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만난 <집에 대한 이야기>
나는 어렸을 적부터 할리우드 하이틴 영화를 좋아했는데 영화 속 주인공의 집은 항상 이층 집이었다. 가난한 주인공이라면 낡고 허름한 이층 다락방에서 꿈을 키워갔고 반대로 화목하고 유복한 가정이라면 넓고 세련된 이층 집에서 행복한 일상을 살아갔다.
한국의 아파트 생활이 익숙했던 나는 영화 속 이층 집을 보면서 막연한 로망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난생처음 발리에서 이 층 단독 빌라에 살아 볼 기회가 생긴 나는 한껏 마음이 들떴다. 친구들의 배려로 썬(함께 일했던 스쿠버다이빙 강사님)과 함께 이 층의 큰 방을 썼다. 이층 침실에서 창 밖으로 비치는 햇살을 맞이하며 자연스레 아침에 눈을 떴고 모닝커피를 마시러 나무 계단을 내려가면 따뜻한 주방과 거실이 펼쳐졌는데 이 풍경은 영화 속 주인공처럼 특별한 일상을 선사해 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일주일쯤 지났을까? 나는 그토록 로망이었던 이 층 방에 잠을 잘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가지 않게 되었다. 일단 이층은 일층보다 덥다. 뜨거운 열은 위로 올라가고 발리의 강력한 햇빛이 지붕에 365일 내리쬐니 이층은 아무래도 더워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게다가 큰 창문이 있다면 방이 더워지는 속도는 가속이 붙는다. 24시간 내내 에어컨을 켜 놓고 있으면 물론 괜찮겠지만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니(보통 발리에서 빌라 전체를 월세로 계약하는 경우 전기세는 불포함이다) 아침에 일어나 에어컨을 끄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사우나 같이 습하고 뜨거운 공기로 숨이 턱턱 막혀오는 이층 방으로는 잘 올라가 지지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많은 시간을 일층 거실에서 보냈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6인용 원목 테이블이 있는 공간이었다. 원래 이 테이블은 부엌에 있었는데 모두가 함께 컴퓨터 작업을 하거나 보드게임을 하며 놀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서 거실로 옮겨왔다. 거실에는 큰 폴딩 창문과 ㄱ자 모양의 소파가 있었는데 그 앞에 테이블과 의자를 놓았다. 편하게 앉고 싶을 때는 쿠션이 있는 소파 쪽에 앉아 영화를 보곤 했고 집중해야 할 때는 바깥쪽의 나무 의자에 앉아 매일 아침 인도네시아어 강의를 들었다.
날씨가 좋을 때면 폴딩 창문을 활짝 열고 바깥 풍경을 지켜보았는데 물 흐르는 소리, 새 지저귀는 소리, 특별히 어디를 놀러 가지 않아도 집에서도 충분히 발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 층은 이 층에 비해 항상 시원했다. 이때 이 테이블에서 지낸 기억이 좋아서인지 언젠가 내 집이 생긴다면 꼭 원목으로 된 큰 테이블을 놓으리라 생각했다.
아, 그리고 이 집에 사는 동안 멋지다고 생각한 수영장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 아마 이 빌라에 단기로 놀러 왔다면야 당장 수영장에 들어가 사진도 찍고 두 손가락이 쭈글쭈글해질 때까지 놀았을 것 같은데 막상 이곳에 산다고 생각하니 수영장에 들어갈 일(?)이 없었다. 서핑을 다녀오거나 비치클럽에 다녀오는 날이라면 더욱이 수영장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서 젖은 옷을 말리고 꿉꿉함을 씻어내기 바빴고 샤워 후엔 당연히 다시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
살아보니 로망이었던 이층 집도, 멋진 수영장도 결국 잠시뿐이었다. 처음에는 그 모든 것이 마치 꿈같았고, 내 삶이 영화 속 주인공처럼 특별해진 것만 같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신선함은 일상의 반복 속에 조금씩 사라졌다. 이 층으로 오르내리는 계단은 점점 귀찮게 느껴졌고, 수영장도 더는 설레는 휴식의 공간이 아니었다. 로망은 현실과 만나면서 생각보다 짧게 머물렀고 결국 익숙해진 일상 속에서 진정한 편안함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