도 없다. 자료 수집을 충분히 한 후, 갖고 있는 자료를 모두 제출하지 말고,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뒷받침할 자료들을 선별하여 근거로 제출해야 ‘잘 읽히는 답변서’가 된다.
법원의 전자소송 시스템은 개인이 답변서를 잘 작성할 수 있도록 메뉴화가 되어있다. 사이트에서 순서대로 서식을 따라 내용을 쓰기만 하면 한 편의 훌륭한 답변서가 완성이 된다. 대리인의 경우 위임장 서식을 따로 발급받아 3개월 이내 발급분의 가족증명서와 함께 첨부하여 제출한다. 증거로 제출할 서류들도 각각 첨부로 증거를 함께 제출해야 한다.
답변서 제출이 끝나면 접수증이 발급되고 대리인의 메일로도 해당 내용이 발송된다. 제출 후에도 날짜가 잘 반영되었는지, 첨부파일은 빠지지 않았는지 꼭 확인하자.
첫 번째 민사 사건의 변론 기일에 대리인으로 함께 갔다. 소액 민사사건의 경우 일정 인원이 한꺼번에 재판에 들어가서 앞사람의 사건들을 들을 수 있다. 참석을 한 사람도 있고, 대리인이 온 사람도 있고, 소액사건은 가족이 대리인이 가능하여 부모님이 온 경우도 있었다.
법원 안에서는 핸드폰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사건을 잘 모르는 어머님은 법무사가 시켜서 왔다는 대답으로 판사가 물어보는 질문에 핸드폰을 열고 ‘한번 물어볼게요.‘한다.
대리인의 자격은 청취가 아닙니다.
사건을 제대로 알고,
이를 대신하여 대답할 수 있어야 해요.
법무사의 입장에서는 ‘판결만 듣고 오시면 됩니다 ‘했던 사건이라던데, 판사님 입장에서는 이 사건으로 형을 살고 나온 원고의 상황과, 이미 합의가 진행되었던 점, 그리고 답변서를 제출하지 않은 무지 혹은 무관심에 성의 없는 원고의 태도 때문이었을까. 다시 기일을 잡으셨고, 전후 사정 모두를 알진 못하지만 그 과정을 본 나는 ’ 인간적‘이라고 느꼈다.
우리의 사건 원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피고석엔 동생과 내가 앉았다. 제출한 답변서를 모두 읽으셔서 내용은 아시지만 겉으로 보면 멀쩡한 동생이 이해가 되지 않으셨던 모양이었다.
청력장애가 있는데,
어떻게 법인 대표를 합니까?
청력장애가 심한 편입니다. 하지만 청력만 좋지 않을 뿐 다른 감각은 오히려 뛰어납니다. 법인대표로서 업무를 하는데 가족들이 함께 일 할 예정이었기에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곤조곤 대답했다. 판사님은 마이크를 사용하고 계셨고 동생은 보청기를 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이크의 음성은 동생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앉아있었지만 아무것도 들을 수 없어 동공지진만 반복했을 뿐, 밖에 나와 다시 설명해줘야 했다. 처음 와 본 법원은, 뭐랄까, 인간적이나 시스템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곳이었다.
답변서 제출 이후 원고가 이를 받아들이면 소송이 취하될 수 있고, 아니면 다시 날짜가 잡힐 수 있다고 알려주셨다. 답변서 내용을 받아들였던 것일까. 소송은 취하되었고 없던 일이 되었다.
두 번째 사건에는 회사 휴가를 낼 수 없어 엄마가 대리인으로 참석해 주셨고, 세 번째 사건은 이의제기와 함께 답변서의 내용을 제출했다. 세 건 모두 전자소송을 통해 답변서를 제출했고, 세 건 모두 원고가 취하했다. 법인과 동생 개인에게 날아왔던 사건들은 사라졌다.
정보를 모으는데, 그리고 정보를 이용하는데 도와주신 고마운 분들이 많다. 그런데 그 고마운 분들 중 ‘이런 상황임을 알면서도’ 웃는 가면을 쓰고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 우리는 정글에 던져졌었지.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이 정글에서 살아남기만 하는 걸로는 부족하다고. 이제는 내가 이 숲에서 길을 만들어야 했다. 그 길의 이름은, 카이나프로젝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