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실연필 Nov 29. 2021

언젠가 별이었을, 인간에 대한 연민

최은영 장편소설〔밝은 밤〕서평

소설을 읽다가 숨죽여 울어본 적이 언제인가 싶다.

아니 소설을 읽어본지가 언제인지 싶다가 더 정직한 말이겠다.


소설, 시, 문학이라는 단어가 삶의 효용성이라는 가치와 맞닥뜨렸을 때 이제 어른이 된 나는 '돈의 속성'이나 삼프로 유튜브를 는 것으로 결론을 봤다.

드라마도 볼까 말까 한 말라비틀어진 감성에 소설이라니.


굳이나 책을 읽어야 한다면 무례한 사람에게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회생활의 팁이나 인간관계의 피곤함을 덜어줄 수 있는 인스타의 짧은 글귀 모음을 보는 편이 나았다.


적어도 사회생활에 써먹을 수 있는 한 두 가지 비책들을 주문처럼 외우고 나면 스스로 뭔가 노력하고 있구나 안심이 됐으니.


그러니 최은영의〔밝은 밤〕을 집은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표지에 바다 위 작은 돛단배. 노을이 지는 바다의 오묘한 하늘빛이 내가 떠났던 제주의 그것과 닮아서, 삼척의 그것과 닮아서, 순전히 그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집었다.

이 책이 할머니와 그 윗대의 할머니, 딸과 손녀에게로 관통하는 깊은 슬픔에 관한 얘기인 줄 알았더라면 맹세코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슬픔은 세상에 차고 넘치며 나의 삶도 기쁨보다는 적당히 아리고 쓰린 배경 속에 조성되었기에 더 이상의 슬픔은 느끼고 싶지도, 꺼내어 들춰보기도 싫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난 이 책의 한 자 한 자를 귀한 마음으로 읽었다. 이야기의 화자인 지연이 서울에서 희령(소설 속 도시)으로 내려갈 때의 덤덤한 슬픔으로 시작해서 그의 할머니, 엄마의 시린 삶, 누구도 의지할 수 없었던 시대 속에 이 세상 단 둘 뿐이었던 새비 아즈마이와 삼천(증조모)의 연대를 여리고 쓰라린 살결을 만지듯 읽었다.


천주교 박해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관통하는 서사 속에 개인의 삶은 참혹하리만큼 비참한 그것이었다. 그것은 개인의 힘으로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강물과 같았다.


정신대에 끌려갈 뻔한 백정의 딸과 천주의 뜻을 받들어 백정의 딸을 구했으나 평생을 그 피해의식으로 살아간 남자. 천주의 뜻을 누구보다 사랑했으나 천주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던 새비 아즈바이, 총살로 오빠를 잃고 피폭으로 남편을 잃고 엄동설한에 딸 하나와 피난을 떠났던 새비 아즈마이.

격동의 한국사를 정면으로 거쳐온 이들의 인간성은 어딘가 손상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감춰야 했으며 무서워도 무섭다는 를 내서는 안됐다.


화가 나면 그런 때가 있었다고 다른 사람을 대하듯 자신을 대해야 했다. 운동장에서 마을 사람들이 총살을 당할 때도 울어서도, 소리를 내서도 안됐다. 죽음으로 가족이 헤어질 때까지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말들로 가슴이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아픔이 세대를 거쳐 증조모, 조모, 엄마, 딸에게로 이어져 다른 모습의 슬픔이 되었다. 슬픔의 얼굴들과 이름은 달라졌으나 어딘가 손상된 마음과 인간성은 묘하게 닮아있었다.


엄마에게 수용받지 못한 지연의 슬픔은 할머니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엄마의 슬픔이었고 증조부로부터 받지 못했던 인정과 배려, 남편에게 받은 배신감은 할머니의 슬픔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시간의 힘은 아주 세서 아픔의 시간을 묵묵히 통과한 이들에게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사실 그것이 시간의 힘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저 희령 바다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부서지는 파도에 까르르 웃어대며 놀았던 기억 너머로 이제 그만 아파도 된다고, 너는 언제나 혼자가 아니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돌아가신 내 할머니가 생각났다.

매일같이 내 엄마와 싸우며 엄마에게 악다구니로 욕을 퍼붓던 사나운 할머니, 아들이 아니라고 나를 낳은 엄마에게 쌀도 내주지 않았던 할머니, 몰래 사온 새우깡을 오빠 방에만 가만히 두었던 할머니, 아빠와 오빠의 빨래를 넘어갔다고 때렸던 할머니, 매일 막걸리를 드시고 욕을 하시며 울던 할머니, 친구들을 데려온 언니에게 욕을 퍼붇던 할머니. 어린 나를 때렸던 할머니.


그리고 또 할머니가 생각났다.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죽다 살아난 남동생을 시댁에서 키워야 했던 할머니, 동생을 더부살이시킨다고 매일같이 시어머니에게 맞았던 할머니, 아들을 낳지 못해 남편에게 무시당했던 할머니, 북에 다른 여자를 두고 온 남편과 같이 살아야 했던 할머니, 아들을 낳았으나 공부시키지 못했던 할머니.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덤덤하게 그의 인생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할머니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고통스러워 매일 잊어버리려 술을 드셨던 할머니를. 옥상에 올라가 한참 하늘을 바라보다 가만히 우시던 내 할머니를.


어찌할 수 없는 상실과 깊은 상처를 입은 인간성은 어딘가 손상된다. 그러나 손상된 인간도 인간으로 인해 연대하고 상처를 보듬는다. 너의 아픔과 상처를 나는 알지. 나만은 알지. 서툰 눈빛과 스치는 손끝의 온기만으로도 서로가 지켜주고 있음을. 우리는 혼자가 아님을 안다.


인간은 참 이기적이어서 언제나 자기 뒤의 사람을 확인하곤 한다. 나도 아프지만 내 뒤에 있는 저이의 아픔이 더 절절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위로받는 것이 인간이다.


어제 내 뒤에 서있던 네가, 오늘은 네 뒤에 서 있는 내 손을 잡아주는 것. 그것이 최은영의 말대로 언젠가 별이었을 우리 인간의 위로와 연대다.

매거진의 이전글 태몽, 해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