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조르단과 농구장을 공유하다
미네소타에서 유학 중에 나는 휠체어 농구팀에 공을 주워주려고 자원봉사를 나갔다. 여자 휠체어 농구팀에 감독이 내가 다리를 저는 것을 보자 바로 휠체어와 농구공을 주고 골대로 던져보라고 했고 그날로 나는 자원봉사자에서 선수로 발탁되었다. 미네소타 휠체어 농구팀은 미국 내 1, 2위를 다투는 팀이었다. 매주 2회 저녁에 만나 연습을 했고 가끔 지역사회 기업체에서 우리 팀을 초청해 시범경기를 하여 기금 모금도 하였다. 휠체어 농구는 일반 농구와 같은 코트를 사용하고 농구골대의 높이도 같고 경기 룰이 거의 똑같다. 다만 우리는 휠체어를 타고 하기 때문에 키 차이도 심하고 자유투도 같은 거리에서 앉아 던지기 때문에 거리도 멀고 뛰어오르며 모멘텀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비장애 선수들과의 경기에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업체에 건장한 농구선수들을 휠체어에 앉히면 전세가 역전이 되는 것은 순간이었다.
우리는 휠체어 기동력이 남다르고 슈팅 실력도 비장애인들과 비교에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코트를 누볐고 그들이 공을 다루랴 휠체어를 두 팔로 저으랴 정신이 없을 때 우린 그들의 공을 쉽게 가로챌 수도 있고 빠른 속도로 골대를 향해 가면 아래도 위로 골대를 휘감아 올라가며 점수를 내는 리버스 레이 업 (Reverse Layup)의 묘기까지 보이며 상대방을 제압하는 경기를 하곤 했다. 후반에 이르면 가끔 그들에게는 한 골에 2점을 주고 우리 팀은 1점씩으로 계산을 해도 쉽게 이길 수 있는 전국 챔피언 팀이었다. 나는 첫해 루키 시절을 지내며 미내소타 대학의 농구팀의 코트에 가서 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연습을 했다. 앉은 자세에서 골대로 공을 던져야 하는 자유투를 위해서 역기를 들어가며 팔힘을 키우기도 했었다. 나는 뭔가 한번 한다고 결정하면 너무 열심히 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한국 국적이라 미국 대표단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1988년 서울 패럴림픽에 미국 농구팀을 따라 참석할 수 있었다. 1989년에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NBA 프로농구팀에 결성되었고 우리 팀은 롤링 팀버울브스로 팀명을 바꾸었고 농구 시즌 홈경기 중 하프 타임에 시범경기를 하러 참가하였다. 그 유명한 마이클 조르단이 뛰는 그 농구장을 우리 휠체어 농구팀도 같이 사용하며 25000여 명의 관중 앞에서 휠체어농구의 묘미를 알리곤 했었다. 그날 나는 무려 12점을 기록했고 득점을 할 때마다 장내 아나운서는 내 이름을 크게 외쳤었다.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학장이 내 경기를 관람했었고 잘했다 칭찬하며 그 후 그는 내 이름을 알고 지금까지 알고 지낸다. 그 후 우리 팀은 미 전국 여자 휠체어 농구 대회에서 일등을 했고 나도 그간 노력했던 대로 2개의 자유투를 성공하며 팀 승리에 일조를 했다. 우리 팀 선수들은 모두 챔피언 반지를 받았다. 유학 중 재미있던 에피소드 중에 하나였다.
만약 어떤 장애를 가진 사람이 농구를 좋아한다고 하자. 많은 부모와 교사들은 일반인도 어려운데 언감생시 장애인이 무슨 농구를 직업으로 삼겠느냐며 말리는 것을 봤다. 미국 통계에 의하면 고등학교팀에서 프로팀으로 갈 수 있는 확률이 야구선수가 0.015퍼센트로 도둑이 첫 번 시도에 우리의 비밀번호를 맞히는 수준이고, 미식축구 선수가 0.09퍼센트로 우리의 IQ가 150이 될 수준이며, 농구선수가 0.03퍼센트로 포커게임에서 포카드를 한 번에 받을 확률이라니 장애를 가진 사람이 프로선수가 되겠다면 말리는 게 정상적이라 볼 수 있다. 나는 시키라고 조언한다. 그렇게 조언을 하는 많은 이유 중 몇 개를 댄다면 좋아하는 게 생겨서 하겠다면 열심히 하는 태도를 키울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농구뿐만 아니라 다른 기술도 익히게 될 것이고, 경험을 늘리면 다른 것으로 일반화가 되기도 쉽고, 또 좋아하는 것은 바뀐다는 것이다. 그것보다도 나는 농구 좋아하면 농구선수가 돼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 농구를 주제로 한 다양한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 한 일화가 있다. 셰킬 오닐이라는 유명한 선수가 있었다. 그는 우연히 농구를 좋아하던 청각장애인과 친해졌고 그를 농구장으로 가끔 부르기도 했다. 그 친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해야 하는데 장애로 어려움을 겪자 셰킬은 그들 농구단에 비품관리를 시키고 싶어 했다. 농구팀이 연습을 할 때 공과 필요한 장비들을 준비해 가져오고 연습 동안 선수들을 돕고 비품을 정리하는 일을 주고 싶은데 농구단에서 그런 직원을 채용할 비용이 없다고 했다 (글쎄.. 그 부자 구단에 비품 관리인을 채용할 월급이 없다는 것이.. 좀 이해가 안 되지만.. 믿자!). 그러자 오닐은 개인 비용으로라도 그를 채용했고 팀 전체의 비품관리를 시켰다. 그 친구는 비품관리도 잘했지만 오닐과 공을 주고받으며 농구공을 골대로 넣는 행복을 얻었다. 수만 명이 모이는 농구장에 정작 농구선수는 코트에 10명, 사이드에 많아야 20명일까?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다 선수로 뛰면 농구선수 월급은 누가 줄까? 당연히 농구장에는 농구선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들이 많다. 장애인이 뭔가 좋아하고 뭔가 되고 싶다고 하면, 현실적이 아니라고 막기 전에 우선 두 팔을 들어 환영하고 최대한 성공하도록 열심히 돕자.