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부탁할 필요도 없게 잘하는 것들
10대부터 60대에 휠체어를 타는 여성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낸 책이 있다. 김지우 (구르님으로 활동하는 인플루언서)가 다른 여성 장애인에게 길라잡이가 되고 비장애인에게는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선보이는 책에 나는 60대의 사람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나이로 따져 가장 뒤를 점했다는 것에 좀 뻘쭘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스타는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이라고 스스로의 최면으로 나이 들었음을 긍정화하였다. 나는 책 속에 같이 등장하는 각각 다른 세대를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했고 관심이 쓰였다. 그래서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인터넷에서 찾아 알아보기 시작했고 모두 함께 만나는 자리를 만들자고 제안을 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 장애인 여성들의 활동이 궁금해서 책에서 보이는 긍정에너지를 가진 젊은이들을 만나 응원의 밥 한 끼를 대접하고 싶었다.
단체방에서 소식이 오가며 휠체어 6대가 들어갈 식당을 찾고 여러 명의 시간과 날짜를 맞추다가 예정된 날짜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오고 가는 대화가 분주해졌다. 당일날 참석이 어렵다는 소식을 전한 이도 있고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할 거라는 문자도 올라왔다. 나는 당일날 우왕좌왕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오래된 배터리가 간당거리는 휠체어로 갈 수 있는 거리인지 또 도착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하루전날 답사를 하며 만날 사람들의 모습과 말을 상상해 보았다. 특수교사로 일할 때 만났던 열약했던 시대의 장애인의 삶을 알 뿐이지 현재 선진국반열의 한국에서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어떨지 너무 궁금했다. 한 시간쯤 일찍 식당에 도착했다. 아래층에 빵집이 있어 거기서 기다리기로 작정을 하고 두리번 대는데 휠체어를 타고 앉아있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스스럼없이 다가가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눌 때 이미 나는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에게서 뿜어 나오는 당당함에 눈이 부셨고 가슴까지 환한 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30대의 홍서윤 님은 첫인사에서부터 압도하는 밝은 미소와 자신감 뿜뿜 그 자체였다. 마치 아는 사람이었듯이 첫인사를 건네는 것에서부터 세상사 모두 다 깨우친 듯 누구에게라도 뼈 때리는 현실감을 들려줄 수 있는 타고난 리더였다. 그가 추구하는 박사의 전공이 관광학이란다. 휠체어를 탄 사람이 전공하는 과목이라는데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무 신박한 분야라 급 관심이 쏟구친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에게 미래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대충 자신감으로 세상을 부딪치며 사는 사람들이 가끔 "편안함"을 추구하는 무의식을 달래는듯한 답이 돌아온다. "한량"으로 사는 것이 꿈이란다.
턱걸이 20대라는 주성희 님은 나와 스포츠 삶을 가장 많이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라 편안할 것 같았다. 부리부리한 눈에 도전정신과 꺾어질 수 없는 강한 속내가 있는 것 같은데 잘 읽히지 않는 타고난 자유인이다. 타고난 매력도 보이고 본인도 스스로의 매력을 아는 듯도 하다. 하지만 10분 만의 대화로 대부분의 성격, 능력, 태도 등을 스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나에게도 잘 읽히지 않는다. 장애 관련 인권운동가인 그의 입에서 놀랍게도 누군가 나를 "양육"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왔다.
우리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놓은 저자 김지우 님은 내가 우연히 인터뷰장면을 보고 연락해 덕질을 통해 만나고 내 브런치 글에 소개한 사람이다. 당연히 나는 지우의 자신의 일에 대한 강한 의욕과 튀는 아이디어로 누구보다 열심히 삶을 사는 모습이 좋지만 그보다 더 가치 있게 보는 것은 가장 비장애인의 삶과 생각을 즐기고 산다는 점이다. 식당까지 남자친구가 동행을 해주고 우리들에게 좋은 시간을 보내라는 말을 하고 떠나는 것이다. 그냥 그 나이 때에 다가오는 인생을 한 걸음씩 두려움 없이 걷는 모습이 좋다.
편집자인 김나윤 님은 요즘 내가 한국사람에게서 낯설어할 정도로 보기 힘든 수준의 따뜻함과 남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감성을 장착하고 있다. 게다가 타고났을 수밖에 없는 수준의 겸양… 와! 이런 사람을 만난다는 것도 이 사람과 인싸가 되는 것 자체가 로또 같은 행운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런 비장애인으로 가득 찬다면 그곳은 바로 인류가 꿈꿔야 하는 파라다이스이지 않을까 생각하며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천국을 잠시 그려보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상상한 그 이상으로 멋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왜 한량이고 싶고, 진심 양육당하고 싶은 것일까? 대화중 불쑥 들어내는 불안의 그늘이 스쳐 지나가듯 던져지는 말속에서 나는 왜 그들 안에는 타고난 천성과 멋진 모습과는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장애가 있던 없던 이런저런 다양한 맘이 순간순간 드는 것은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들은 “일반적”인 삶의 굴레를 넘어선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비장애인들을 모두 포함해 다 따져봐도 “난”사람들이다. 그들 정도로 많은 개성과 능력을 가진 “난”비장애인들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쫓기듯이 자신의 욕망을 향해가는라 자신의 약한 부분은 전혀 인지할 틈도 없기 마련이다. 살아내야 하는 삶을 견디는 것에도 부족할 수 있는 양의 에너지를 몸을 가누는 일까지 나누기에 벅차해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저리기도 하다.
하지만 완벽하지 못한 인간 누구나에게나 있는 작은 언덕이라고 생각하면 그들의 상반된 감정은 정상이긴 하다. 그것을 표현하는 완벽한 영어가 있다. 바로 "Same Difference"로 "같은 정도의 차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장애 관련 고민이던 비장애인 고민이든 간에 마치 서로 다른 고민인 듯 하지만 고민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같은 고민이라는 것이다. 즉 고민이 상대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아 보여도 각자가 느끼는 절대적인 고민의 크기는 같고 누구나 다 겪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설명은 두 가지 면을 분명히 해야 한다. 장애로 인해 겪게 되는 독특한 문제점들은 논의를 통해 사회와 국가 전체가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하는 일이라는 점과 장애인 개인이 당면한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장애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라떼는 "젊은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함께 모였던 젊은이들도 다음에 꼭 연락을 하라며 그때는 "요즘 것들" 다니는 곳을 안내하겠다고 했다. 또 다른 "요즘 것"이 동행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너무 신나는 일이다. 요즘 것들의 초대를 받은 것도 신이 나고 대화를 하고 나니 앞으로의 미래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맡겨만 두면 든든하게 알아서 잘할 요즘 것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 것이다. 사족이 되겠지만 “쓰러질 때까지 지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에 아주 미쳐 버리라”라고 격려하고 응원하고 싶다. 이 말은 훌륭한 요즘 것들을 향한 조언이 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늘 주변에 널려있는 흥미로운 것들 쫒는데 정신이 팔려 홀린 듯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런 삶을 지속하겠다는 나와의 약속이다.
홋카이도에서… 5/25/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